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신임 국가주석과 국무원 총리로 선출된 시진핑과 리커창(오른쪽). ⓒphoto AP·뉴시스
중국의 신임 국가주석과 국무원 총리로 선출된 시진핑과 리커창(오른쪽). ⓒphoto AP·뉴시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국무원 총리가 연단 아래로 내려와 허리를 45도로 숙였다. 지난 3월 5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2900여명의 전국인민대표들을 향해 지난 10년의 업적을 결산하는 무려 100분간의 정부업무보고 연설을 끝낸 직후였다.

71세의 총리가 같은 자리에 서서 연이어 세 차례 허리를 숙이자 인민대회당의 박수 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대개 인사는 한 번 하기 마련인데 분명 이례적이었다. 중국의 연중 최대 정치이벤트인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지난 3월 3일 개막부터 생중계한 중국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은 “박수 소리가 점점 더 열렬해졌고 앞의 박수에 비해서 훨씬 정감과 인정미를 더했다. 수년 뒤에도 우리는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총평했다.

다음 날 중국과 홍콩 언론은 ‘총리의 삼국궁(三鞠躬·세 번 허리 숙인 인사)’을 다룬 기사들로 가득 찼다. 이날 삼국궁으로 지난해 11월 미국 뉴욕타임스가 원자바오 일가의 재산 의혹을 폭로한 뒤 불거진 정치적 위기는 쏙 들어갔다. 대신 지난 10년간 원예예(溫爺爺·원 할아버지)의 족적을 다룬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을 도배했다.

원자바오는 딱 1년 전인 지난해 3월 전인대에서도 최고 스타였다. 지난해 최대 정치적 이변이었던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시 공안국장의 미국 영사관 망명시도 직후,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서기가 전인대 내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해 건재를 과시했을 때다. 보시라이의 기자회견 직후 원자바오는 “충칭은 반성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고, 보시라이는 현재 행방조차 묘연하다. 이때 원자바오를 두고 “중앙의 재상(원자바오)이 오만방자한 지방 제후(보시라이) 정도는 날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처럼 중국에서 총리가 차지하는 위상은 한국의 총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국무원 총리는 명실상부한 행정부 수반이다. 대통령 한 명이 국가원수와 행정부 수반을 겸하는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 국가원수 역은 당총서기가 겸하는 국가주석이, 행정부 수반 역은 국무원 총리가 맡아 역할을 나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책임총리제’를 구현하고 있다.

일반 국민과 함께 부대낀다는 점에서는 총리의 역할이 국가주석보다 오히려 크다. 2008년 5월 쓰촨성 원촨(汶川)대지진 때나 2011년 7월 저장성 원저우(溫州) 고속철 사고 같은 초대형 재난 현장에 먼저 달려간 것은 총서기 후진타오가 아니라 총리를 맡고 있던 원자바오였다.

지난 3월 1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는 또 한 명의 막강한 책임총리가 탄생했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호흡을 맞출 리커창(李克强) 신임 총리다. 리커창은 총리 선출과 함께 3월 17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중국의 안살림을 도맡게 된다. 앞서 지난 3월 5일 리커창은 마지막 정부 업무보고를 끝내고 자리로 들어온 원자바오와 굳게 악수를 나눠 총리직 인수인계가 시작됐음을 드러냈다.

중국의 현행 1982년 수정헌법(82헌법)에 따르면 행정부 수반인 총리는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국가주석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거쳐 임명한다. 전인대의 결의를 통해 국가주석이 임면권을 행사하는 구조다. 1993년 이후 당총서기가 겸임하는 국가주석은 전인대 결의 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총리를 임명하고 파면할 수 없다. 82헌법은 “총리의 임기는 연속해 2계(屆)를 초과하지 못한다”고 하여 임기도 규정하고 있다. 1계는 5년 단위로 이뤄지는데, 대과(大過)가 없으면 10년간 총리의 임기를 보장해 업무 연속성을 보장하는 셈이다.

총리와 공산당 총서기는 역할도 정무(政務)와 당무(黨務)로 철저히 분담한다. 중남해(中南海)의 업무공간도 총리는 중해, 총서기는 남해 쪽으로 분리돼 있다. 각종 공식행사 때 착용하는 복장도 다르다.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당지휘창(黨指揮槍) 방침에 따라 무(武)를 대표하는 총서기는 인민복을 착용해도 문(文)을 상징하는 총리는 양복 정장을 고수한다.

또 총리는 국무원 부총리를 비롯 국무위원, 각부 부장(장관급), 각급 위원회 주임(장관급), 인민은행장(중앙은행장에 해당), 심계서 심계장(감사원장에 해당), 국무원 비서장(국무총리실장에 해당) 등 국무원 요직에 대한 임면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형식적인 인사제청권만 가지고 있는 우리 총리와는 권한 자체가 다르다. 이에 중국의 국무원 총리는 해외순방 시에도 의전상 국가원수급 대접을 받는다. 연례적으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의에 한국이 대통령, 일본이 내각 총리를 내보내는 데 반해 중국은 총리를 대표로 내보내는 것이 한 예다.

중국에서 책임총리제가 가능한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중국의 역대 황제는 주로 무장 군벌이 차지했다. 무인 출신 황제들은 대개 집권 후 문인 관료들의 보좌를 필요로 했다. 이에 중국의 내치(內治)는 대개 ‘승상(丞相)’이란 관직에 있는 고관들이 사실상 전담했다. ‘승상’은 중국의 영어사전에서 ‘총리(prime minister)’로 번역된다. 이 같은 전통은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승상제’를 폐지하고 황제의 직할통치제를 확립한 후에도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총리 제도는 수보(首輔) 등과 같은 관직을 통해 이름만 바꿔 계속 이어졌다.

만주족의 청(淸)나라가 집권한 후에도 이 같은 전통이 이어졌다. 30만명으로 1억5000만명의 한족을 지배한 만주족은 무력(팔기군)을 장악한 소수의 만주족과 다수의 한족을 동시 기용해 국정을 공동 분담하는 ‘만한병용(滿漢倂用)’ 제도를 채택했다. 지금으로 치면 리홍장(李鴻章),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표적 한족 총리였다. ‘만한병용’은 지금도 무력(해방군)을 장악한 8000만 공산당원이 13억 국민을 이끄는 ‘이당영정(以黨領政)’ 시스템으로 변용됐다고 얘기된다. 총리는 13억 국민을 다스리는 실질적 책임자다.

중국에서 책임총리제가 가능한 것은 약화된 당총서기의 위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이는 1982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당주석’직의 폐지와 함께 가능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약칭인 ‘당총서기’란 직책은 사실 서열 1위가 아니었다. ‘당총서기’는 원래 ‘당주석’ 아래에 있는 보직에 불과했다. 일례로 덩샤오핑(鄧小平)은 1956년부터 1966년까지 10년간 당총서기를 지냈다. 하지만 당주석인 마오쩌둥보다 서열상 몇 계단 아래에 불과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의 약칭인 ‘당주석’은 당의 최고책임자였다. 중앙정치국 회의를 소집할 권한과 정치국 회의에서 의견이 부딪칠 때 최종결정할 권한이 있다. 1978년 집권한 덩샤오핑은 ‘당주석’ 자리를 없애버렸다. ‘무법무천(無法無天·법도 없고 하늘도 없다)’이란 말로 상징된 마오쩌둥 같은 당주석의 1인 독재로 초래된 문화대혁명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한 덩샤오핑은 자신의 최측근 심복인 후야오방(胡耀邦)이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당주석’ 자리에 앉아 있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기술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 당주석 폐지 후 총서기를 지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趙紫陽)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란 기형적 회의체를 통해 참석권이 없는 덩샤오핑의 말을 들었다. 정치국회의에 ‘확대’란 말을 붙인 것도 덩의 참석을 위한 기술적 방편이었다.

실제 후야오방 전 총서기는 1987년 학생시위로 총서기직에서 경질됐고, 자오쯔양 전 총서기는 1989년 천안문사태 때 경질된 뒤 가택연금됐다. 총서기의 위상이 약화되면서 그만큼 총리의 활동 공간은 늘어났다. 또 정치적 격변 때마다 총리는 총서기의 견제구로 기능했다. 화궈펑(華國鋒)의 후임인 자오쯔양 전 총리는 낙마한 후야오방 전 총서기를 대신했고, 리펑(李鵬) 전 총리는 자오쯔양 전 총서기를 주도적으로 낙마시켰다.

심지어 총리의 힘이 간혹 총서기를 넘어서는 경우가 상징적으로 드러난 적도 있다. 1989년 천안문사태 와중에 리펑 당시 총리가 자오쯔양 총서기보다 앞서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각종 행사나 사진촬영 때 총리가 총서기를 절대 앞서 걸어가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다. 리펑이 앞서서 걸어가더니 결국 자오쯔양은 경질됐다.

리펑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의 양자로 종종 총리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단행해 총서기와 마찰을 빚었다. 약한 총서기(자오쯔양)와 강한 총리(리펑) 간의 알력다툼은 1989년 천안문 유혈사태로까지 폭발했다. 자오쯔양의 후임 총서기인 장쩌민도 총리 리펑을 줄곧 어려워했고 장쩌민 1기 정권에서도 양자 간에 적지 않은 불협화음이 생겼다. 이에 장쩌민 전 총서기는 당주석 자리를 부활시키고자 했으나, 리펑 등의 반대로 줄곧 좌절됐다.

리펑의 후임 총리로 발탁된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역시 강한 카리스마로 장쩌민보다 더 주목을 끌었다. 덩샤오핑이 “그럭저럭 괜찮다”며 발탁승진시킨 주룽지는 ‘국유기업 하강(下崗·정리해고)’ 등 경제개혁을 주도하며 ‘철혈 재상’으로 군림했다. 서방 언론도 덩샤오핑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주룽지를 심지어 장쩌민 대체카드로 관측하기도 했다.

주룽지의 후임 총리인 원자바오도 총서기를 지낸 후진타오보다 대중적 지지도 등에서 더 높은 인기를 끈 경우다. 원자바오가 미국 CNN 인터뷰와 남순(南巡) 등을 통해 “당과 국가의 영도 제도 개혁 없이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역사적 비극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며 정치개혁을 주창했을 때도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중국에서 총리의 높은 인기는 특정 계파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대개 명(名)재상으로 분류되는 저우언라이, 주룽지, 원자바오는 소위 ‘랍방결파(拉幇結派·패거리를 끌어들여 파벌을 결성하다)’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룽지의 경우 지역적으로는 상하이방(上海幇)에 속했으나 장쩌민·쩡칭홍(曾慶紅) 같은 상하이방 핵심들과는 일정 거리를 둬왔다.

퇴임한 원자바오는 이 같은 역할을 가장 잘 구현했다는 평가다.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를 뜻하는 ‘후원체제(胡溫體制)’ ‘후원조합(胡溫組合)’은 27년간 궁합을 맞춘 마오쩌둥-저우언라이 이후 최고 궁합이란 평을 들었다. 당료 출신인 원자바오는 무려 4명의 총서기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다. 후야오방 집권 때는 중앙판공청(총서기 비서실에 해당) 부주임, 자오쯔양 때는 중앙판공청 주임, 장쩌민 때는 중앙서기처 서기와 부총리, 후진타오 때는 국무원 총리를 각각 지냈다. 이에 원자바오는 ‘네 왕조의 원로’라는 뜻에서 ‘사조원로(四朝元老)’란 별명도 갖고 있다. 이는 1942년생 동갑인 원자바오가 후진타오와 손발을 맞춰 10년간 장수한 까닭이기도 하다. 원자바오의 전임 총리인 주룽지는 5년 임기로 단임했다.

‘시리체제(習李體制)’ ‘시리조합(習李組合)’으로 불리는 시진핑-리커창 체제가 ‘후원체제’만큼 10년 동안 굴러갈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나이는 총서기 시진핑이 1953년생, 총리 리커창이 1955년생으로 시진핑이 2살 연상이다. 반면 2007년 17차 당대회 전까지 총서기 후계 경쟁에서 리커창이 시진핑을 줄곧 앞섰던 것은 최대 걸림돌이다. 리커창은 2007년까지만 해도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가장 유력했던 인사다. 베이징대 법학과 출신으로 경제학 석·박사, 공청단 제1서기, 허난성·랴오닝성 서기, 최연소 부총리 등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또 한때 총서기까지 거명됐다는 점에서 리커창은 리펑의 뒤를 잇는 역대 최강 실세 총리가 될 것이란 것이 대체적 전망이다. 게다가 리커창은 후야오방과 후진타오 두 명의 총서기를 배출한 ‘단파(團派·공청단파)’란 정치적 배경까지 등에 업었다. 이미 리커창의 대부제(부처통폐합) 개혁 방침에 따라 철도부가 폐지돼 교통운수부 아래로 편입되는 등 국무원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조짐이다. 철도부는 류즈쥔(劉志軍) 전 부장이 고속철 건설과 관련 1조8000억원을 수뢰한 혐의로 개혁 대상 1호로 꼽혔다.

일각에서는 ‘콰이주이(快嘴·빠른 주둥이)’ ‘다주이(大嘴·큰 주둥이)’란 말로 리커창의 월권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리커창은 원자바오의 마지막 정부 업무보고 하루 전인 3월 4일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에 참석해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는 지난해와 같은 7.5%”라고 먼저 공개해 “(원자바오 퇴임 전부터) 우쭐대며 주제 넘게 나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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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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