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윤치호 ⓒphoto 산처럼
노년의 윤치호 ⓒphoto 산처럼

그의 이름 앞에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다. 일본·중국·미국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개화·자강운동의 핵심 인물, YMCA 운동의 지도자,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의 고위 간부를 지낸 친일파의 대부….

그는 윤치호(1865~1945)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에게 윤치호는 ‘친일파의 대부’로 깊게 낙인찍혀 있다. 조선인으로 45년, 식민지 백성으로 35년을 살았던 윤치호. 그는 일제강점기 후반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지성이 왜 친일 노선을 선택했는가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고, 관심도 없었다. 도대체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고 있었을까.

학계에서 윤치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2001년. 역사비평사에서 ‘윤치호 일기-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를 출간하면서부터다. 편역자는 김상태.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한국인이 쓴 일기를 모아 책을 내며 편역이라고 했을까. 윤치호는 일기 대부분을 영어로 썼기 때문이다. 윤치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일기를 써왔다는 사실 앞에 연구자들은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사실상 평생을 일기를 써온 사람이다. 일기를 장기간 쓴다는 행위는 자기 절제를 해왔다는 방증이다. 윤치호는 처음에는 한문, 국한문, 영문 등을 혼용해 쓰다가 이후에는 영어로 썼다.

이번에 ‘산처럼’ 출판사에서 나온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는 2001년에 나온 ‘윤치호 일기’의 개정판이다. 모든 일기는 자기와의 대화이며 내면의 기록이다. 윤치호가 당대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일기는 사적인 기록이면서 동시에 역사에 대한 주관적 기록이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는 시간 순서대로 전개된다. 연도와 날짜를 따라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덧 타임머신을 타고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당대의 인물과 사건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다. 기자는 책을 넘기면서 그의 식견에 놀랐다. 우리가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라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갇혀 지성인 윤치호의 치열한 고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치호의 일기는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도 역사도 사라지고 만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먼저 19세기와 20세기를 살면서 만난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록을 보자. 먼저 난파 홍영후다.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홍난파 가옥이 있다. 당대 최고의 재력가 윤치호가 홍난파를 후원했다는 사실은 음악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진 사실. 그렇다면 윤치호는 이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1921년 2월 6일 일요일

윤치호 일기의 원보(原譜). 1940년 8월 10일 일기의 일부다. ⓒphoto 산처럼
윤치호 일기의 원보(原譜). 1940년 8월 10일 일기의 일부다. ⓒphoto 산처럼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1931년 4월 중순의 일기에서 윤치호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지역주의에 대한 언급하고 있다.

1931년 4월 17일 금요일

… 두 가지의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이조가, 다시 말해서 소수의 양반 가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고 백성의 호전성을 제거한 이조가 1905년에 사라졌다. 하지만 파벌의 전통과 편견과 정신은 지금도 예전 못지않게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안창호가 아끼는 서북파(평안·황해도 출신)가 기호파(서울·경기 출신)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와이나 미국, 시베리아나 중국 등 조선인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이 두 파벌은 도저히 용해될 수 없는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 서북파는 기본 방침으로 일본인을 몰아내기 전에 기호파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선언했단다.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온 기호인은 한결같이 두 진영 사이에 적대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점에서 서북파에 더 큰 잘못이 있는 것 같다. 모든 조선인이 폭풍우가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한 배를 타고 있는데, 안창호 같은 인사가 어떻게 이 하잘것없는 분파정신과 증오심을 고취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1935년 12월 일기에서는 여러 곳에서 최남선, 이광수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하는 사회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1935년 12월 9일 월요일

최남선군은 태양-태양신-숭배가 조선과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조선인의 영적 생활을 소생시키려면 불교나 유교가 아니라 조선의 건국신화에 귀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일본인 당국자들의 계획과 잘 맞아떨어진다.…

1935년 12월 12일 목요일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장로교 선교사와 군부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표를 내야 하는 총독부 당국자 간에, 신사참배 문제가 첨예한 쟁점이 되어가고 있다.

1935년 12월 27일 금요일

일본은 공식 발표도 하지 않은 채 조선인에 대한 이주제한법을 시행하고 있다. 조선인은 계층을 불문하고, 일본의 어느 지역을 방문하건 간에 여권을 지급받아야 한다. 한 도시를 방문할 수 있는 여권은 다른 도시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지난 봄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자 다소 친일적인 인물인 이광수군이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일본에 가려고 여권을 신청했다. 일본에 공부하러 간다는 이유로 그의 부인에게는 여권이 발급됐다. 그러나 이광수군과 그의 아들에게는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여권을 얻으려고 6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도 일본은 미국인을 비난하고 있다. 난 최근에 사가와씨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1937년 7월,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미국·영국과 갈등관계에 접어들었다. 1940년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체결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했다. 일본은 자국과 조선의 국가체제를 전시동원체제로 전환시켰다. 윤치호는 중일전쟁 이후 전개되는 동북아 정세와 유럽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1938년 3월 13일 일요일

신문 보도에 따르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될 거라고 한다. 히틀러가 빈에 갔고, 독일군이 이미 국경선을 넘었다고 한다. 이제 유럽 열강의 외교관들이 도장을 찍었던 역대 서류 중에서 가장 비열하고 비합리적인 베르사유조약의 마지막 장이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 당시 프랑스는 샤일록 역을, 미국은 윌슨을 통해 돈키호테 역을 맡았다. 또 영국은 프랑스를 편들면서 탐나는 것들을 모두 가로챘고, 윌슨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그를 국제연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평화기구의 아버지로 만들었다.…

1941년 12월 26일 금요일

오늘 조간신문이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최근 18일 동안 일본군의 맹공에 맞서 홍콩을 끈질기게 방어해왔던 영국군 사령관이 어제 오후 5시50분에 끝내 항복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동양에서 찾기 힘든 인종적 편견과 거만함을 지녀왔던 영국 제국주의의 최후 거점이 함락됐다. 난 이것이 영원하길 빈다. 일본은 동양에서 백인의 지배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모든 유색인종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인터뷰 | 편역자 김상태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어느 시기에 친일했느냐에 따라 평가 달라져야”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윤치호 일기’의 편역자인 김상태 교수의 연구실은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에 있다. 시계탑이 있는 105년 된 네오바로크식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단이 삐걱거렸다. 김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윤치호 일기와 마주한 것은 1993년 스물아홉 살 때였다. 석사과정 첫 학기 때 한국근대인물연구 프로젝트로 YMCA 핵심 인물 신흥우가 그에게 배당됐다.

“선배가 신흥우 연구를 위해 윤치호 일기를 읽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신흥우를 위해 찾아본 게 윤치호 일기였다. 당시 나는 친일파 윤치호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 영어로 된 일기를 해독해가면서 나의 고정관념이 하나씩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 고정관념이 깨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윤치호 일기는 그동안 식민지시대를 보는 내 생각이 얼마나 얄팍했었는지를 깨닫게 했다. 이후 역사를 전공하면서 윤치호는 나의 멘토와 같은 역할을 했다.”

- 윤치호 일기 11권을 해독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지 않았나. “친일파를 스펙트럼으로 봐야 한다. 이완용 같은 친일파도 있고,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조금 친일한 사람도 있다. 또 어느 시기에 친일을 했느냐, 친일하게 된 연령대가 언제냐를 고려해야 한다.”

-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한 경우는 대부분 생존을 위해서라고 얘기를 하는데. “1890년대냐, 1920년대냐, 1930년대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친일을 한 경우도 또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윤치호 일기를 보면서 윤치호의 경우는 자발적인 게 50%, 생존을 위한 게 50% 정도로 판단했다. 이런 경우가 많았을 거로 본다.”

- 역자 서문에서 윤치호의 영어가 고급이었다고 했는데. “윤치호가 구사한 영어가 어려워서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보여줬고, 미국 사람에게도 보여줘 봤다. 미국인은 윤치호의 문장, 문법, 어휘 등으로 볼 때 중상위층이 구사하는 영어 수준이라고 했다. 윤치호는 비유에 탁월했다. 대부분은 성경 구절을 적절하게 인용하는 비유였다. 솔직히 말하면 어려워서 해석이 안 되는 것도 꽤 있었다.”

김 교수에게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윤치호 일기 11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복사본을 보여주면서 “이것은 윤치호의 육필 일기를 탈초한 것”이라고 했다. 필기체로 쓰여진 영어 일기를 인쇄체로 바꿔놓은 것이라고 했다.

- 윤치호 일기를 보면서 여러 번 그의 식견과 통찰에 놀랐다. “그렇다. 윤치호는 당대를 가장 정확히 분석하면서 미래까지 내다보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 상해 유학 생활에서 무너져가는 중국 문명을 목격했고 물밀듯 들어오는 서양문명을 실감했다. 또 미국 유학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속성을 들여다봤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실상도 파악했다. 중국·일본·미국 유학 10년 세월 동안 보고 느낀 게 일기에 압축적으로 드러난다고 보면 된다. 이승만에 버금가는 인물이다.”

- 책 제목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는 무슨 뜻인가. “윤치호가 일기에 가끔 적었던 말이다. 이 말은 그의 인생관과 처세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그가 조선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조선인이 독립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때까지는 정치적·군사적 독립투쟁을 자제하고 경제적·문화적·도덕적 실력 양성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저한 신념이었다.”

키워드

#화제의 책
조성관 편집위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