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몬스터’, 괴물이래요. 한 사람이 하기도 어려운 일들을 해버리고, 또 고지도(古地圖)에 미쳐 사는 모습이 꼭 괴물 같다는 뜻이래요.”

경희대 혜정박물관 김혜정 관장과 인터뷰 약속을 잡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기자가 처음 김 관장에게 연락을 했던 10월 18일 금요일에 김 관장은 일본에 있었다. 일본 시코쿠 지역 나오시마로 답사를 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김 관장은 강원도 정선으로 향했다. 수집하던 자료에 대한 정보를 얻고 돌아온 것은 10월 22일. 기자는 10월 23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경희대학교 중앙도서관 4층에 있는 혜정박물관 사무실에서 김혜정 관장을 처음 만났다.

김 관장의 사무실에는 각종 훈장이며 세계 곳곳에서 얻어온 선물과 기념품이 잔뜩 전시돼 있었다. “일주일에 며칠이나 떠나 있냐”고 물으니 “일주일에 몇 번이라고 딱히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고지도와 사료에 대한 정보만 얻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다닌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지도에 미친 사람’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느냐”고 묻자 “그게 사실인 걸요”라는 웃음 섞인 대답도 들을 수 있었다.

김혜정 관장을 괜히 ‘고지도에 미쳤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김 관장이 보유하고 있는 고지도는 최소 3000점, 수천 점에 이른다. “아직 수집 중인 데다가 정리와 분석이 끝나지 않은 지도도 많아 대개는 두루뭉술하게 수천 점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 김 관장의 말이다. 우리나라 지도뿐만이 아니다. 아시아 지도, 세계 지도가 다양하게 분포돼 있는데 김 관장의 소장품 중에는 11세기 무렵 남아메리카 아즈텍 지역의 가죽 지도도 포함돼 있다.

“우리는 흔히 지도가 세계 일주 등 탐험이 활발해진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도는 1만4000년 전, 문자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그려졌다고 해요.” 김혜정 관장은 지도가 단순히 지리적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을 담은 철학적 자료라고 설명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세계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그런 호기심의 시작이 바로 지도로 나타난 거지요. 그러니까 지도를 읽으면 그때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는지를 알 수 있어요.” 김혜정 관장은 사무실 한구석에 걸린 ‘프톨레마이오스 지도’ 사본을 가리켰다. “저 지도 귀퉁이에는 사람이 그려져 있잖아요. 각각 ‘물의 신’ ‘불의 신’ 등 신을 그린 거라고 해요.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만물의 이치가 신의 섭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거겠지요.”

김혜정 관장은 인터뷰 내내 ‘꿈’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지리 기술이 없던 시절에 특히 지도는 꿈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리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지도에는 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북반구를 위에, 남반구를 아래에 둔 지도를 접하지만 남반구를 위로 두어 거꾸로 뒤집힌 지도가 존재하는 것도 지도에 꿈을 담으려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읽어내는 것이 고지도를 수집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김 관장은 왜 고지도에 빠지게 됐을까. “옛 이야기는 잘 안 하는 편인데”라며 말끝을 흐리다가 김 관장은 “17세기 프랑스 고지도를 우연히 얻게 된 것이 계기”라고 밝혔다. “처음에는 ‘참, 지도가 예쁘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거기에 적힌 프랑스어가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책을 찾아보고, 당시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공부하다 보니, 또 다른 지도는 세계를 어떻게 그렸나 궁금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고지도 수집가의 길로 들어섰다.

원래 김혜정 관장은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재일동포 3세인 그의 아버지는 고마자와(駒澤)대 동양사학과 교수였다. “내 삶에서 아버지는 빼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칭찬을 받는 사람이 돼라’고 가르쳤거든요.” 김 관장의 아버지가 말한 칭찬은 주변 사람들의 칭찬뿐만이 아니었다. 사회의 필요한 부분에 손을 보태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아버지의 말을 김 관장이 실천하게 된 계기는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취임식. 김 관장은 민단 대표로 취임식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은 참 따뜻하더군요. 고향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은 나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면, 고향에 돌아온 이상 이제는 사회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다가 김 관장이 세운 것은 지체장애인 보호시설인 혜정원. 외할머니의 고향인 제주도에 있는 이 시설은 ‘사회의 어머니’가 되고자 한 김 관장의 뜻에 따라 1985년 문을 열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혜정원에서 상시 머무르는 장애인은 75명 정도. 이 중 45명은 24시간 돌봄서비스를 받는 장애인이다.

혜정박물관이 소장 중인 18세기 아시아 지도(왼쪽). 동해를 ‘MER ORIENTALE’(동방해) 혹은 ‘MER DE COREE’(조선해)로 표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오른쪽). 150년경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다. ⓒphoto 혜정박물관
혜정박물관이 소장 중인 18세기 아시아 지도(왼쪽). 동해를 ‘MER ORIENTALE’(동방해) 혹은 ‘MER DE COREE’(조선해)로 표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오른쪽). 150년경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다. ⓒphoto 혜정박물관

“꿈 하나를 이루고 나자 다른 꿈이 눈에 보였다”는 것이 김혜정 관장의 말이다. 그의 가장 큰 꿈 중 하나는 고지도를 수집하는 일. “고지도에는 종교가, 사상이, 지식이 들어 있어요. 고지도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과거에 대해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시대를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기초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어요. 저 역시도 지도를 모으면서 계속 자신을 연마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김혜정 관장은 고지도에서 관심사를 넓혔다. 몇 년 전부터 일본 황실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고지도에는 다들 동해를 ‘Sea of Corea’라고 표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전 세계적으로 동해를 우리나라 영해로 표기하는 지도는 30%도 안 된다고 해요.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혜정박물관에는 동해와 독도에 대한 전시실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그곳에는 1700년대 세계 지도에 표기된 ‘Sea of Corea’를 비롯해 몇백 년 전부터 동해가 우리 바다였다는 사실이 증거로 남아 있다. 김 관장이 생각하는 ‘역사 되찾기’의 첫걸음은 우리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일이다. 김 관장은 “우리나라는 중국, 몽골, 일본 삼국과 지배·피지배 관계를 이어갔어요. 왜 우리는 지배를 받았고, 그들은 왜 우리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게 역사를 되찾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다른 나라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은 사회에 봉사하려는 평소의 마음가짐과 맞물려 봉사활동의 영역을 외국으로 넓히기도 했다. 혜정박물관에서 10월 현재 특별 전시하고 있는 것은 몽골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회. 김 관장은 몽골 정부에서 받은 북극성훈장을 가리켰다. 북극성훈장은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이다. “몽골에도 고아원을 세웠거든요. 제가 몽골을 오가며 공부하면서 받은 것이 있다면 응당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어요.”

김혜정 관장은 2600㎡(800평) 넓이의 박물관에 있는 자료들을 일일이 해설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김 관장이 자부심을 가지는 전시관은 어린이전시실. “누구보다도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은 어린이들이죠. 특별한 지원이 없는데도 심혈을 기울여 어린이전시실을 만들었어요.” 퍼즐처럼 지도를 맞춰볼 수 있게 만든 전시물 하며, 예전 사람들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왜 동해가 우리 영해인지, 역사와 사상을 모두 교육할 수 있는 전시관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둔 어린이전시실을 찾는 어린이는 한 해 2000명 정도. 단체 견학 신청을 하면 누구나 와볼 수 있다.

수장고에 들어선 김혜정 관장은 “자료를 모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자료를 전시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실에 전시된 250여점의 지도를 제외하고 수천 점의 지도는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국가별, 시대별, 주제별로 정리된 수장고에서 김 관장은 “지도를 분류하는 방법은 아직 없기 때문에 이걸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만 해도 몇 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수장고 옆에는 김 관장이 개별적으로 관심을 가져 모은 고서(古書)가 수천 권 정리돼 있다. ‘몽골 민담’에서 시작해 우리 땅의 역사를 알려주는 책부터, 일본어·중국어로 쓰인 책까지. 김 관장은 “민속 사료를 통해서는 그 문화 사람들의 심리를 알 수 있다”며 자료를 소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김 관장은 지난 9월 28일부터 10월 6일까지 경기도 파주 ‘파주북소리 2013’ 축제에 참여해 파주 아시아 출판문화정보센터 1층 다목적홀에서 ‘고지도, 상상의 길을 걷다’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9월 30일 축제 현장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은 전시회장을 방문해 김혜정 관장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김 관장의 안내를 받아 전시품을 관람하던 박 대통령은 “혼자서 모으기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시다”는 덕담을 했다고 한다.

혜정박물관을 혼자서 운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김혜정 관장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가치만 해도 1000억엔(약 1조870억원)이 넘는다고 했다. 이 자료를 모으는 것에도 돈이 들었지만, 자료를 잘 전시하는 일이 자료 수집을 완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김 관장에게 박물관 운영비는 상당한 부담이다. “내가 지금 대학 도서관 위에서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대학 박물관에 대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아요. 사실 박물관이야말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공간이거든요. 나는 국가의 지원 여부와 관계 없이 제 꿈을 이루고, 다른 사람의 꿈을 찾아주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지만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꼭 얘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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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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