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박라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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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88년 겨울이었다. 서울의 서울역, 구로역, 충무로역 등의 역내에는 일단의 노숙자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꾀죄죄한 무리였다. 노숙자들 중에는 강원도 삼척에서 올라온 스무 살 청년이 있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했으나 사기당하고 좌절한 남자였다. 청년은 서울역과 구로역에서 노숙을 했고, 제 나름의 노하우가 쌓이자 아예 충무로역에 진을 쳤다. 잠은 충무로역 구내에서 자며 근처의 진영상가에서 구걸을 했다. 부근 행복예식장에서 결혼식이 있는 날은 생일날이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겨울을 난 청년은 1988년 여름 특수전사령부에 입대한다.

이 청년이 ‘빵빵’ ‘황진이’ ‘무조건’ ‘자옥아’를 히트시킨 가수 박상철씨다. 최근 개봉한 영화 ‘전국노래자랑’은 박상철씨를 모델로 만든 영화다. 미용실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던 주인공 봉남(김인권 분)이 지역에 온 전국노래자랑에 출전해 1등을 한 뒤 가수로 성공한다는 이야기. 코미디언 이경규씨가 제작한 ‘전국노래자랑’은 관객들의 눈물샘과 웃음샘을 자극하며 관객 수를 늘려가고 있다.

33년이 된 KBS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평균 시청률은 12~14%다. 일요일 낮 12시10분에 녹화 방영하는 이 프로그램 시청자들은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전국노래자랑은 한국의 평균적인 삶의 축소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국노래자랑’의 예선·본선에서 출연자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가 ‘무조건’과 ‘황진이’다. 예선 심사를 하는 정한욱 작가는 출연자들에게 제발 ‘황진이’와 ‘무조건’을 그만 불러달라고 말할 정도다.

2009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뜻밖의’ 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진성호 전 새누리당 의원이 내놓은 자료 ‘노래연습장·유흥단란주점의 음악저작권 이용실태’에서 박상철이 부른 ‘황진이’가 1위를 차지했다. 노래방을 즐기는 보통의 한국인이 얼마나 ‘황진이’를 애창하는지가 수치로 증명된 것이다.

박상철은 지난 5월 8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어버이날 디너쇼를 열었다. 디너쇼에 앞서 박상철은 호텔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나 1시간30분 동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박상철은 1968년생.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가 고향이다. 전국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맹방 해수욕장이 있는 곳이 근덕면이다. 집안이 어려워 어머니가 이웃집으로 돈을 빌리러 다니던 모습을 어린 박상철은 아프게 기억한다. 비록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는 어머니로부터 노래를 잘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노래를 제일 잘하셨습니다. 박자는 조금 틀렸지만 목소리가 아주 개성 있고 좋았어요. 저는 동네에서 콩쿠르 대회를 하면 늘 나갔고 꼬마들에게 주는 상을 휩쓸었지요. 근덕중학교 다닐 때도 전교에서 노래를 가장 잘했고 소풍이나 수학여행 가면 으레 제가 노래를 불렀죠.”

가수 박상철이 ‘무조건’을 부르고 있는 모습. ⓒphoto 연합
가수 박상철이 ‘무조건’을 부르고 있는 모습. ⓒphoto 연합

삼척고등학교 시절 박상철은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었다. 5인조 밴드 ‘은빛메아리’를 결성해 리더 겸 보컬로 활동했다. 밴드 이름을 ‘은빛 메아리’로 지은 것은 고향에 동해바다와 마읍천이 흘러 은빛 물결이 넘실대기 때문이다. 고교 졸업과 함께 대학 연극영화과에 지원했지만 낙방한다. 이후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건설경기가 최고조에 이를 때였다. 여기저기서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이어서 잡역부 수요가 많았다. 일당 3만5000원으로 시작해 몇 개월 만에 일당 7만원을 받는 미장 데모도가 됐다. 그렇게 해서 1000만원이라는 큰돈을 모았다. 이 돈을 밑천으로 그는 가수를 만들어준다는 기획사를 노크했다.

“TV가이드를 보고 기획사를 찾아갔습니다. 음반을 취입해주고 방송에 출연시켜주겠다는 말만 믿고 하라는 대로 다 했습니다. 노래를 녹음하긴 했는데 알고 보니 메들리 테이프였죠. 방송 출연은 무슨…. 막노동해서 번 돈 1000만원을 몇 개월 만에 고스란히 날렸습니다. 삼척에서 가수가 되겠다고 올라왔는데 고향에 어떻게 내려갑니까. 호주머니에 돈은 없죠. 갈 곳도 없죠. 그래서 노숙자 노릇을 한 겁니다. 50원짜리, 100원짜리 동전 던져주는 것을 모아 끼니를 해결했어요. 밥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어요. 겨울 지내고 특전사 입대를 결심했죠.”

1988년 여름, 박상철은 특전사를 자원했다. 워낙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누구보다 강해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군대에 가면 어느 곳보다도 평등하게 대접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악착같이 훈련해 모범사병상과 훈련유공자 표창도 받았다. 그는 1990년 특전사를 제대했다.

“군대 가서 배운 게 참 많아요. 특전사 최정예부대에서 머리로 바위 깨는 것 빼놓고는 다 된다는 것을 배웠죠. 안 되는 게 없었죠. 특전사는 정말 공부를 많이 시켰어요. 단기간에 정말 많이 공부했습니다.”

군에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우선 돈이 필요했다. 돈을 벌기 위해 미용기술을 배웠다. 남자 미용사가 별로 많지 않을 때여서 남자가 미용사가 되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삼척시내에 ‘박상철 헤어아트’를 차렸다. 미용실은 손님이 넘쳤다. 미용실이 안정되자 그는 미용실 옆에 노래연습장을 차려놓고 틈만 나면 노래 연습을 했다. 이때 결혼도 했다. 직원이 10명까지 늘어났다.

“미용실을 하며 가수가 될 기회를 찾는데 기회는 오지 않고 세월만 가는 거예요. 나이는 먹어가고. 그때 제 친구가 ‘강병철과 삼태기’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럴수록 더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1993년 삼척에 전국노래자랑이 녹화를 왔습니다. 저는 유열이 부른 ‘화려한 날은 가고’를 불러 1등을 했지요.”

주지하다시피 ‘전국노래자랑’은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전국노래자랑에서 1등을 했다는 상장을 들고 저돌적으로 대시했다. 그는 전국노래자랑 담당 PD를 찾아가 가수를 시켜달라고 졸랐다. “커피숍에서 감독 선생님을 만났는데 내가 물러서지 않으니까 답답해하며 팥빙수를 다섯 그릇이나 드셨습니다. ‘내가 가수 시켜주는 사람이 아닌데…’라면서 난감해했어요. 그러다 당시 FD로 있던 배일호씨를 불렀어요. 그러고는 작곡가 박현진씨에게 저를 소개하라고 한 겁니다.”

그는 이튿날 삼척에서 서울로 가 ‘신토불이’ 작곡가 박현진을 만났다. 이후 1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가수 수업’을 시작했다. 삼척에서 새벽 5시20분 첫차를 타고 서울에 가 막차를 타고 내려오는 일. 하지만 그는 노래를 취입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당시 박현진 선생님이 제게 여러 곡을 주셨는데 제가 마다했어요. ‘큰물은 피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때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세였기 때문에 트로트가 주목받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트로트가 바람을 탈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음악은 돌고 돌잖아요. 트로트 인기가 바닥이면 트로트 가수가 다 그만둘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린 거죠. 그런데 1990년대 말 발라드가 봇물처럼 터지는 거예요. 그래 ‘발라드 다음은 트로트’라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준비했지요.”

2000년 데뷔 앨범 ‘부메랑’을 냈지만 실패했다. 2002년 ‘자옥아’를 들고 혼자 방송 3사 라디오국을 드나들며 노래를 홍보했다. 라디오국 PD 상당수가 그에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담당 PD를 만날 수 없자 아예 아침 일찍과 오후 늦게 방송국을 찾기도 했다. 어느 간부는 그에게 제발 그만 오라며 책을 던지기도 했다. 하도 찾아오니 방송국 측에서 조치를 내렸다. ‘11시 이전에 가수 출입 금지’라고 써 붙였다. ‘죽기 전엔 그냥 안 내려간다’고 결심한 그였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어느 날 제가 인사만 하고 가니 어느 국장님이 하루는 저보고 자리에 앉아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강원도 삼척에서 올라와 매니저도 없이 신곡을 홍보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한 40분 듣더니 다른 PD들에게 제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 라디오에 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죠.”

‘자옥아’가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가수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TV 출연을 뚫을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그의 ‘역발상 도전’이 빛을 발한다. 동대문의 두타, 밀리오레 등 행사장에 출연했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나가서 노래를 배우려는 주부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연기자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재연 프로그램에 뛰어들어 얼굴을 알렸다.

영화 ‘전국노래자랑’에서 주인공 봉남이 사회자 송해(오른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영화 ‘전국노래자랑’에서 주인공 봉남이 사회자 송해(오른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TV는 사랑을 싣고’ ‘솔로몬의 선택’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사랑과 전쟁’ 등의 재연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비쳤다. 시간이 갈수록 ‘재연배우 출신 가수’로 알려지면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섰다. 그러다 MBC 가요큰잔치에 출연할 기회가 왔다. 노래교실에서 만나 공을 들인 주부팬클럽이 객석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담당 PD는 가수 박상철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데뷔 3년차인 2002년 ‘자옥아’는 이렇게 히트했다. 비로소 무명 가수의 설움에서 벗어났다.

박상철을 트로트 스타로 만든 것은 ‘무조건’이다. 이 노래가 히트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역발상이 먹혔다. 그는 방송 3사를 정면 공략하는 대신 아이돌 버전으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을 뚫었다. 음악 전문 채널에 자주 나가면서 아이돌 팬들이 자연스럽게 ‘무조건’을 알게 됐다. 이렇게 조금씩 시간이 흐르자 급기야는 아이돌 스타가 ‘도전 1000곡’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무조건’을 불렀다. 박상철 스타 탄생의 신호탄이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사랑이야/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신다면 달려갈 거야 무조건 달려갈 거야~’.

박상철의 인기를 결정적으로 확인시킨 사건은 국회의원 선거였다. 각 정당 후보들이 ‘무조건’을 개사해 선거 로고송으로 만들어 사용하면서 전국에서 선거운동 기간 내내 ‘무조건’이 터져나왔다. 가수로서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었다. 뒤를 이어 나온 ‘황진이’는 순조롭게 히트곡의 흐름을 이어갔다. ‘무조건’은 중·고교 수련회에서 교사와 학생이 합창으로 열창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노랫말이 재미 있고 따라 부르기 쉽기 때문이다. 이제 트로트 가수는 박상철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박상철은 어버이날 같은 행사 때 ‘가장 초대하고 싶은 가수’ 상위에 포함된다. 스타 가수가 되었음에도 그는 틈틈이 ‘6시 내고향’에 출연해 지방의 팬들과 몸을 부대낀다.

2011년쯤 이경규씨가 박상철을 찾아와 전국노래자랑을 주제로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전까지는 이씨와 인사만 나눴을 뿐 개인적 친분이 없었다. 이씨는 이미 박상철에 대한 관련 자료를 본 뒤 몇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5월 초 영화 ‘전국노래자랑’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박상철의 인생극장은 영화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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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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