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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전 60주년 전쟁의 기억 중국] 김정은이 오성산 찾은 것은 ‘상감령전역’ 추억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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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262호] 201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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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주년 전쟁의 기억 중국]김정은이 오성산 찾은 것은 ‘상감령전역’ 추억 때문?

이동훈  기자 

▲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에 있는 승리전망대에서 철책선 너머로 내려다본 상감령과 오성산. 화강(남대천)이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오성산(五聖山). 휴전선 북측에 있는 해발 1062m의 산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북한 측 강원도 김화에 있다. 우리 측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2리의 승리전망대에 올라서면 오성산이 또렷하게 보인다. 지난 6월 19일 ‘戰卽必勝(전즉필승)’이란 비석을 지나 해발 459m 승리봉 정상에 있는 승리전망대에 올라섰다. 우리 측 철책선(남방한계선) 너머로 상감령(저격능선)과 그 너머로 오성산이 희미하게 내다보였다. 전날부터 시작한 장맛비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승리전망대와 저격능선 사이로는 한탄강의 원류인 화강(옛 남대천)과 옛 금강선 전철(철원~내금강)이 자연 경계선처럼 지나고 있었다.
   
   현재 휴전선 155마일(약 249㎞)의 정중앙에 위치한 승리전망대를 관할하는 군부대는 강원도 화천에 사단사령부를 둔 육군 제15사단. 철원의 승리전망대에 상주하는 육군 15사단 정훈장교는 “구름이 껴서 지금은 흐리지만 맑은 날씨에는 상감령과 오성산이 또렷하게 내다보인다”고 말했다.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지난 6월 2일 오성산 정상에 올랐다. 15사단 정훈장교에 따르면, 오성산 정상 부근에는 북측 전파관측소가 있다. 중위인 이 정훈장교는 “북측이 감청작전을 벌이는 곳”이라고 했다. 상감령 동쪽에는 ‘하전사교육장’이란 북한군 신병교육대도 있다.
   
   중국중앙방송(CCTV) 등 중국 관영 언론도 김정은의 오성산 북측 최전방 초소 방문을 크게 보도했다. CCTV가 김정은의 오성산 방문을 주목한 까닭은 오성산이 중국 측이 6·25전쟁의 ‘성지(聖地)’로 꼽는 ‘상감령전역(上甘嶺戰役)’ 현장이라서다.
   
   CCTV는 “오성산은 상감령전역과 아주 밀접한 지점으로 김정은이 상감령정신으로 강함을 드러냈다”며 “조선전쟁(한국전) 때 한·미연합군이 상감령을 넘었다면 휴전선이 이북으로 한참 올라왔을 것”이라고 했다. “한·미연합군의 전진을 막아 북한 영토를 더 넓게 한 군위(軍威)를 떨친 전쟁”이 CCTV의 상감령전역에 대한 총평이다.
   
   ‘상감령전역’은 북한과 중국에서는 신성시되지만, 우리에게는 사실상 잊혀진 전투다. 국내 지방자치단체 중에 6·25전쟁과 관련한 유물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철원군이 발간한 관광 안내 책자에도 상감령전역(저격능선·삼각고지전투)을 다룬 페이지는 없었다. “주말이면 200~300명씩 찾아온다”고 승리전망대 매표소 관계자가 말했지만, 이날 오성산과 상감령을 둘러볼 수 있는 승리전망대를 찾은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다. 승리전망대는 민통선 안에 있지만, 제한적으로 일반 관광객의 관람을 허용한다. 철원문화원 김철암 사무국장은 “근대 문화재가 많은 백마고지는 많이 찾아가도, 저격능선은 많이 안 찾는 편”이라고 했다.
   
   북한과 중국은 ‘상감령전역’을 6·25전쟁 중 가장 주요한 전투로 꼽는 데 거리낌이 없다. 중국에서 쓰는 ‘전역(戰役)’이란 말은 ‘전투(戰鬪)’보다 크고 ‘전쟁(戰爭)’보다는 작은 개념이다. 대개 전쟁의 국면을 뒤엎는 ‘결정적 한판’을 일컫는데, 한국과 미국이 6·25의 가장 ‘결정적 한판’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꼽는 것과 비슷하다.
   
   기자가 상감령전역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국 산동성 칭다오(靑島)에서다. 지난해 9월 중국이 최초로 취역한 항공모함 랴오닝함이 정박하는 북해함대의 모항인 칭다오의 해군박물관 안에는 상감령에서 캐왔다는 앙상한 고목이 놓여 있다. 1960년대 말 중국을 찾은 북한대표단이 기증한 나무로, 앙상한 고목에는 총탄 흔적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지난 2011년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 때 상감령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졌다. 만주족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이 백악관에서 ‘나의 조국(我的祖國)’이란 곡을 연주했을 때다. 이 노래는 미군을 ‘승냥이와 이리떼’로 비하한 노래로, 1956년 나온 흑백영화 ‘상감령’의 주제가다.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도 2010년 10월 21일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중국 인민지원군 6·25전쟁 참전 기념행사에 참가해 군복을 입고 ‘나의 조국’을 불렀다. 이 자리에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도 아버지 김정일과 함께 참석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은 압록강을 도하해 한국전에 개입했다. 중공군 사령관은 중국 ‘10대 원수’ 중 서열 2위 펑더화이(彭德懷) 장군. 펑더화이의 파상공세로 UN군은 38선까지 후퇴했다. 또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쌍방은 사실상 ‘땅따먹기 싸움’에 돌입한 상태였다. 중부전선의 한가운데 있는 오성산은 양측의 가장 치열한 ‘땅따먹기 싸움’의 현장이었다. 철원 토박이인 철원군청 공보계의 박성용씨는 “오성산을 차지하면 아래쪽을 훤히 내다볼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휴전회담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기 위해 1952년 10월 14일자로 ‘쇼다운 작전’을 제안한다. 당시 휴전회담은 전쟁포로 송환 문제를 두고 결렬을 앞두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지지부진하자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밴플리트의 제한 공격작전을 승인한다. 목표지점은 오성산 동남쪽의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이라 불리는 두 개의 봉우리였다. 각각 해발높이를 따서 ‘537고지’ ‘597고지’로 불렸다. 중국은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상감령전역’으로 부른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약 43일간의 상감령전역에 투입된 중공군 병력은 4만3000명. 한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은 약 6만여명이다. 당시 UN군에는 한국군과 미군은 물론 에티오피아군과 콜롬비아군까지 가세했다. 쌍방 양측에서 사용된 포탄만 230만발이 넘고, UN군과 중공군 측 사상당한 병사는 도합 4만여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전투에 하사로 참전한 김국태(86·철원군 근남면) 옹은 “미군 B-29가 폭격하고 지나가면 중공군이 땅굴에서 솟아나와 따발총을 쏘아댔다”고 회고했다.
   
   중요한 전투지만 우리 측에 있는 유적은 철원군 김화읍 청양리 화강(남대천)변 동산에 있는 ‘저격능선전투전적비’가 전부다. 지난 6월 19일 참호로 둘러쳐진 나지막한 동산을 올라가자 석비가 보였다. 비석 기단에는 ‘오만한 적 중공군 제12군 및 제15군과 용감히 싸워 조국의 흥망을 좌우하던 싸움에서 끝끝내 버티고 있던 불멸의 투혼은 이 전야에서 태양처럼 영원히 빛나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청양리에 있는 ‘저격능선전투전적비’.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비석에 적힌 글귀는 자못 엄숙했지만, 석비 뒤로 주민들이 체력단련용으로 쓰는 운동기구들이 보여 묘한 풍광을 자아냈다. 1957년 7월 1일 육군 5군단이 세웠다는 비석 좌우로는 야포 2문이 화강 너머 북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함께 찾은 철원군청의 한 관계자는 “여기는 화강을 넘어오는 적을 막던 곳”이라며 “저격능선이 북쪽에 있어서 할 수 없이 비석을 여기 세운 것”이라고 했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사령관으로 사실상 전쟁을 주도한 펑더화이는 한반도 지도를 펴놓고 중공군 15군 사령관 친지웨이(秦基偉)에게 “누구든 오성산을 잃어버리면 조선의 역사에 책임져야 한다”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중공군 15군은 친지웨이가 군단장으로, 지난해 낙마한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의 장인 구징성(谷景生·구카이라이의 부친)이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펑더화이가 친지웨이에게 “조선의 역사” 운운한 것은 오성산의 전략적 위치때문이다. 펑더화이는 “오성산은 조선 중부전선의 문호로, 만약 오성산을 잃어버리면 200㎞를 후퇴하고 방어할 만한 요새도 없다”고 했다.
   
   43일간의 분투 끝에 친지웨이는 오성산의 아래쪽 능선인 상감령에서 UN군의 북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오성산은 휴전선 북측에 남게 됐고, 우리 측에서는 서서히 잊혀진 땅이 됐다. 전투력을 인정받은 중공군 15군은 1961년 중국인민해방군의 최정예인 공수부대 15군으로 재개편됐다. 친지웨이는 공을 인정받아 덩샤오핑 집권 후에는 국방부장 겸 중앙군사위원까지 줄곧 승승장구했다. 친지웨이는 1984년 덩샤오핑이 직접 사열한 국경절 35주년 천안문광장 대열병식도 총지휘했다.
   
   1986년 8월 상감령전역의 주역인 친지웨이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당시 김일성은 극진한 대우를 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이 친지웨이에게 “어디를 가보고 싶냐”고 묻자, 친지웨이는 “오성산에 올라가서 상감령을 보고 싶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즉각 평양에서 헬기를 띄워 상감령 일대를 하늘에서 둘러보게 했다고 친지웨이는 사망 전 인터뷰에서 밝혔다.
   
   지난 2011년 리더성(李德生) 장군이 96세로 사망했을 때도 CCTV 등 중국 관영언론은 “상감령전역을 지휘한 장군”이라며 추모열기를 고조시켰다. 리더성은 중공군 15군을 이끌던 친지웨이와 함께 12군을 이끈 사령관이다. 15군이 주공(主攻)이었다면 12군은 조공(助攻)이었다. 리더성이 사망했을 때는 후진타오 당시 주석을 비롯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이 모두 직접 조문했다.
   
   물론 쌍방의 전투에 대한 평가는 많이 엇갈린다. 오규열 전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서울디지털대 중국학과 교수)은 ‘중공군의 상감령전투에 대한 재평가’란 논문을 통해 “중국은 미 제7사단이 삼각고지를 공격한 시점부터 시작하여 한국군이 삼각고지를 포기하기까지, 모든 삼각고지전투와 전체 저격능선전투를 함께 상감령전투라 칭하고 이를 분석하였기 때문에 평가가 차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상감령전역’이 북·중 간 군사(軍史)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크다. 친지웨이가 이끌던 중공군 15군은 한·미연합군을 주축으로 한 UN군의 막강 화력에 맞서 지하갱도를 파고 진지를 사수하는 갱도전법을 택했다. 김국태 옹은 “오성산에는 일제가 판 아연광산들이 많았다”고 했다. 소위 ‘지하장성(地下長城)’으로 불린 오성산의 갱도는 미군의 폭격에도 잘 버텨냈고, 갱도전은 적의 화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택하는 중공군의 주요 전법으로 자리매김했다. 갱도전법은 베트남전 때도 호찌민에게 차용돼 한국군과 미군을 괴롭혔다.
   
   북한군의 ‘땅굴’은 중공군이 쓴 ‘지하장성’으로부터 전수됐다고 한다. 오성산 아래쪽 철원 근동면 광삼리에서는 1975년 ‘제2땅굴’도 발견됐다. 오규열 교수는 “중공군이 한국전쟁 시 수행한 갱도전술은 이후 북한군에게 전수되었고 북한군 전투교리에 많은 영향을 줬다”며 “그 결과 북한군 교리는 갱도작전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으며 중요 지역에 땅굴을 굴착해 아군을 위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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