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로댕을 만날 무렵, 19세의 카미유 클로델<br></div>02 카미유 클로델의 대표작, ‘내맡김-사쿤탈라’, 1888년, 23세에 이 작품으로 최고상을 받고 조각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br>03 1929년 12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서, 65세의 카미유, 그 후로도 14년을 더 살았다.
01 로댕을 만날 무렵, 19세의 카미유 클로델
02 카미유 클로델의 대표작, ‘내맡김-사쿤탈라’, 1888년, 23세에 이 작품으로 최고상을 받고 조각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03 1929년 12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서, 65세의 카미유, 그 후로도 14년을 더 살았다.

로댕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30년간의 수용생활이었다. 그 오랜 세월 카미유는 단 한 점도 만들지 않았다. 반 고흐가 정신병원을 오가면서도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던 것에 비하면 카미유는 철저히 창작활동을 멈췄다. 그녀가 만든 것이라곤 요양생활 초기, 조카딸에게 보내기 위해 자기 치마를 재활용해 만든 패치워크 이불뿐이었다. 카미유는 진정 조각을 포기했던 것일까?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취미생활이라도 했던 것일까.

카미유는 48살에 수용소에 들어가 79살에 죽는다. 20세기 전반기, 정신병원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그녀가 아주 건강했다는 증거다. 시골 출신의 카미유는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약간 절기는 했지만 몸집이 크고 튼튼한 아이였다. 등기소 서기인 과묵한 아버지와 비사교적인 어머니 밑에서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오빠의 죽음 이후 태어난 아이였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을 끔찍이 아꼈던 아버지에 비해 아들의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카미유와 연관지었던 어머니는 그녀를 미워했다. 어머니는 카미유와 남동생 폴을 한 번도 안아주지 않을 만큼 냉정했지만, 둘째딸 루이즈는 편애했다. 이런 까닭에 카미유와 폴은 서로를 의지하며 둘만의 은밀하고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남매는 맘껏 산과 들로 뛰어다니고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 카미유와 폴의 장수 유전자도 어느 정도 이런 시골생활과 관련 있을 터다.

카미유는 폭넓은 취향의 열광적인 독서가였다. 클로델 가문에는 두 개의 서가가 있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서가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호메로스, 플루타르코스, 키케로 등 장정이 화려한 고전이 있었다. 더욱 매력적인 곳은 신부였던 외종조부(외할아버지의 형제)가 남긴 서가였다. 그녀는 소설과 여행기는 물론 성경까지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훗날 프랑스가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가 될 폴에게 자신이 흥미롭게 읽은 책을 건네주곤 했다. 폴이 문학가가 된 것은 순전히 카미유 덕분이었으리라. 이처럼 책 읽기는 여행과 모험을 향한 갈증을 달래주었고 남매 사이의 탄탄한 정신적 유대를 형성해주었다.

카미유는 19살의 나이에 로댕의 작업실에 조수로 들어가면서 24살 연상의 로댕과 사랑에 빠진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로댕과 풋내기이지만 예술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가졌던 카미유는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로즈 뵈레라는, 로댕의 결혼하지 않은 조강지처의 존재를 못 견뎌한 카미유의 결별선언으로 깨진다. 서른 살에 로댕과 결별하면서 그녀는 완전히 홀로 된다.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 카미유는 아버지의 지원을 받았지만 조각은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었다. 가족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하다 급기야는 먼 친구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지경이 되었다. 당시 카미유의 일기와 편지는 오로지 ‘돈 돈 돈’이었다. 돈에 대한 걱정은 돈에 대한 강박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카미유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밤에만 외출하고, 옷차림은 남루하고, 몸을 씻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단절하고, 모든 사람을 로댕이 보낸 살인자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조각을 부수기 시작하면서 광기는 점점 심해져갔다. 영원한 딸바보 아버지가 죽자 가족은 그녀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평생 동안 지속된 어머니와의 갈등과 마찰은 결국 카미유를 정신병원으로 들어가게 하는 데 일조했으며, 어머니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해도 좋다는 원장의 말을 묵살함으로써 딸을 생매장시켰다.

30년이라는 기나긴 수용생활에서 카미유는 도대체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병원과 수도원과 감옥을 섞어 놓은 듯한 이 단조로운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바로 ‘걷기’였다. 카미유는 방에서 걷기를 계속했다. 한밤중에도 불면증에 시달리며 방안을 걸어 다니는 모습은 간호사들을 놀라게 했다. 걷기는 수용생활과 허접한 음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카미유의 에너지를 발산시켜 주는 행위였다. 그녀는 정원과 오솔길을 산책하면서 아이처럼 즐거워했고 때론 현자처럼 여유로워했다. 자연을 산보함으로써 유년시절이라는 환상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벽난로가에서의 꿈’ 1898년, 이 조각이 마치 15년 후 몽드베르그에서의 카미유 자신의 운명(혹독한 추위에 지나치게 떨고 있는)을 예고하는 듯하다.
‘벽난로가에서의 꿈’ 1898년, 이 조각이 마치 15년 후 몽드베르그에서의 카미유 자신의 운명(혹독한 추위에 지나치게 떨고 있는)을 예고하는 듯하다.

카미유는 걷지 않으면 먹을거리 쇼핑을 했다. 가족이 보내주는 용돈으로 비스킷, 사탕, 계란을 사러 매점으로 향했다. 음식물을 구입하는 일은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엄마에게 자기를 빼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커피, 버터, 질 좋은 포도주와 치즈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그녀는 스스로 요리를 해먹었는데 그것은 로댕의 독살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의 표출이기도 했다. 로댕이 죽은 지 17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또한 카미유는 평상시에는 방문 앞 복도 혹은 여름이면 병동 입구 시원한 곳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곳에서 앉아 그녀는 혼자 말하고 미소 짓고 심지어 웃음을 터뜨렸다. 대부분의 시간은 조각상처럼 침묵하며 가만히 있었다.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환자와 간호사와 의사들과 알고 지내긴 했지만 그들과도 거리를 유지했다.

최악의 시련의 시기에도 카미유를 지탱시키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머감각이었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항상 신랄하고 톡톡 튀는 유머는 시들지 않는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이었다. 심지어 수용생활을 하던 가장 힘든 순간에도 가족에게 편지를 쓸 때면 자신의 처지에 관해 농담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편지는 언제나 균형 잡히고 논리적이며 명료했다. 망상의 증세가 심각할 때조차도 시공간의 개념을 결코 잃지 않았으며 언제나 일관성이 있었다. 카미유의 이런 지적 동력은 유년시절부터 지켜온 독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두 세계대전 사이 정신병원에서 하루 몇 명의 사망자가 나올 때에도 카미유가 건강한 체력과 강인한 기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걷기와 음식에 대한 취향 때문이었다. 이런 카미유가 30년 동안 한 점의 조각은 물론 스케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원장이나 간호사가 점토덩어리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카미유는 정신병자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이 창작할 공간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멀쩡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파리의 작업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추위가 극심하고 위생이 열악했던 수용생활을 30년이나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건강했던 것도, 그리고 그 속에서 단 한 점의 작품도 제작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카미유 자신의 강인한 의지 때문이었다. 카미유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본성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동생 폴은 “하늘이 그녀에게 부여해준 특별한 재능은 그녀의 불행을 자초하는 데 쓰였을 뿐”이라며 카미유의 인생을 완전한 실패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오히려 카미유의 미완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 아닐까.

유경희

홍익대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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