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과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접경지대 ‘나른’의 한 유적. 차사국(車師國) 본영이 있던 곳이다. ⓒphoto 지배선
키르기스스탄과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접경지대 ‘나른’의 한 유적. 차사국(車師國) 본영이 있던 곳이다. ⓒphoto 지배선

기원후 1세기경 고구려 유리왕의 군대가 중앙아시아 차사국(車師國·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인근)에 진출했으며 병사들은 결국 귀환하지 못한 채 그 지역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지배선 연세대 명예교수(65·사학)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책부원구(冊府元龜), 자치통감(資治通鑑) 사료를 통해 이같은 사실(史實)을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지 교수의 주장이 담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사’ 논문은 1월 말 발간되는 ‘한민족 연구(韓民族 硏究) 12집’에 게재될 예정이다. 고구려계로는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 유민 출신인 당(唐)의 장수 고선지(高仙芝· ?~755)가 당의 병력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를 원정한 바 있다.

“중국 신나라가 파병 요청”

지 교수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우선 제시한 것은 “중국 신(新)나라가 AD 12년(유리왕 31년) 고구려에 파병을 요청했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1년조의 기록이다. 신(新)은 유방이 세운 전한과 후한 사이인 기원후 9~23년에 있었던, 왕망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본기 제1, 135쪽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유리왕(琉璃明王) 31년 신(新)의 왕망(王莽)이 흉노(차사국·車師國)를 정벌하려 고구려 병사를 징발했다. 그러나 징발된 고구려 군사가 흉노를 공격하러 가려 하지 않았다. 왕망은 강제로 고구려 군사를 보내려 했다. 그러자 고구려 군사들이 반발해 도리어 신(新)의 군현(郡縣)을 침략하고 도망쳤다. 왕망은 요서(遼西) 대윤(大尹·관직 이름) 전담(田譚)을 시켜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게 했다. 그러나 전담은 추격 중에 사망했다. 신(新)의 군현(州郡)에서는 그 허물을 고구려에 돌렸으나 엄우(嚴尤·왕망의 군사참모)가 왕망에게 아뢰길 ‘고구려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이를 위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지금 너무 큰 벌을 내리면 (고구려가) 끝내 배반할까 두렵다’고 했다. 엄우는 왕망에게 ‘부여(扶餘)의 족속 중에서도 반드시 이에 동조하고 나서는 자가 있을 것’이라며 ‘흉노를 극복하지 못한 이때, 부여(扶餘)와 예맥(濊貊)이 또다시 들고일어난다면 이는 큰 우환거리가 된다’고 아뢰었다. 그런데도 왕망은 이를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령하여 고구려 군사를 치게 했다. 그 결과 엄우는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해 살해한 뒤 목을 베어 이를 전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유리왕 31년에 고구려 임금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해 모두 알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新)의 변방을 침구함이 더욱 심하였다.”

지 교수는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라고 말했다. 하나는 신(新)이 자력으로 흉노(차사·車師)를 제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흉노 정벌 계획을 세울 때 강력한 고구려의 군사력을 빌렸다는 점은 신(新)이 독자적으로 흉노를 제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기마민족 흉노는 너무나 강력했기에 고구려가 파병한 군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때문에 파병군이 작전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며 “이는 유리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파병된 군사들이 다시 귀환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다른 한 가지는 파병된 고구려 병사들의 이후 행적이다. 지 교수는 “고구려군이 흉노를 공격하지 않자, 신(新)의 장수 전담(田譚)이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다 전사했다는 사실(史實)은 전담의 군사보다 고구려 군사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했다.

유리왕의 파병 기록은 ‘고구려의 후예들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했을 것’이란 가설로 이어진다. 지 교수는 “서역(西域) 차사국(車師國) 사람의 얼굴 모습이 고구려인과 같으며, 등까지 변발(辮髮)을 늘어뜨렸고, 여자 머리털은 땋아서 길게 늘어뜨렸다(其人面貌類高麗, 辮髮施之於背, 女子頭髮辮而垂)”는 통전(通典) 차사전(車師傳)조 5204쪽의 기록에 주목했다. 그는 “차사국 사람들의 얼굴 모습만 고구려인과 같다는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인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면서도 “단지 고구려인과 유사하다는 뜻으로 쓴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이 기록에 대해 “고구려인의 얼굴 모습과 아울러 머리 모양까지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당시 고구려 병사들이 삼국 최초의 집단 유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왕망의 부하, 엄우가 유인하여 죽인 인물이 구려후추(句麗侯騶)였다”고 적은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高句驪傳)의 기록에 주목했다. 이는 왕망이 ‘후(候)’로 칭한 고구려의 인물(句麗侯)이 유리왕이 아니라 추(騶)라는 사람이란 의미로 “왕망이 고구려 임금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칭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다른 것이다. ‘하구려’는 고구려를 얕잡아 낮춰 쓴 표현이다. 여기서 ‘신나라 왕망이 제후(侯)로 칭한 고구려후추(高句驪侯騶)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부각된다.

고구려의 제후 ‘추’는 누구인가

지 교수는 “한서(漢書) 권(卷) 96, 왕망전(王莽傳)에 명확히 나와 있다”고 했다. 한서와 후한서 모두에 고구려후추(高句驪侯騶)가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라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연비는 왕망의 부하 엄우에게 유인돼 살해된 뒤 목이 잘린 고구려 장수다. 이 기록은 연비가 고구려 유리왕 휘하에서도 후작(侯爵·제후에 버금가는 자리)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史實)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자 중 일부는 ‘고구려후추’를 유리왕으로 보고 있다”며 “그러나 고구려후추가 유리왕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인물은 고구려 유리왕 휘하에서 후작의 지위를 얻은 인물”이라며 “고구려후추를 유리왕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것은 중국인들의 역사관과 궤를 같이하는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사기는 유리왕본기 31년조에서 “왕망이 기뻐하며 고구려 임금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칭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같은 책 유리왕본기 37년조 136쪽에는 “고구려 유리왕은 구려후추(句麗侯騶)가 엄우(嚴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7년이 경과하여 죽었다”고 돼 있다. 지 교수는 “유학자인 김부식이 12세기에 삼국사기를 쓰면서 고구려와 관련된 부분을 애매모호하게 신화(神話)처럼 기술해 혼란이 벌어진 것”이라며 “유리왕과 고구려후추는 동일인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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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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