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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289호] 201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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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아버지는 북극성 같은 존재 가짜 그림 들고 오는 사람 많아 느낌으로 진위 알 수 있어”

박수근 탄생 100년, 딸이 말하는 내 아버지 박수근

조성관  편집위원 

▲ 미8군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왼쪽에서 두 번째). photo 박수근미술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는 데 짧은 생애를 바친 화가 박수근(朴壽根·1914~ 1965). 오는 2월 21일은 박수근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월 17일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린다.
   
   박수근의 그림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강변’ ‘빨래터’ ‘우물가’ ‘절구질하는 여인’ ‘애기 업은 소녀’ 등. 박수근의 그림을 볼 때마다 한국인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러나 기억 속에 애잔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1950~1960년대 도시와 농촌에서 흔히 보아온 풍경들. 그림의 주인공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어딘가 눈물이 나도록 정겹다. 한국인이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다.
   
   박수근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에서 생(生)을 받았다. 지금에야 양구 가까이까지 고속도로가 뚫려 2시간이면 가지만 불과 1980년대에도 양구는 첩첩산중이었다. 비포장도로를 꼬불꼬불 멀미가 날 정도로 5~6시간 버스를 타야만 했다. 하물며 일제강점기 시절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2013년 마지막 날이던 지난 12월 31일, 기자는 양구면 정림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을 찾아갔다. 양구면에 들어서자 담벼락 여기저기에 박수근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양구는 시인 이해인도 태(胎)를 묻었지만 시각적으로 박수근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먼저 다가왔다.
   
   강원도 산간의 미술관인데도 관람객들이 쉼 없이 찾아왔다. 현재 박수근미술관에서는 지난 10월 25일부터 소장품특별전 ‘소박한, 진실한, 선한, 일상, 마음, 시선’을 열고 있다. 특별전은 오는 2월 9일까지 계속된다. 특별전을 천천히 감상하노라면 화가의 내면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미술관 학예연구사 엄선미씨는 “탄생일에는 간단한 기념식을 하고 본행사는 작고 주기인 5월 3일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엄선미씨는 “박수근 화백이 살거나 흔적을 남겼던 창신동, 전농동, 신세계백화점, 용산 미8군 등 6곳에 플라크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수근은 부인 김복순과의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나 유년기를 넘긴 자녀는 2남2녀였다. 현재는 큰딸 인숙과 막내아들 성남이 생존해 있다. 인숙씨는 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이다.
   
   인숙씨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 미술교사를 거쳐 현재 인천에 살며 서양화가로 활동 중이다. 미술관에서 인숙씨와 통화를 했다. 그는 “마침 약속이 있어 서울에 올라와 있는데, 명동에서 잠깐 시간이 된다”고 했다. 기자는 양구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오후 7시 명동성당 앞에서 인숙씨를 만났다. 인숙씨가 건넨 명함에는 그림 한 점이 인쇄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박수근 화풍에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성당 앞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 박수근 화백 탄생 100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따님의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아버지 탄생 100년을 맞이하니까 아버지와 생활했던 시절의 그리움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고생만 했잖아요. 어머니도 아버지 내조를 하느라 고생만 하셨고요. 가난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심적으로 행복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가족을 모델로 그림도 그리고요. 비록 쌀밥은 못 먹었지만. 저는 지금도 누가 칼국수 사준다고 하면 안 먹어요.”
   
   - 그게 무슨 말인가요. “우리들은 그걸 ‘뚜더기국’이라고 했어요. 밀가루 반죽을 뜯어서 소금물에 넣어 끓여 먹는 거지요. 저는 어렸을 때 하도 뚜더기국을 많이 먹어서 지금도 누가 칼국수 사준다고 하면 안 먹어요. 그때 생각이 나서요.”
   
   - 참 가슴 아픈 추억이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간이 포근하고 정겨웠어요. 아버지는 자가용 한번 타보지 못하셨어요. 수세식 변소도 써본 일이 없어요. 옷도 남들이 입던 구호물자 같은 옷만 입으셨어요. 아버지께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은데, 그런 걸 못해 마음이 저려와요.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거든요.”
   
   알려진 대로 가난한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붓과 팔레트가 재산의 전부인 박수근이 이웃집 처녀 김복순과 결혼한 것은 1940년. 박수근이 1939년 김복순에 보낸 청혼 편지는 지금 읽어도 감동이다. 가난한 부부는 38도 이북에 있는 강원도 금성에서 신접 생활을 시작했다. 딸 인숙은 1944년 강원도 금성에서 났다. 인숙이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미술과 2학년 시절인 1965년에 아버지가 사망했다.
   
▲ 지난 12월 31일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박인숙씨.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 아버지와 보낸 시간 중 가장 잊지 못하는 장면은 어떤 건가요. “6·25전쟁이 났을 때 아버지가 금성에서 미술교사를 했어요. 아버지가 (인민군에) 잡히면 죽는다고 생각해 먼저 이남으로 내려가셨어요. 어머니는 38선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다 가족과 함께 극적으로 월남했어요. 수원의 수용소에서 지냈는데 어머니가 트럭에 몰래 숨어서 서울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때 군 장교로 있는 외삼촌이 지프를 보내줘 우리 가족 모두가 창신동 집으로 가 아버지와 재회를 했어요. 아버지와 저녁에 집에서 자는데,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꼭 껴안고 잤는지 숨을 못 쉴 정도였어요. 그땐 숨을 못 쉬어 답답하다고만 느꼈는데 내가 커보니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으면 그랬을까 생각이 돼요.”
   
   - 금성 시절 기억 남는 게 뭐가 있나요. “오빠하고 냇가에 갔었는데 냇가의 바위를 돌로 내리치면 바위 밑에서 메기 같은 물고기들이 막 뛰쳐나왔어요. 오빠와 그걸 잡으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오빠가 뇌염에 걸려 마루에서 쓰러졌던 장면도 기억 나요. 전쟁 중에는 방공호에서 숨어지내는 일이 많았어요. 남쪽에서 북한을 폭격할 때 논두렁 밑에 납작 엎드려서 피했던 기억이 납니다.”
   
   - 창신동 집과 전농동 집 중에서 어느 곳에 많은 추억이 있나요. “그야 창신동 집이죠. 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재회했는데 집이 없잖아요. 어떤 분이 창신동 집 한 칸을 지켜달라며 공짜로 내줬어요. 그 집에 살면서 아버지가 미군 PX에 다니며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버셨어요. 초상화를 그려 번 돈으로 집을 사셨고요. 옛날 동대문스케이트장 근처였어요. 아버지는 집만 봐도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행복하셨대요. 아버지는 하모니카를 참 잘 부셨어요.”
   
   전쟁은 끝났지만 대한민국은 황폐했다. 화가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박수근의 호구지책이었다. 이 시절 가난한 화가를 한 처녀가 지켜보았다. 이 처녀는 작가가 되어 소설 ‘나목’에서 그를 부활시켰다. 처녀는 박완서. 박수근은 작품 ‘나목’에서 ‘옥희도’로 등장한다.
   
   - ‘나목’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아버지가 체격은 좋으셨지만 말수가 없어셨어요. 하루에 세 마디만 하시는 경우도 있었대요. 그렇게 부끄러움을 타는 분이었대요. 박완서 선생님 소개로 거기서 일하셨대요. 책에 보면 두 분이 함께 산보도 하셨던 것 같아요. 박완서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와 인터뷰도 했어요. ‘나목’에 보면 아버지에게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두 분은 인간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박완서씨를 만났을 때 소감이 어땠나요. “참 대단하신 분인데 굉장히 소박하세요. 그때 아버지의 인간적인 매력과 능력을 꿰뚫어보신 거잖아요. 말도 유창하진 않지만 참 소박하게 정감 있게 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서양화가로 활동하지만 여전히 ‘박수근의 딸’로 불리는 점이 부담스럽지 않나요. “아버지의 그늘이 크다는 점은 인정하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훌륭한 화가잖아요. 제 그림도 더 발전하고 아버지만큼 훌륭하게 살아야 하는데 하는 점에서는 부담이 되기도 해요. 아버지의 심성도 닮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지요. 그림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어요. 정겨운 흙 같은, 고향의 노래 같은 점을 닮았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껴요. 아버지는 제게 북극성 같은 존재였어요. 힘들 때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많아요.”
   
   박수근의 작품 중에는 ‘나무와 두 여인’이 있다. 박수근미술관에는 이 작품 옆에 소설 ‘나목’의 한 대목을 옮겨놓았다.
   
   ‘…옥희도, 나는 홀연히 옥희도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 오늘 박수근미술관을 처음 가봤는데 지나치게 크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아, 그런가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군수님이 양구의 자랑인 아버지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기 위해 굉장한 열정을 갖고 아버지 마을을 조성한 것이죠. 저는 너무 좋거든요. 아버지의 품속이 넓은 것처럼 아버지의 삶을 통해 소박함과 사랑과 꿋꿋함을 보고 배우는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체험학습장도 있어야 하고 명상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잖아요. 양구에서 박수근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군수님이 정말 많이 노력하고 계세요.”
   
   2005년과 2008년 박수근의 대표작 ‘빨래터’가 진위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감정평가원의 진품 판정으로 논란은 수그러들었지만 이 논란은 그림이 재테크의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빚어진 슬픈 초상화였다.
   
   - 수년 전 대표작 ‘빨래터’의 위작 시비에 휘말렸을 때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SBS에서 그렇게 몰아갔잖아요? 참 가슴이 아팠어요. 그때 연예인들이 우울증 걸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심정을 이해했어요. 감정협회가 감정하는 것이어서 저는 일부러 끼어들려 하지 않았어요.”
   
▲ 박수근미술관 전경 photo 조성관

   - 이런 때는 ‘박수근의 자녀’라는 게 좋은 것만도 아니네요. “저한테 그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가 보면 다 가짜였어요. 6~8년 전이에요. 아버지 친구분이라면서 아버지한테 직접 선물받았다고 가져왔어요. 그런데 제가 보니까 가짜예요. 하지만 가짜라는 말은 못하고 느낌이 안 온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난감해 하더라고요. 그런 일이 많았어요. 몇 번 보아줬는데 상대가 낙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싫었어요. 그 후론 감정을 안 해요. 저한테 가져오는 거 다 가짜거든요.”
   
   - 화가가 감정 전문가는 아닌데, 어떻게 진위를 알 수 있나요. “안목이라기보단 느낌이지요.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오잖아요. 제가 창신동 집에서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던 것을 다 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보면 알죠. 총각 시절 그렸던 그림은 잘 모르지만.”
   
   - 유명화가의 딸이라는 게 이런 면도 있군요. “그럼요. 너무너무 괴로운 거예요. 지금 한 장당 몇억원씩 팔리잖아요. 그렇게 팔려도 유가족에게 좋은 건 하나도 없거든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더 불쌍해 보여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유가족 도와주겠다고 해서 유작전을 열어 다 팔렸지요.”
   
   - 개인적으로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나요. “‘애기 업은 소녀’예요. 저를 모델로 했으니까요. 제가 업은 애기는 인애 아니면 성민일 거예요. 두 동생은 전부 저세상 사람이 되었어요. 옛날엔 다 누나들이 그렇게 동생들을 키웠잖아요.”
   
   - 그 다음으로는 어떤 작품인가요. “그건 ‘절구질하는 여인’이지요. 그게 어머니를 모델로 한 겁니다. 홍라희 여사가 소장하고 있는데, 보면 어마어마해요. 직접 보면 ‘어머’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와요.”
   
   - 아버지의 그림을 몇 점이나 갖고 있나요. “제가 결혼할 때는 그림을 한 점도 못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머니한테 그림 한 점을 받았지요. 아주 오래전에 그 그림을 팔아 우리 식구가 일어서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지금은 한 점도 없어요.”
   
   - 인사아트센터에서 100년 특별전을 하는데요. 유족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시나요. “그림을 봐달라고 해서 한번 연구사님과 갔었습니다. 이호재 대표님이 큰 역할을 했다는 걸 느꼈어요. 외국에까지 가서 작품을 가져온다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동안 보지 못한 작품들이 나와 가슴이 떨리고 설렙니다. 인사아트센터에서는 다양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 가짜들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진위를 확인했나요. “제가 확실한 거는 점을 찍어줬어요. 느낌이 오는 거는 제가 표시를 해줬지요. 몇 개는 이상한 것도 있었지만 제가 뭐라고 할 순 없었지요. 그림이 다 오지 않아 나머지는 6일에 다시 보기로 했어요.”
   
   가난한 천재 화가의 전형은 박수근과 이중섭이다. 두 사람은 부부 금실이 좋기로 유명하다.
   
   - 어머니와 아버지가 금실이 좋았다는 얘기가 많은데 딸이 보기에는 어땠나요. “저는 어머니가 정말 훌륭하셨다고 봐요. 요즘 젊은 화가 부부들 사는 모습 보면 어머니처럼 내조하는 분이 드물어요. 그림 하나 팔리면 쌀을 몇 가마 사서 다락에 얹어 놓고 알뜰하게 살림을 했어요. 바가지를 긁는다든가 정신적으로 괴롭히면 그림이 안 되잖아요. 동덕여중 다닐 때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아버지가 화집을 들고 팔러 나가셨는데, 그 뒷모습이 지금도 가슴에 찡해요. 그래서 등록금을 마련했지요. 가끔 말다툼하신 적도 있는데 등록금이 없을 때 그러셨지요. 크리스마스 날 과자와 사탕을 사다놓으셨어요. 창신교회 성가대가 문 앞에 와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곤 했는데 우리 가족은 과자와 사탕을 나눠주며 행복해 했지요.”
   
   박수근은 화강암 같은 재질에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 그림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일반인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박수근은 이렇게 썼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쓰고 있다.’
   
   박수근미술관의 전시관 외벽이 바로 화강암 석재를 사용했다. 멀리서 보면 미술관이 곧 박수근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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