12월의 금요일 오후, 일본 젊은이들의 쇼핑 천국이자 IT의 메카로 알려진 도쿄 시부야. 땅거미가 지고 네온사인이 하나둘 켜지자 시부야는 두 개의 얼굴로 나뉜다. 큰 길은 송년회장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뒷골목은 차분하고 조용하다. 밤이 되면 한적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하다. 그런 시부야 뒷골목 복합건물 1층에 있는 이자카야 ‘라쿠’에서 ‘이자카야의 신’이라 불리는 우노 다카시(宇野隆史) 사장을 만났다.

창업 꿈꾸는 청춘들의 ‘오야지’

한국에서는 ‘장사의 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번역본이 출간 세 달 만에 6만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요식업 전문지 ‘닛케이 레스토랑’에 4년간 연재한 칼럼을 정리해 묶은 것이다. 원제목은 ‘토마토를 자를 수 있으면 식당을 열 수 있고, 병뚜껑을 딸 수 있으면 술집을 낼 수 있다’이다. 이 경영서는 일본에서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직원들은 다카시 사장을 “오야지”라고 부른다. ‘오야지’란 예스럽고 정겨운 아버지의 별칭인데, 그를 오야지라고 부르는 제자는 일본 전국에 300여명이다. 그에게는 지금도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줄은 선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에서부터 샐러리맨 생활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삶을 찾는 중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연을 안고 그를 찾는다. 수백억엔 매출을 내는 대형 프렌차이즈점을 제치고 왜 사람들은 19개의 작은 체인점을 갖고 연매출 16억엔을 내는 그를 ‘장사의 신’으로 부르며 따를까. 궁금증을 안고 그를 만났다.

타원형의 안경을 쓰고 인민복 스타일 재킷의 단출한 복장으로 나타난 그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개점 준비에 한창인 직원들을 향해 “여~” 하고 힘차게 인사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에, 쉴 새 없이 분주히 손을 움직이던 직원들도 경쾌한 목소리로 “오하이오 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라고 화답한다. 그는 자신의 책에 쏟아지는 관심에 대해 “직원들과 손님을 끌기 위해 최소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 내용을 소박하게 정리한 책인데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일본어 책 제목을 언급하면서 이자카야 경영이 정말 쉬운지 물었다.

“이자카야는 폼나고 어려운 요리를 만들 줄 몰라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책 제목 그대로 토마토만 자를 수 있고, 간단한 계란말이를 만들 수 있다면 이자카야 경영은 가능합니다. 어렵게 생각하고 남의 흉내를 내려고 하니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지치고 망하는 것이지요.”

“분수를 알아라”

그는 33세에 전 재산을 들여 16.52㎡(5평)짜리 점포를 열었다. 그 점포가 씨앗이 되어 도쿄를 중심으로 19개의 체인으로 늘었다. 1년 반 만에 하나씩 늘려간 셈이다. 개점한 점포마다 손님이 북적였고 흑자를 냈다. 남들이 불황이라고 아우성칠 때도 그의 점포는 하나같이 흑자를 이어갔다. 대기업에서 연수를 올 정도로 궁금해 하는 그의 흑자 비결을 물었다.

“분수를 아는 것이 기본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이자카야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자카야는 소통하는 곳입니다. 점주와 고객이, 고객과 고객이, 그리고 점주와 사원이 소박한 안주와 몇 잔의 술을 놓고 소통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규모나 유행을 좇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묻어나는 점포를 만들어야지요.”

인터뷰 장소로 그가 지정한 점포는 20년 전에 개점한 이자카야였다. 왜 19개 체인점 가운데 개점한 지 20년이나 지난 이 외진 점포에서 만나자고 한 것일까. 그의 점포는 대부분 교통이 편리한 중심부 부근이면서 후미진 곳에 있다. 입지는 안 좋지만 적자를 내는 점포가 단 한 곳도 없다. 입지로만 보면 C급인데 어떻게 흑자 경영을 지속하는 것일까.

“우리 점포는 대부분 인기가 없어서 임대가 안 되는 입지에서 시작했습니다. 20년 전 이 점포도 그랬지요. 점포를 임대하겠다고 하자 부동산업자가 정말 임대할 거냐며 몇 차례나 되물었어요. 하하하.”

처음 이곳에 점포를 계약할 때는 지금보다 더 입지가 좋지 않았다. 점포 앞은 커다란 콘크리트벽으로 가로막힌 지하철 차량기지였고, 1992년 당시 거품 경제가 붕괴되면서 사무실과 점포가 비어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이 점포는 수년간 비어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점포라면 굳이 경영자가 없어도 되겠지요. 이처럼 죽어버린 점포를 살려내는 것이 이자카야 경영의 묘미 아니겠어요. 덕분에 주변 지역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계약을 할 수 있었지요. 이자카야 경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기 비용을 적게 들이고 운영 자금에 여유를 두는 것입니다. 여유가 없으면 손님이 돈으로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순수한 접객이 어려워집니다.”

이 점포는 처음에는 청주와 소주가 주류였지만 지금은 와인하우스로 탈바꿈했다. 와인하우스라고 해서 고급스럽거나 우아한 분위기를 상상한다면 오산이다. 굳이 와인하우스의 색채를 찾는다면 허름하나마 와인쿨러가 있고 그곳에 200여종의 와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자카야는 폼을 잡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철칙을 지킨다.

“폼을 잡으면 치장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가격을 올려야 하지요. 그래서 누구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코르크를 열 수 있는 소박한 와인하우스를 콘셉트로 잡은 것이지요.”

와인하우스이면서 사케도 있고 소주와 맥주도 있다. 포도주를 잘 아는 직원이나 소믈리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고객이 직접 와인쿨러의 비닐문을 열고 들어가 가격을 보고 포도주를 선택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모든 포도주에 가격표가 붙어 있고 그 가격이 슈퍼마켓 가격보다 1000엔 정도밖에 비싸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익을 내는지 궁금했다.

“점포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포도주 사진과 기사 보이지요? 소믈리에를 따로 두는 대신 TV나 잡지에 나오는 포도주 전문가나 유명인, 그리고 블로그의 댓글을 활용합니다. 그렇게 포도주를 선택하게 하고 소박한 안주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합니다.”

전국에 제자 300여명

매장 내부. 점주와 고객, 고객과 고객이 소통하는 소박한 공간을 추구한다.
매장 내부. 점주와 고객, 고객과 고객이 소통하는 소박한 공간을 추구한다.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접시나 주방기구는 대부분 100엔숍에서 구입하고 야채는 저녁 6시 반, 슈퍼마켓에서 반액세일 할 때 구입한다. 50엔짜리 토마토를 40엔에 구입해 약간의 손질을 통해 350엔짜리 안주로 탈바꿈시키고, 25엔짜리 계란을 계란찜으로 만들어 400엔짜리 안주로 내놓는다. “집에서도 만들 수 있는 요리이면서 뭔가 다른 소박한 맛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곳이 바로 이자카야입니다.”

그는 일을 배우겠다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내치지 않는다. 알고 있는 노하우를 다 공개한다. 5~6년간 그에게 일을 배운 제자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이자카야를 열었다. 콘셉트도 서민적인 것에서부터 고급 점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역도 다르고 메뉴도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고객과 대화형 점포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제자가 다시 제자를 낳으면서 제자들이 경영하는 점포는 300개를 넘었다. 그러다 보니 전국 어디를 가든 ‘우노이즘’이 숨쉬는 이자카야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의 제자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입사 후 5~6년 뒤에 자신의 점포를 갖는 것이다. 그것도 100% 자신의 힘으로 내는 것이 조건이다. 5년간 일을 배우면서 개점을 준비하는데 점포 준비 자금으로 무조건 월급에서 10만엔을 저축하도록 한다. 5년간 꾸준히 모으면 600만엔이 모이므로, 창업지원자금 600만엔을 합하면 1200만~1300만엔의 창업자금이 마련된다.

“자신의 점포를 갖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생기면 눈빛과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말하지 않아도 먼저 출근하고 접객 태도도 변하지요. 그들은 5~6년 후에 독립할 자신의 가게라고 생각하고 예행 연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5년 동안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그는 대화형 점포를 추구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력’이라고 강조한다. 인간력이란 ‘배려하는 마음’ ‘대화력’ 그리고 ‘풍부한 교양과 경험’이 겸비된 것이다.

마요네즈에도 고객의 이름표를

“이 모든 것은 스스로 감동하고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5년 동안 감동하는 법과 그 감동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그 감동을 스토리화 하는 법을 체득하지요.”

그는 토마토 하나, 쌀 한 톨에도 스토리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마토 생산자를 알아야 하고 토마토에 들어있는 성분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만큼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관계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 가라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팬을 늘려가면 자연스럽게 흑자는 보장된다고 한다. 그는 마요네즈를 예로 들었다.

“하찮은 마요네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브랜드에 따라 맛이 다릅니다. 고객에게 마요네즈를 선택하게 하고, 고급 술집에서 마시다 남은 위스키를 보관해 두는 것처럼 마요네즈에 고객의 이름표를 달아 보관해 둡니다. 그 고객은 감격하고 반드시 다시 오지요.”

그는 경영자의 가장 큰 소양은 직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영자의 말 한 마디, 눈길 하나가 직원들의 힘이 되고 의욕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피곤해도, 심지어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속이 풀리지 않은 상태라 해도 점포에 들어가기 전에 뺨을 두드려 홍조를 띤 후 밝은 모습으로 인사한다. 부득이 화를 내야 할 때에도 밝은 표정으로 화를 낸다.

한국 포장마차는 산교육 현장

점포 입구
점포 입구

좋은 이자카야의 지표는 무엇일까. 그는 먼저 아르바이트 직원이 얼마나 감동하는냐를 하나의 지표로 본다. 즉 아르바이트 직원이 정직원이 되고 싶다고 애원할 때 이 점포는 좋은 이자카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는 철칙을 고수한다. 불황이나 호황에 관계없이 주문할 수 있는 메뉴를 많이 만들라고 한다. 고객이 주문할 때 저항감 없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요리를 개발하라는 것이다.

“유행을 좇다 보면 그 시기가 지나면 질리는 점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유행 따라 콘셉트를 자주 바꾸면 고객은 떨어져 나가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질리지 않는 점포를 만들어야 합니다.”

많은 경영자들이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돈과 시간을 아끼지 말고 다른 점포의 손님이 되어 보라고 한다. 손님의 입장에서 느꼈던 감동적인 서비스와 요리를 자신의 스타일로 재현해 보라는 것이다. 또한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오후 5시에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준비시간을 포함해 하루 9시간의 영업시간 동안 에너지를 모두 완전연소하라고 한다.

9시간 동안 같은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욕과 야욕, 그리고 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긴장을 유지하고 역동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서 매년 한국 연수를 실시하고 있다. 4~5명씩 조를 짜서 3박4일간 한국 포장마차 연수를 한다. 바로 ‘아줌마 파워’를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포장마차와 아줌마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늦은 밤과 새벽에도 그들의 얼굴은 굳어있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애착과 내일을 열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5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포장마차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뚝배기에 듬뿍 담아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을 보고 한국 사람들의 역동성과 힘찬 에너지를 느꼈다는 그는 한국의 포장마차가 바로 이자카야의 산교육 현장이라고 말한다.

제자들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 경영자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연(緣)과 은(恩)이라는 두 글자로 자신의 교육철학을 설명한다. “일할 때는 ‘은혜’를 중시하고 독립한 후에는 ‘인연’을 중시해야 합니다.” 즉 일할 때는 일자리를 주고 앞으로 살아갈 노하우를 배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직원은 경영자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열심히 일하며 수익을 내주어서 고마우니 서로에게 ‘은혜’를 주고받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은혜의 생각이 충실하게 행동으로 나타나면 독립한 후에도 좋은 인연이 지속되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와세다대학 중퇴

와인쿨러. 와인 하나하나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 고객이 직접 꺼내 온다.
와인쿨러. 와인 하나하나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 고객이 직접 꺼내 온다.

“‘은혜’와 ‘인연’의 관계가 뒤바뀌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소원해지고 인간관계가 뒤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고객이나 식재료 납품업자 등 모든 이해관계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이자카야 세계에 뛰어든 것은 와세다대학 4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면서다. 도쿄의 서민이 거주하는 고토구의 샐러리맨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풍요로운 생활은 아니었지만 독특한 시각과 위트를 지닌 어머니 덕분에 항상 웃으며 자랐다.

“우에노공원을 갔을 때였어요. ‘생각하는 로뎅’의 조각상을 보고 고개를 떨구고 하는 것은 ‘고민’이지 ‘생각’이 아니라며 ‘고민하는 로뎅’으로 바꿔 부르라고 했어요. 이처럼 저의 사회과 공부는 항상 어머니의 위트 있는 설명으로 채워졌지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면 원하는 곳 어디든 취직할 수 있는 시대였다. “대학 4년간 원없이 놀았어요. 4학년이 되어 보니 친구들은 국가고시에 합격해 있거나 대기업 취업이 내정돼 있었어요. 뒤처진 자신을 보면서 그들을 앞서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당시 자주 다니던 오뎅집이 있었다. 그런데 오뎅집 주인이 수시로 문을 닫고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1년에 서너 번씩 해외여행을 가도 남는 것이 장사라는 것을 안 그는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을 중퇴했지만 부모의 체면을 생각해 일단 커피콩 판매회사에 취직했다. 거기서 커피와 접객 자세에 대해 배웠다. 점포에 배치되었을 때는 바닥을 모포가 아니라 손걸레로 직접 닦는 등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를 눈여겨본 고객이 스카우트해 자신이 경영하는 커피점을 맡기면서 그의 경영자 인생이 시작된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위트와 밝은 성격에 아르바이트를 통해 배운 서비스 감각이 밑거름이 되어 거의 2년에 하나씩 점포를 늘려 나갔다. 꽤 많은 돈도 벌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했지만 가정사로 인해 한순간 모든 것을 잃었다. 집과 점포 5개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잃고 무일푼이 되었다. 호구지책으로 소지품, 액세서리까지 모두 긁어모아 33세에 다시 시작한 것이 바로 16.52㎡(5평)짜리 이자카야였다.

“무일푼이 되니까 마음이 더 가벼워지고 보이는 것도 더 많아지더라고요.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어요. 가게가 좁아 손님들의 입김이 거의 닿을 정도가 되다 보니 이름도 알고 손님끼리 끼어 앉으면 접촉도 하게 되고 모두 가족 같은 분위기였지요. 그때 이자카야의 묘미를 터득한 것 같아요.”

그의 나이 68세. 그에게 포부를 물었다. “지금처럼 그대로, 지금과 같은 속도와 강도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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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호 호세이대 겸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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