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스터 군인박물관에 전시된 6·25 참전용사들의 유품들.
글로스터 군인박물관에 전시된 6·25 참전용사들의 유품들.

지난 3월 12일 경기도 파주시(시장 이인재)와 영국 6·25박물관 건립 지원위원회(위원장 송달용) 방문단이 중부 잉글랜드의 글로스터(Gloucester)시를 방문해 9만4000파운드(1억5600만원)를 전달했다. 6·25박물관이 들어설 글로스터 군인박물관(Soldiers of Gloucester Museum) 증축 기금 모금에 힘을 보탠 것이다.

글로스터와 파주는 6·25 당시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다. 6·25 참전 영국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글로스터 연대는 1951년 4월 파주 적성면 설마리에서 퇴로가 차단된 채 중공군 3개 사단의 총공세에 맞서 사흘을 버텼다. 이 ‘임진강 전투’에서 750명의 장병 중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가 되는 희생을 치르며 파주를 사수해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한국 정부는 6·25 영웅으로 평가받는 글로스터 연대를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설마리에 영국군 전적비를 세웠으며, 영국 6·25 참전용사들이 매년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빈, 닉 클레그 부총리도 이곳을 다녀갔다.

‘설마리 영웅’들을 고향에서 새롭게 기릴 6·25박물관이지만 그동안 박물관 건립기금 모금은 쉽지 않았다. 영국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모금이 지지부진했고 올해 안에 6·25박물관을 완공한다는 당초 계획도 차질을 빚을 판이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파주시가 이번에 글로스터시 돕기에 나선 것이다. 글로스터 지방지들은 파주시의 도움을 소개하는 훈훈한 기사를 실었고, 군인박물관 측은 상당히 고마워하고 있다.

한국 언론에 실린 이번 파주시의 성금 전달식 사진을 보면 ‘영국의 6·25박물관 건립을 위한 파주 시민 성금 전달식(Presentation Ceremony of Paju citizens contributions for the Korean War museum in Gloucester)’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성금 전달자인 파주시 측이 만들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현수막 글 때문에 6·25박물관이 ‘새로 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독립된 6·25박물관을 짓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글로스터 군인박물관이 세 들어 있는 영국 국방부 소속 건물 중 현재 사용하지 않는 한 층을 새로 단장해 확장되는 공간에 6·25박물관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현지에서 만난 군인박물관 재단 이사장인 로버트 딕슨씨는 “총 모금 목표액은 500만파운드(85억원)를 예상하고 있다”고 했다. 딕슨 이사장은 현재도 군인박물관에는 ‘한국실’이 있지만 박물관이 증축되면 한국실을 좀 더 키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정도로 6·25박물관의 규모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 언론에 보도된 ‘유럽 최초의 독립된 6·25박물관’이 처음부터 우리만의 희망 사항이었는지, 아니면 계획이 여의치 않아 최근 변경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500만파운드짜리 공사 예산의 2%도 안 되는 성금으로 6·25 독립 박물관 주장을 하는 게 좀 우습긴 하다. 매년 4월 파주군 적성면 영국군 참전 전적비 앞에서 개최되는 행사에서는 영국 기업과 6·25 참전 노장들이 연금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오래전부터 한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글로스터 군인박물관을 취재하며 파주시만 앞장선 우리의 성금이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글로스터 군인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6·25 참전 글로스터 대대원들이 압록강변 포로수용소에서 만든 손수건.
글로스터 군인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6·25 참전 글로스터 대대원들이 압록강변 포로수용소에서 만든 손수건.

사실 영국인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다. 영국에서 한국전쟁에 영국군이 참전한 사실은 물론 영국군이 미군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참전용사를 제외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 영국군은 6·25에 연인원 6만3000명이 참전해 이 중 1109명이 전사했고 2674명이 부상당했다. 영국 초·중·고 교과서에도 이런 한국전 참전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영국 전역에서도 한국전 참전 흔적을 찾기란 정말 힘들다. 런던 시내 큰 거리와 공원에는 영국이 참전한 각종 전쟁에 대한 기념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최근에는 참전한 폭격기 조종사들을 따로 기리는 기념물이 버킹엄궁 바로 옆에 세워져 ‘정말 우리에게 아직도 이런 것들이 더 필요하나’라는 심각한 논쟁까지 붙을 정도였다. 심지어 2차 대전에 참전해 죽은 군마(軍馬)를 애도하는 동상도 있고, 군수공장에서 수고한 노동자들을 위한 기념탑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한국전 참전 군인들을 위한 기념물은 정말 손꼽을 정도이다. 런던 시내 세인트 폴 대성당 지하에 한국전 참전 기념판이 하나 있긴 하다. 거기서 매년 6월 25일 한국 대사를 비롯한 소수의 인사들이 모여 기념 행사를 연다. 이 기념판이 유일한 한국전 참전 공식 기념물이다.

사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공식 참전 기념판의 존재에 대해서는 영국에 사는 한인들조차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국의 영국 관광 안내책자 어디에서도 이 기념판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자세히 설명하는 책자에도 이 기념판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필자의 눈에 띈 영국 내 몇 가지 한국전 관련 ‘흔적’을 한번 소개한다. 지금은 ‘글로스터’라고 이름이 바뀐 런던 슬론 스트리트에 있는 펍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임진(Imjin)’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글로스터 대대의 영웅적인 전투를 기념하는 듯해서 주인에게 간판의 의미를 물어보았으나 ‘임진’이 글로스터 대대가 싸운 임진강을 뜻한다는 사실을 몰라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나마 이제는 간판 이름도 바뀌어 버려 아쉽다. 이번에 글로스터 군인박물관을 방문하면서 글로스터시 관계자들에게 ‘임진’이라는 이름의 펍이 런던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더니만 시 관계자들은 “글로스터라는 펍이 있는 줄은 알았는데 임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모르겠다”고 했다.

여왕의 주말 거처인 런던 근교 윈저성의 중심인 세인트 조지 홀 옆방에도 한국전의 조그만 흔적은 있다. 왕립아일랜드 경기병 부대 깃발에 부대가 참전했던 전투명이 나오는데 제일 끝에 ‘임진 1951’이라고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한국에서 온 여행객을 데리고 윈저성을 갈 때면 이 깃발의 의미를 가르쳐 주며 6·25 때 미군 다음으로 영국군 사상자가 많았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글로스터시 외곽 나토군 신속대응 부대가 있는 병영도 또 다른 6·25의 흔적이다. 1998년 이 주둔지 이름을 ‘임진 병영(Imjin Barrack)’이라고 바꿨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흔적도 있다. 잉글랜드 중부 맨체스터에도 조그만 한국전 참전 기념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맨체스터 기념판의 어구가 참 인상적이다. ‘한국전쟁 1950~1953. 그들 중 누구도 신 앞에서는 잊혀지지 않는다(KOREAN WAR 1950~1953. Not one of them is forgotten before God)’. 정말 한국전쟁 참전 영국 군인들은 신 말고는 영국인이나 한국인 모두에게 잊혀진 듯하다.

매년 런던 한인타운이 있는 킹스턴 한인페스티벌에 초대되는 한 6·25 참전용사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한 번도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들(For the never met peoples of the never known country)을 위한 참전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분명 이기고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전쟁 영웅의 귀환으로 환영받지 못했고 심지어는 동네 마을에서마저도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그는 “한국이 워낙 멀리 있었고 당시는 2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라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서 아무도 알고자 하지 않은 탓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그러니 “전적비나 기념비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고 되레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 글로스터 대대의 ‘임진강 전투’ 60주년을 맞아 더타임스 서울 특파원 겸 작가인 앤드루 새먼이 출간한 ‘마지막 한 발(To The Last Round)’은 한국은 물론 영국에서도 제법 화제를 불러일으켰다.(새먼은 영국인이고 한국인 아내를 둬서 그나마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은 편이다.) 새먼은 임진강 전투를 페르시아 대군과 싸워 전멸한 스파르타군의 ‘테르모필레 전투’에 비유했다. 한국전쟁이 모든 면에서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참혹했고, 북한군과 중공군과의 전투가 독일군을 상대로 한 전투보다 더 지독했다는 영국 군인들의 증언을 전했다.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벤플리트 장군은 글로스터 대대에 대해 ‘현대전에 있어 단위 부대의 용기를 과시한 가장 뛰어난 귀감이었다’고 칭찬한 바 있다. 백선엽 장군도 회고록에서 ‘영국군이 임진강 전투에서 4일(1951년 4월 22~25일)을 버텨 주어서 유엔군이 동두천과 의정부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고 했다. 만일 그 시간이 없었다면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져 한국전은 승산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 3개를 들라면 낙동강 전투,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임진강 전투를 드는 이유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임진강 전투에서 글로스터 대대는 거의 괴멸하다시피 했다. 750명의 대대 병력이 2만7000명의 중공군을 맞아 전사 59명, 행방불명 98명, 포로 526명의 처참한 전과를 남겼다. 겨우 67명만 전장에서 탈출했다. 포로 가운데서도 180명이 부상자였고 포로생활 중 34명이 죽었다.

새먼의 책을 보면 당시 글로스터 대대는 수랭식 기관총을 너무 많이 쏴서 총열이 달아올랐지만 이를 식힐 물마저 없었다고 한다. 총열을 오줌으로 식히려 했지만 오줌이 나오질 않았다는 증언도 나온다. 이 단일 전투에서 영국군이 쏜 포탄은 2만3000발로 1982년 포클랜드 전투에서 쏜 포탄의 두 배 규모였다. 중공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전체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후퇴했고, 결국 반격의 기회를 다시 잡지 못하고 종전이 되었다.

글로스터 군인박물관 전경
글로스터 군인박물관 전경

이처럼 글로스터 대대는 처절하게 싸웠고 그로 인해 ‘영광의 글로스터(Glorious Gloster)’라는 이름을 남겼다. 글로스터 대대의 표어는 ‘우리들의 행동으로 우리는 알려진다(By our deeds we are known)’이다.

임진강 전투에서 글로스터 대대가 보여준 용맹성은 농성(籠城) 방어에 강한 영국인의 일면을 여지없이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백선엽 장군도 ‘영국군은 성실하게 전투에 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쟁과 관련된 모든 일에는 신중하면서도 진지하게 대했다. 특히 그들은 방어에 강했다. 어느 곳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지면 죽음으로써 그곳을 지키는 우직함이 돋보이는 군대였다’고 했다. 특히 글로스터 시민들로 이루어진 글로스터 대대의 방어력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다. 영국 역사는 글로스터 시민이 1643년 ‘시민전쟁(Civil War)’ 중에 글로스터시를 폭군 찰스왕의 군대로부터 3일간 성공적으로 지켜낸 것을 ‘글로스터의 포위(Siege of Gloucester)’라 부른다. 당시 글로스터 시민들은 주위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크롬웰의 공화파를 지지했다. 당시 찰스왕은 글로스터시에서 80㎞ 떨어진 옥스퍼드의 군 본부로부터 왕당군을 끌고왔지만 글로스터 시민들은 런던에서 시민 후원군이 오기까지 이를 막아냈고 결국 시민전쟁에서 공화파가 이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는 복위된 후 글로스터시 도시 성곽을 해체하는 보복을 감행해 현재 글로스터시에는 성곽이 없다. 이런 역사의 후손들답게 글로스터 대대는 6·25전쟁에서도 정말 우직하게 버틴 셈이다. 현재 글로스터 군인박물관에는 6·25 당시의 공훈으로 대대장 카느 중령을 비롯해 3명의 참전 군인이 받은 영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 3개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새먼은 자신의 책에서 포로가 된 글로스터 대대원들이 압록강변 포로수용소까지 500㎞에 이르는 죽음의 행군과 이후 포로수용소 생활을 어떻게 견뎠는지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영국군은 다른 참전국 군인들에 비해서도 특히 과묵하게 포로수용소 생활을 견뎠다. 글로스터 박물관에는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심심풀이로 만든 수공예품들도 전시돼 있다. 손수건에 그린 십자가 위에 쓰인 RIP(‘안식을 누리소서(rest in peace)’라는 문장을 뜻함)라는 글자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손수건 가장자리에는 글귀를 새긴 포로와 같이 있던 동료 포로들의 서명도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영국인의 핏속에는 누구에게나 군인 유전자가 들어 있다는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영국인에게 전쟁은 하나의 생활 방편이었다. 귀족은 모두 기사 출신의 군인이었다. 농민이나 서민들도 평소에는 귀족의 땅을 빌려 경작해 살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지방 영주인 귀족이 들려 주는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신민으로서 세계 어디선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영국인들의 전쟁에 대한 태도는 여느 국가 국민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영국 내 전투 기념비의 대부분은 비록 승전을 기념하는 것이라 해도 의기양양한 모습이 아니다. 예컨대 런던 시내 리전트 스트리트에 있는 크리미아 전투 기념비는 영국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면 인물들의 표정이 슬프다. 영국인이 전쟁기념비를 세우는 이유는 전사자에게 바치는 감사와 유가족들에게 드리는 위로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글로스터 군인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정말 열심히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있는 방문객들을 봤다. 모두 전쟁터 근처에는 가보지 못한 사람들처럼 보였는데도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거의 전문가 수준의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놀랐다. 정말 모든 영국인의 핏속에 군인의 유전자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인 자신들도 이를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영국 서점을 가 보면 전쟁 관련 코너가 어디에나 있다. 벌써 끝난 지 70년이 넘는 2차 대전과 관련한 수많은 책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심지어는 자신들과 직접 관련이 없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나 ‘레닌그라드 포위’에 관한 전쟁 역사서도 수십만 권씩 팔린다. 새먼의 책 속에 나온 6·25 참전 군인의 말이 이런 영국인의 DNA를 증명한다. ‘나는 중공군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훌륭한 군인들이었고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개미들이 몰려 오듯 끝도 없이 밀려 오던 중공군에 대한 공포는 지금도 꿈에 나타나지만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는 참전 군인들의 말은 정말 놀라웠다.

6·25 참전 글로스터 대대원들에게 수여된 훈장.
6·25 참전 글로스터 대대원들에게 수여된 훈장.

매년 광복절을 전후해 런던 한인타운이 있는 킹스턴 시내 공원 잔디밭에서 열리는 한인페스티벌에는 한국전 참전 노병들이 초대되어 온다. 매년 그 수가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지만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밝다. 특히 “한국이 발전해서 참 좋다” “보람을 느낀다”고 말할 때는 더욱 표정이 밝아진다. 한국에라도 초청되어 갔다온 경우는 자랑이 끝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한국의 발전은 자부심이다. 또 그런 나라를 위해 참전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시달리는 전쟁후유증을 극복하게 만드는 자부심의 근원이다.

영국은 1차 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이 현충일이다. 11시11분에 방송에서 나오는 신호와 함께 전국이 묵념에 들어간다. 매년 10월 중순부터 한 달간은 사람들의 옷 어딘가에 커다란 ‘개양귀비(poppy)’가 달려 있다. 바로 현충일 모금용 꽃이다. 이 무렵 공식석상에 나오는 저명인사의 가슴에 개양귀비가 달려 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TV에 나오는 아나운서건 출연자건 누구나 하나씩 달고 나온다. 영국인은 전쟁에서 전사하면 최소한 5군데에 이름이 새겨진다고 한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 안, 동네 광장에 세워진 위령탑, 초등학교 벽, 중고등학교 벽, 전쟁 기념탑, 이렇게 다섯 군데이다.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 하는 이웃들의 노력이 영국 군인들로 하여금 다음 전투에서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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