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봐’를 만든 노르웨이 작곡가들과 소녀시대. ⓒphoto 조선일보 DB
‘소원을 말해봐’를 만든 노르웨이 작곡가들과 소녀시대. ⓒphoto 조선일보 DB

가수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2009년)와 ‘아이 갓 어 보이’(2013년), F(X)의 ‘Chu’(2009년), 동방신기의 ‘주문’(2008년), 지드래곤의 ‘하트브레이커’(2009년)는 K팝 한류 열풍을 선도해온 곡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북유럽의 작곡가들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소녀시대의 ‘아이 갓 어 보이’는 프로듀서 펠레 리델이 이끄는 스웨덴 작곡가 팀 ‘케넬’과 유영진 작곡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소원을 말해봐’의 경우 노르웨이의 ‘디사인 뮤직’ 팀과 스웨덴의 케넬 팀이 만들었다. 이밖에도 보아의 첫 미국 진출 싱글인 ‘Eat You Up’(2009년)은 덴마크 작곡가 토머스 트롤센이 작곡했다.

이제 K팝 음반의 부클릿(booklet)에서 외국 작곡가의 이름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작곡가보다 외국 작곡가의 이름이 훨씬 많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국이나 미국의 작곡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작곡가가 대거 포진해 있다.

최근 YG(대표 양현석)는 ‘윌.아이.앰’과의 협업 계획을 밝혔고, SM(대표 이수만)의 소녀시대는 이미 ‘더 보이즈’에서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의 곡을 불렀다. 모두 미국 출신의 유명 프로듀서로, 이들이 K팝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많은 화제를 모았다. 반면 북유럽 작곡가들은 물밑에서 조용히 K팝 시장을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 의해 많은 K팝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돌이켜보면 북유럽은 대중음악사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역 중 하나다. 1970년대 전 세계적 인기를 누렸던 ‘아바’가 스웨덴 출신이고, 미국 빌보드차트 10위권에 오르기도 했던 덴마크 그룹 ‘아쿠아’도 있다. 스웨덴 출신의 기타리스트 ‘잉베이 맘스틴’이나 밴드 ‘켄트’는 록음악이 영어권 국가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입증했다. 그리고 이러한 스타급 아티스트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북유럽의 ‘문화 파워’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미국을 움직이는 북유럽의 문화 파워

미국은 전 세계 대중음악의 헤게모니를 움켜쥔 대중음악 종주국이다. 미국의 거대한 음악 시장에 외국인, 특히 비영어권 외국인이나 동양인이 끼어들기란 쉽지 않다. 대중음악 시장 규모로 미국 다음인 일본 또한 부단히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렸지만 대부분 빌보드차트 50위를 넘지 못했다. 같은 영어 문화권인 데다 미국만큼이나 대중음악이 발달한 영국의 가수 또한 미국에서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북유럽은 다르다. 북유럽의 프로듀서들은 가수 뒤에서 조용히 미국의 대중음악을 움직이고 있다. 스웨덴 출신의 프로듀서 맥스 마틴이 대표적이다. 그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엔싱크, 백스트리트 보이즈 등 미국의 유명 아이돌 가수들을 키워낸 대표적인 프로듀서다. 맥스 마틴은 오늘날 K팝 아이돌 시장에도 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아이돌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맥스 마틴은 주춤하는 듯했지만 테일러 스위프트와 켈리 클락슨, 레이디 가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케이티 페리, 마룬5 등의 곡을 쓰면서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다. 모두 오늘날의 미국을 대표하는 가수들이다. 맥스 마틴은 셀린 디온이나 에이브릴 라빈 같은 캐나다 가수들의 곡도 썼다. 많은 한국인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음악을 들으며 온전한 미국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스웨덴 사람이 기획하고 작곡한 음악인 셈이다. 심지어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자신의 데뷔앨범을 스웨덴에서 녹음했다.

2011년 6월 1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SM 타운 콘서트. ⓒphoto 조선일보 DB
2011년 6월 1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SM 타운 콘서트. ⓒphoto 조선일보 DB

아바의 나라, 스웨덴의 힘

맥스 마틴만이 아니다. 노르웨이의 도시 트론헤임에서 결성된 작곡 팀 ‘스타게이트’는 리한나, 머라이어 캐리, 비욘세 등의 히트곡을 썼다. 이 팀은 1999년부터 지금까지 UK차트(영국)나 빌보드차트에서 총 38개 곡을 10위 안에 올렸다.

미국의 대중음악 포럼 ‘ASTR’에 게시된 미국 네티즌들의 의견에 따르면, 북유럽 작곡가들의 인기 요인은 ‘탁월한 대중적 감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덕분에 북유럽 프로듀서들은 미국의 상업음악 시장을 파고들 수 있었다. 또 영어공용화 덕분에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것도 타 국가에 비해 유리하게 작용했다.

특히 ‘아바’의 나라 스웨덴은 북유럽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음악 강국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해욱 연구원이 펴낸 ‘스웨덴으로부터 배우는 대중음악 산업의 교훈’에 따르면 스웨덴은 미국, 영국에 이은 3대 대중음악 수출국이다. 이 연구원은 그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소규모 스튜디오가 주체가 되는 창작 시스템’이다. 대형기획사가 주도하는 우리나라의 시스템과는 차이가 있다. 둘째로는 저작권 보호 조치 강화를 통해 음악가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운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교육이다. 스웨덴은 예술 교육 가운데서 음악 교육의 비중이 가장 높다.

한국으로 K팝 수출

K팝 열풍은 북유럽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는 현상이다. 미국, 영국에 이어 한국이 북유럽 음악을 판매하는 새로운 마켓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표>를 보면 특히 SM의 경우 대부분의 히트곡들이 북유럽 작곡가의 손을 거친 것으로 나온다. 외국에서 발표하거나 수출을 염두에 둔 곡일수록 더더욱 북유럽 작곡가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힙합 장르에 있어서만큼은 별다른 성과가 없는 북유럽의 작곡가들과, 힙합 레이블 YG가 협업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북유럽 작곡가들과 K팝 제작자들 간의 네트워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에 작년 12월에는 스웨덴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KOBRA’에서 K팝을 다루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펠레 리델’이 이끄는 SM의 스웨덴 작곡팀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독특한 점은 안무가 모든 창작 활동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서울의 SM 본사에서 안무와 관련한 의견을 내면, 스웨덴 작곡팀은 안무에 맞게 곡을 쓰는 방식이다. 특히 SM 음악에서 자주 발견되는 ‘멤버들 간의 합창’은 이들 스웨덴 작곡팀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북유럽에서 만들어지는 만큼 K팝에는 유럽의 정서가 강하게 녹아 있다. 트위터에서도 이와 같은 반응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멕시코의 트위터리언 ‘Angela_0804’는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의 음악과 지금 활동 중인 샤이니의 음악이 비슷하게 들린다”고 말했다.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웨덴의 댄스음악 트리오다. 또 K팝의 팬으로 보이는 미국의 트위터리언 ‘Mary_KPOP’은 “강남스타일도 유럽에서 만들었나? 유럽 음악에 가까운 샤이니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고 묻는 다른 트위터리언의 질문에, “강남스타일은 유럽 작품이 아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스웨덴의 맥스 마틴이 미국의 상업 음악계를 휩쓰는 와중에도, 미국은 미국만의 독자적인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국 정신을 대표하는 ‘컨트리’ 장르는 언제나 폭발적 인기를 누렸고, 미국 록을 대표하는 ‘너바나’의 후예들은 꾸준히 등장해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을 노래하고,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같은 미국의 전설적 가수들에 대한 추억을 노래한다. 컨트리 음악에 사용되고 있는 악기 ‘피들’의 고즈넉한 소리는 미국 남부의 평화로운 대농장의 정취를 전 세계에 전한다. 그래서 미국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미국의 지역 문화나 미국 정신을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하지만 K팝에는 한국적 정서가 거의 없다. 지난 1월 발표한 소녀시대의 ‘아이 갓 어 보이’는 ‘소녀들의 수다’가 콘셉트다. 하지만 가사의 느낌은 한국의 소녀라기보다는 미국 디즈니의 하이틴 시트콤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다스러운 여고생들에 훨씬 더 가깝다. 뮤직비디오의 연출도 미국색이 짙다. 사운드는 북유럽 스타일, 가사와 뮤직비디오는 미국 스타일인 셈이다. 한국의 걸그룹 시대를 열었던 원더걸스의 ‘노바디’는 1960년대 미국의 걸그룹을 복각하는 데에 주력했다. K팝의 첫 시작부터 한국적인 것은 철저히 배제된 셈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K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 강남스타일은 한국만이 할 수 있는 콘텐츠였기 때문에 성공했다. 강남스타일이 표방한 ‘B급 정서’는 한국의 음악뿐만 아니라 코미디·영화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한국만의 정서다. 배 나온 아저씨 같은 푸근한 외모마저 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성을 가졌고, 강남이라는 한국만의 지역적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다. 소녀시대의 ‘아이 갓 어 보이’가 한국을 잘 몰라도 즐길 수 있는 노래라면, ‘강남스타일’은 한국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노래다. 미국의 CNN에서 강남스타일 열풍 당시 서울 강남을 직접 취재하여 방송하기도 한 배경이다.

싸이는 과거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자신의 음악 철학을 밝혔다. 이 인터뷰 장면은 ‘강남스타일’의 성공과 함께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이제 음악을 수입하는 데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 정서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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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심하늘 인턴기자·고려대 서어서문학과 4년 ‘대중문화의 들’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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