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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와 중국] 중국 특사는 왜 박근혜 만나 펑유란을 말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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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241호] 201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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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중국]중국 특사는 왜 박근혜 만나 펑유란을 말했나?

이동훈  기자 

▲ 펑유란의 청년 시절과 노년 시절(오른쪽) 모습. 말년에 시력을 거의 상실해 두꺼운 안경을 꼈다.
“펑유란(馮友蘭)이 제 스승입니다.” 중국 특사로 방한한 장즈쥔(張志軍) 중국 외교부 부부장(차관)이 지난 1월 10일 박근혜 당선인을 만나 중국의 철학자 이름을 거론했다. 장즈쥔은 시진핑(習近平) 정권의 차기 외교부장(장관)으로 거명되는 외교관.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 미국·대양주·북유럽 국장,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거쳐 2009년부터 외교부 부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 부부장이 대뜸 중국 철학자의 이름을 꺼낸 데는 사정이 있었다. 박 당선인은 17대 국회의원이던 2007년 3월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내 삶을 바꾼 책’이란 글에서 펑유란을 얘기했다. 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전 대표’ 직함으로 쓴 글은 다음과 같다.
   
   “20대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이 몰려왔다. 부모님 모두를 총탄에 보내야 했던 충격에다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온갖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가족끼리 손을 잡고 나들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런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내가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그 힘은 수많은 철학서적을 읽고, 사색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바로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다.”
   
   박 당선인은 “오랜 세월 묻혀 있었던 동양정신의 유산을, 빛나는 보석으로 닦아내서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가는 가르침을 주는 펑유란 선생의 ‘중국철학사’ 일독을 권하고 싶다”고 격찬했다. 펑유란(1895~1990)의 ‘중국철학사’ 완역본은 국내에서는 까치글방이 1999년에 상하 2권으로 펴낸 게 있다.
   
   박 당선인이 ‘펑유란’을 언급한 일화는 중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에서 ‘펑유란’을 키워드로 치면 박 당선인의 사진이 나올 정도다. 38년 경력의 베테랑 외교관인 장즈쥔 부부장이 박 당선인과의 첫 만남에서 ‘펑유란’을 화제로 삼은 것은 일종의 ‘윤활유’였던 셈이다.
   
   
   장제스의 ‘공자 띄우기’에 이용
   
펑유란은 중국 근대철학계의 거목이다. 저서 ‘중국철학사’를 통해 5000년 중국 철학의 흐름을 집대성한 거목으로 ‘20세기의 공자’란 평까지 듣는다. 특히 펑유란의 대표작인 ‘중국철학사’(1934년)는 중국인이 쓴 중국 철학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로, 영문으로 번역돼 구미 각국에 중국 철학의 존재를 알렸다.
   
   펑유란은 청(淸)나라 말엽인 1895년 허난성 탕허현(唐河縣)에서 지방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베이징대 법학과에 입학한 뒤 문과로 전과해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중주대(中州大·허난대의 전신), 중산대, 옌징대(베이징대에 합병), 청화대, 서남연합대를 거쳐 평생을 베이징대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베이징대를 나온 장즈쥔 부부장이 “펑유란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박 당선인에게 밝힌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펑유란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1919년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다. 펑유란은 미국에 건너가 컬럼비아대 대학원에 입학해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교육가인 존 듀이를 지도교수로 두고 철학을 공부했다. 중국에 관심이 많던 존 듀이는 베이징대 총장을 지낸 후스(胡適) 등 중국 유학생들을 제자로 많이 거두었다.
   
   이후 펑유란은 중국으로 돌아와 옌징대와 청화대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영어를 구사하는 고급 교원들이 극히 귀하던 때였다. 특히 청화대 철학과 교수 때인 1934년에 펴낸 ‘중국철학사’ 상하 2권은 학계에서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렸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통해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주자)의 주자학(성리학)을 계승해 이기론(理氣論)에 기반한 신리학(新理學)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통치이념으로서 유학에 주목한 장제스(蔣介石)의 집권 시절에 펑유란은 유명세를 날렸다. 장제스는 북벌전쟁으로 중국을 통일한 직후 공자(孔子)와 유학을 떠받드는 ‘신생활운동’을 벌여 취약한 통치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위계질서에 기반한 ‘충효인의예지신’ 등 유학의 전통 덕목을 강조했다.
   
   자연히 유학에 조예가 깊던 펑유란은 장제스의 통치기반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 장제스 정권의 ‘돈줄’을 틀어쥔 쿵샹시(孔祥熙)의 후원으로 학술대회에서 1등을 했고 당시 돈으로 1만위안이란 거금도 받았다. 중국은행 총재와 국민당 행정원장 겸 재정부장을 지낸 쿵샹시는 쑨원과 장제스의 동서로, 쿵샹시의 부인 쑹아이링(宋靄齡)이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과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의 언니였다. 특히 쿵샹시는 공자의 75대손으로 유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펑유란에게 “공교회(孔敎會)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이에 펑유란은 국민당에 가입하고 1935년에는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전국대표로도 선출됐다.
   
   펑유란의 행보는 장제스의 중화민국 시절에 함께 청화대와 서남연합대 교수를 지낸 원이둬(聞一多) 같은 동료 교수들과 대비됐다. 청화대 문학과 교수를 지낸 원이둬는 대표적인 현실참여형 교수였다. 펑유란의 친구기도 한 원이둬는 국공내전 당시 미국에서 연구교수 제의가 들어왔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조국에 남아서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때 전향
   
   당시 같이 미국 측의 제안을 받은 펑유란은 단번에 수락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방문교수로 떠났다. 반면 원이둬는 공개석상에서 장제스를 향해 공개적으로 욕설을 퍼붓다가 1946년 쿤밍에서 머리에 국민당 특무의 총을 맞고 백주대로에서 살해당한다. 저명 반체제 교수인 원이둬에 대한 사실상의 공개처형은 지식인 계층의 민심이반을 불러왔고 이는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에 패배하는 원인(遠因)이 됐다.
   
   펑유란은 1949년 국공내전에 패한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망가면서 “함께 가자”는 요청을 했지만 이를 뿌리친다. 당시 국민당은 국공내전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펑유란을 비롯한 저명 학자들을 전용기에 태워 모두 대만으로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펑유란은 대륙에 남는 길을 택한다.
   
   대신 펑유란은 “과거 봉건철학을 강의하면서 국민당을 위해 봉사했다”며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해 5년 안에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중국철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다. 마오쩌둥 역시 이를 받아들여 펑유란은 곧장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로 복귀했다. 공산당의 승리 직후 중국 전역에 있는 철학과가 모조리 통폐합되고 베이징대 한곳에만 학과가 설치됐을 때다.
   
   이후 펑유란은 국공내전 때 자신이 정립한 공자와 유교에 관한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사상에 맞게 뜯어고치는 작업에 나선다. 마오쩌둥 역시 1957년 펑유란을 중남해(中南海)로 불러 친견하며 적지 않은 관심을 표명했다. 펑유란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때는 교수직을 사실상 박탈당하고 노동개조형을 받는 부침을 겪는다. 린뱌오(林彪)와 공자(孔子)를 겨냥한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한창일 때 펑유란은 심지어 공자를 비판하는 대열에도 가담했다. 또한 문화대혁명으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이 4인방을 결성해 득세하자 장칭을 중국 최초 여황제인 ‘무측천(측천무후)’에 비유한 시도 지어 바쳤다. 반면 4인방이 몰락하자 펑유란은 다시 마오쩌둥의 과오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표변 덕에 펑유란은 중국 근대 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학자가 됐다. ‘어용 철학자’ ‘폴리페서’라는 비판이다. 그의 막내딸 펑종푸(馮宗璞)는 이런 비판에 대해 “고난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잠시만이라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며 “아버지는 ‘중국철학사 신편’을 쓸 시간이 필요했다”고 항변했다. 또 장칭을 찬양한 데 대해서는 “장칭 문제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몇 개의 시 구절을 곡해하여 억지로 뒤집어씌운 것으로 이런 수법이 바로 문자옥(文字獄·필화사건)”이라고 했다.
   
   1977년 펑유란의 ‘중국철학사 간사(簡史)’를 번역하며 펑유란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 정인재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중국철학)는 주간조선에 “펑유란은 대만이나 미국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철학은 자기 고장을 떠나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대륙에 남았다”면서 “비림비공운동 때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 일관되게 유교적 입장을 고수했다”고 말했다.
   
   
   임종 전 구술한 ‘중국철학사 신편’
   
▲ 중국 정부 특사로 방한한 장즈쥔 외교부 부부장(왼쪽)이 박근혜 당선인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1980년 덩샤오핑 집권기 펑유란은 베이징대학 구내에 있는 삼송당(三松堂)에 머물며 ‘중국철학사 신편’을 쓰는 데 몰두했다. 앞뜰에 소나무 세 그루가 심어진 삼송당은 펑유란이 머문 교내 사택이자 그의 별호다. 병상과 휠체어에서 그가 구술하면 막내딸 펑종푸가 받아썼다. 10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1989년 ‘중국철학사 신편’ 7권을 모두 완성했다.
   
   150만자에 달하는 분량의 ‘중국철학사 신편’은 펑유란 필생의 역작이다. 84세에 집필을 시작해 시력과 청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서 구술로만 썼다. ‘기적’이라는 얘기도 듣는다. ‘중국철학사 신편’을 일일이 받아적은 막내딸 펑종푸는 ‘나의 아버지 펑유란’이란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의 10년을 ‘중국철학사 신편’ 7권과 바꾸셨다”고 했다. 반면 마지막 7권에는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한동안 중국 대륙에서 출판이 안 됐다. 이에 7권은 대만과 홍콩에서 ‘중국 현대철학사’란 이름으로 먼저 소개됐다.
   
   펑유란은 1990년 95세를 일기로 베이징의 우의(友誼)의원에서 작고했다. 그가 재직한 베이징대, 청화대와 멀지 않은 베이징 만안(萬安)공원묘지에 화장 후 묻혔다. 펑종푸에 따르면 펑유란은 임종 전 “나는 살면서 내가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펑유란의 철학과 생애는 그의 막내딸이자 소설가인 펑종푸가 쓴 ‘나의 아버지 펑유란’(글항아리),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같은 책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됐다.
   
   박근혜 당선인은 2007년 기고를 통해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펑유란 선생의 ‘중국철학사’ 역시 자신을 바로 세우고 바르게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와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와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중국철학사를 읽으면서도 깊이 공감이 가고 깨달음을 준 글귀들을 한 자 한 자 노트에 메모를 하면서 함축된 언어와 행간에 숨겨진 진리를 마음에 새겼다”고 말했다. 정인재 서강대 명예교수는 “1930년대에 쓴 중국철학사 구편이 신실재론(네오리얼리즘)적 입장에서 썼다면 1980년대에 신편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쓴 것”이라며 “요즘은 대만이나 홍콩보다 제자들을 더 많이 키워낸 대륙에서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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