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은 시민들이 이날 출간한 하루키의 새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photo 김연정 조선일보 기자
지난 7월 1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은 시민들이 이날 출간한 하루키의 새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photo 김연정 조선일보 기자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한국에서도 폭발적 인기다.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발매된 날에는 서점에 긴 행렬이 생겼다고 한다. 하루키 인기에 대해 한국 언론들은 ‘하루키가 돌아왔다’ ‘하루키 월드에 감탄’ ‘하루키 신드롬’ ‘하루키 열풍이 음악에도’ 등 앞다퉈 대서특필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초판이 50만부 팔렸고 한국에서도 2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과 한국의 인구비와 거의 맞아떨어지는 수치다. 무라카미 하루키 애독자는 일본과 한국에서 똑같이 존재하는 셈이다. 일본 베스트셀러 소설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은 한국인이 하루키 문학에 전혀 거부감 없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일본과 한국은 사이가 안 좋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한·일관계 악화와 대립, 갈등 같은 뉴스가 매일같이 보도된다. 우리 일본 기자들이 서울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뉴스도 대부분 한국에서 일어나는 반일현상들이다. 독도, 위안부, 과거사 인식 등등. 그리고 ‘일본은 사악하고 믿을 수 없다, 사과하라! 반성하라!’다. 한국 사람은 반일적이고 한국 사회는 반일이 넘치는 사회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은 일본의 하루키 작품에 공감하고 열광하고 있다. 한국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일본 기자에게는 일종의 수수께끼다. 한국에서 보이는 대단한 하루키 붐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한다.

나는 1970년대부터 한국을 취재하고 있다. 1971년에 처음 일주일간 한국여행을 한 후, 1977년에는 한 달 동안 취재 목적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보통 한국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연재기사로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웃나라 한국의 다양한 모습을 다각적으로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부산의 어느 가정집에서 하숙하며 그 가족과 함께 지냈다. 보통 한국 사람은 매일 무엇을 먹고, 어떤 대화를 나누고, TV는 무엇을 보고,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아이들은 어떤 놀이를 하고, 학교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는지 등 한국 사람의 일상생활을 취재한 것이다.

그 집에는 남자아이가 둘 있고 하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운동회가 있다고 해서 보러 갔다. 운동회 자체가 그렇지만, 한국의 학교 교육은 일본식이었다. 그래서 운동회 경기도 눈에 익은 것이었는데, 환성을 지르면서 응원하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기 TV만화 ‘캔디캔디’의 주제가가 아닌가.

‘캔디캔디’는 일본에서 제작되어 큰 히트를 친 TV만화다. 한국에서도 방송되어 다 아는 인기 TV만화였던 것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캔디캔디’를 듣고 ‘한국 아이와 일본 아이는 ‘캔디캔디’로 서로 공감할 수 있구나!’ 하면서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하루키 열풍으로, 잠시 1970년대에 목격했던 사소한 에피소드가 생각난 것이다. ‘캔디캔디’는 국적불명한 내용이고 일본 이미지는 없다. 당시 한국 아이들은 ‘캔디캔디’가 일본 만화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하루키 작품의 한국 독자들은 그것이 일본인이 쓴,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공감하고 열광하고 있다. 이것은 하루키 작품에는 한·일 양국의 독자를 공감시키는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하루키 작품을 둘러싼 현대 일본인의 정서에 한국 독자도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제 일본과 한국에는 공통된 시대상황과 사회환경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형성되는 주인공들의 정서는 한·일이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한국에서 인기를 얻은 일본 소설은 1970년대에는 일본 무사시대(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대망’(저자 야마오카 소하치)이 스테디셀러였고, 그 후 1980년대에 걸쳐서는 ‘빙점’(저자 미우라 아야코)이 인기였다. ‘빙점’은 TV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또 전두환 시대에는 정권 주변을 비롯해서 경제계나 기업인 등에게서 화제가 되고 인기를 얻었던 ‘불모지대’(저자 야마자키 도요코) 등이 유명했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일본 현대소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제 인기의 중심은 일본 현대작가의 현대소설이다. 그 배경에는 소설에서 묘사되는 주인공들을 둘러싼 동시대 일본인과 일본 사회의 정서에 대한 공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변화가 분명히 엿보인다. 풍요로운 소비사회로의 변화라고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국 독자가 좋아하는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적 작가다. 한국 독자는 하루키 작품에 등장하는 어떤 ‘동시대 일본의 정서’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사소한 것부터 써 본다.

얼마 전에 출장으로 일본에 다녀왔을 때, JAL(일본항공)을 탔다. 좌석에는 JAL 기내지 ‘AGORA(아고라)’ 7월호가 있었다. 거기에 하루키가 쓴 ‘핀란디아 찬가’라는 여행기가 실려 있었다.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핀란드가 중요한 무대다.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다자키는 핀란드에 사는 고교시절 친구를 방문한다. 그녀는 스토리의 핵심이 되는 ‘비밀’을 알고 있고, 그녀와 재회함으로써 주인공은 새 출발의 계기를 잡는다.

이번에 일본의 하루키 독자들은 하루키 작품을 통해 핀란드에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한국 독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작에서 중요한 의미가 담긴 리스트의 피아노곡이 등장하는데 한국에서는 이것이 갑자기 인기곡이 되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핀란드행 직항노선을 개설한 JAL이 하루키 인기를 등에 업고 홍보 목적으로 하루키에게 여행기를 쓰게 한 것이다.

이번에는 핀란드와 리스트 피아노곡이 소설의 무대장치가 되었는데,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상실의 시대’에서도 주인공이 탄 비행기가 독일 함부르크공항에 착륙하는 장면이 도입부였다. 그때 기내에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 흐르고 있었다.(‘상실의 시대’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다.)

하루키 소설에는 이러한 외국과 외국 이야기가 멋있게 자주 등장한다. 그 외국도 대부분이 유럽이다. 이제 한국 사람들에게도 외국 혹은 유럽은 먼 존재가 아니다. 단순한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하게 느껴져 언제든지 갈 수 있다.

여기서 1970년대로 돌아가 사소한 추억을 또 하나 소개한다. 당시 나는 한국말 공부를 위해 한국 영화를 자주 봤다. 멜로드라마에서 사랑의 상처를 입은 히로인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가는 곳은 늘 부산 낙동강 하구에 펼쳐지는 을숙도 갈대 밭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녀들은 어디로 떠날까? 이제 낙동강 하구 따위에는 안 간다. 아마 해외로 갈 것이다. 한국에서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그때부터 한국 사람의 정서 세계는 확실히 넓어졌다. 외국 이미지는 하루키의 작품에 공감하게 되는 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 사소한 이야기지만, 하루키 작품의 등장인물은 일본인인데도 결코 일본 음식을 먹지 않는다. 아침은 토스트에 커피, 야채샐러드이고 낮과 밤은 프랑스 요리와 이탈리아 요리에 와인이나 칵테일이다. 스시, 라멘, 사케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도 명품 등 수입품이 대부분이다.

하루키 소설에서는 음식과 의상, 소지품 등 무대장치의 디테일이 중요하고, 그 묘사가 매력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서양 취미’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한국은 오랫동안 ‘양식 사막’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양식 레스토랑이 늘었고, 이탈리아 요리를 비롯해서 양식의 맛이 좋아졌다. 나의 런치 로드인 광화문 근처에는 항상 줄을 서고 있는 스파게티 가게도 있다. 한국에서 음식문화가 다양화된 것도 1990년대 이후가 아닌가. 한국 사람들의 명품 지향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하루키 작품에 대한 공감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번 신작도 그렇지만, 하루키 작품의 다수는 청춘시절의 회상을 소재로 젊은 날의 방황과 마음의 상처 그리고 그 치유, 재생 등이 테마가 되고 있다. ‘색채가 없는… ’에서는 고교시절 패거리들의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뜨거운 우정과 그 후의 갑작스러운 불신, 해체, 마음의 상처, 자살 충동, 자신 상실, 방황 등을 거쳐 화해에 이르는 10대부터 30대까지의 인생풍경이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최근 유행어는 뭘까. ‘웰빙’은 이미 오래된 것 같다. 그 대신 지금은 ‘힐링’이 아닌가. 하루키 소설은 ‘치유와 재출발’의 힐링소설이다.

한국에서는 요새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의 자살이 많다. 한국 젊은이들이 그렇다. 한국 젊은이는 험난한 시험지옥에 시달리고 있다. 사회인이 되어서도 격렬한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이 엄청난 경쟁사회는 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자살 급증의 사회적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신작은 ‘색채가 없는 상실자’인 주인공이 자살충동으로 고뇌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루키의 문체는 늘 소프트하다. 하루키의 ‘치유소설’이 한국 독자에게 공감받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루키 작품을 번역해온 김춘미 고려대 명예교수는 하루키의 인기 배경에 대해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혼자 살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주인공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이 386 세대의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언급했다.(중앙일보 7월 2일자)

그렇다면, 그토록 가족애가 깊었던 한국 사람들이 이제 ‘가족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다’며 가족관계를 속박이라고 부정하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실제 한국에서도 나홀로 생활이 늘고, 만혼과 저출산이 확산되고 있다. 그것이 하루키 소설에의 공감, 동경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에는 나도 동감한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에는 가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 사회 현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친구 사이에서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부모형제 등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왠지 쑥스럽다고 생각한다. 가족에 대한 집착은 자립되지 못한 아이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일본에서는 가족관계 붕괴와 인간관계의 ‘사막화’가 큰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이른바 ‘독거노인 고독사’를 비롯, 고령화시대 복지문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독자는 하루키의 소설 세계에 깔려 있는, 현대 일본인에게 나타나는 하나의 개인주의를 가족이 주는 속박으로부터의 탈출로 동경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동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루키는 ‘개인의 자립’이라는 근대화 일본인의 낡고도 새로운 과제를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로서 그것은 확실히 멋있다. 주인공도 멋있게 보인다.

그러나 현대 일본 사람들의 상처는 가족 붕괴에 의해 초래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설이지만, 힐링문학으로서의 하루키 월드는 아마 언젠가 가족 이야기로 가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의 하루키 인기와 한국 정치에서의 안철수 현상에는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내 지인으로 하루키 팬인 40대 한국 여성은 그 소설의 매력을 “더운 날의 나무 그늘”이라고 한다. 그리고 “틀에 박힌 현실 속에서 치유를 추구하고 새로운 어딘가로 출발하는 기분이 된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것은 실은 환상인데, 일단 맛을 보면 빠져버리는 마약적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한국 와처인 일본 기자에게 ‘하루키 월드와 안철수 현상’은 흥미로운 테마라고 생각한다. 계속 와칭하고 싶다.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 특별주재기자 겸 논설위원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 특별주재기자 겸 논설위원 / 번역 박영철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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