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명원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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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이 몰락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자유당은 10년 만에 400석의 집권당에서 현실 정치적으로 별 의미를 주지 못하는 죽어가는 정당(an irrelevant and dying party)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서울대 강원택 교수(정치학)가 얘기하는 영국 자유당의 몰락사는 거의 100년 전 남의 나라 일이지만 지금 우리 정치 현실에 던지는 메시지가 각별하다. 보수당과 함께 영국 정치의 양대 축을 이루던 자유당의 몰락사에 한국의 제1 야당인 민주당의 위기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영국 보수당과 권력을 겨루던, 150년 역사의 자유당은 어느 날 갑자기 신생 정당 노동당에 진보세력의 대안이라는 자리를 허용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20세기 정당사에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거론되는 자유당의 몰락은 정당이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혁신에 실패하면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교훈을 새삼 던진다.

최근 출간한 ‘정당은 어떻게 몰락하나?’라는 저서에서 자유당의 몰락사를 그린 강원택 교수가 전하는 메시지의 종착점은 ‘안철수 신당’의 돌풍에 휘말리고 있는 한국의 민주당이다. 강 교수는 저서에서 민주당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민주당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2008년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라는 책에서 영국 보수당의 끈질긴 생명력을 탐구한 강 교수는 “기본적으로 보수가 우세한 한국 사회에서 진보 정당이 유일한 생명선인 혁신을 놓아버리고 ‘월급쟁이 정당’ ‘동호회 수준의 정당’으로 떨어지면 자멸은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강 교수는 이번 저서의 머리글에서 “민주화 이후 지역주의와 단순다수제 선거제도라는 강력한 제도적 방어막 뒤에서 폐쇄적인 독과점 구조를 형성하며 기득권을 유지해 오고 있는 한국의 거대 정당들, 그 정당들이 유권자의 높은 불신과 혐오, 무관심 속에서도 과연 정치적 생명력을 끈질기게 이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며 “과거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한국 정치를 지켜보면서” 책을 쓴다고 밝혔다.

지난 1월 7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강 교수는 자유당의 몰락사를 앞에 놓고 민주당의 이례적인 위기부터 강조했다. “제1 야당의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야당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민주당은 2006년 지방선거 패배 이후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다 패배했습니다. 지금 박원순 서울시장이 민주당 소속이긴 하지만 2011년 보궐선거에선 무소속 후보였고, 박영선 민주당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지난 7년간 한번도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고 지금은 지지율까지 한 자릿수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민주당에서 별다른 위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문제입니다.”

강 교수의 지적대로 민주당은 연초부터 지지율 비상에 걸렸다. 안철수 신당을 가정한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예컨대 지난 1월 1일 발표된 SBS 여론조사에서는 8.9%, 서울신문 조사에서는 9.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반면 아직 출범하지도 않은 안철수 신당은 26~27%의 지지율을 나타냈다. 당 안팎에서 “드디어 (밑으로) 10%대를 뚫었다” “호남에서도 어르신들 말고는 다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는 한탄과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강 교수는 민주당이 분명 위기지만 아직도 ‘전통 야당의 저력’ ‘본전은 한다’는 안일함에 젖어있다고 지적했다. “아직도 민주당 구성원들은 대마불사 의식에 젖어있습니다. 호남에서 우리 말고 누가 있느냐, 안철수 신당이 해봤자 얼마나 하겠느냐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수도권과 호남을 합하면 최악의 경우에도 총선에서 80~100석의 본전은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안철수 신당이 최소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민주당 대안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면 민주당은 자유당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자유당을 밀어낸 노동당도 1900년 창당될 때는 노동조합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던 모임 정도였지 제대로 갖춰진 정당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918년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할 때까지 자유당의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겠다는 확실한 전략과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안철수 신당도 민주당의 대안세력이 되겠다는 1차적 목표는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유권자들에게 먹히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영국 자유당의 몰락 역시 역사와 저력을 감안하면 극적일 만큼 갑작스러운 사태였다는 것이 강 교수의 설명이다. 휘그파에서 배태된 자유당은 토리파에서 나온 보수당과 연원을 같이 하는 영국 정당정치의 뿌리였다. 1715년 영국 최초의 총리로 불리는 월폴(Walpole)을 배출했고 그레이(Grey), 글래드스턴(Gladstone), 애스퀴스(Asquith),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등 걸출한 지도자들을 통해 영국 정치를 이끌어왔다. 선거권 확대, 아일랜드의 독립, 상원의 개혁 등 시대적 흐름을 바꾼 핵심 개혁 정책들은 모두 자유당 정부 때 이뤄졌다. 1906년 총선에서 자유당은 157석을 차지한 보수당과 30석에 불과한 노동당을 누르고 400석의 압도적 승리로 집권당이 됐다. 이후 1차 대전 발발로 보수당과 전시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전까지 10년간 장기 집권했다. 1차 대전 발발 이전 치러진 세 차례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치러진 1924년 선거에서 극적인 몰락을 겪는다. 이 선거에서 자유당은 불과 40석을 얻어 419석을 차지한 보수당, 151석의 노동당에 완벽하게 패배했고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현재 자유당은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ic Party)으로 이름을 바꿔 존속하고는 있지만 보수·노동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유명무실한 존재가 돼 버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강 교수는 노동계급의 부상 등 사회구조적 변화가 불가피하게 자유당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기존의 해석에 반대한다. 사회구조적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한 유권자의 뜻과 시대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결과 자멸했다는 것이 더욱 타당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부상이 자연스럽게 자유당의 몰락과 노동당의 부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중요한 것은 자유당 내부에도 변화에 대응할 역량과 요소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로이드 조지로 대변되는 급진적 자유주의는 노동당이 제시했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유당은 변화를 외면했고 기득권에 안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수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애스퀴스와 로이드 조지가 극심하게 반목했고 당이 깨졌다가 다시 봉합하는 우여곡절도 겪었습니다. 자유당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로이드 조지가 중요한 시기에 당내 비주류로 있었다는 것도 불행입니다.”

로이드 조지의 급진 자유주의 대신 애스퀴스의 오래된 자유주의에 안주한 자유당은 몰락이 불가피했다는 설명이다. 그만큼 자유당을 둘러싼 시대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 중이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당시 영국은 귀족과 노동자들의 아이들이 1차 대전의 참호 속에서 처음 만났다는 말이 나올 만큼 전쟁을 치르며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며 “노동자의 정치 참여 요구가 거세지고 여성도 공장에 일하러 나가는 등 대중의 정치적 조직화가 급속하게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강 교수는 한국의 민주당을 둘러싼 정치 환경도 큰 틀에서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당이 그동안 발을 딛고 있던 정치적 가치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호남이라는 지역주의적 가치죠. 이건 영호남 간의 정치적 갈등이 중요한 균열구조로 있었을 때는 의미가 있었던 가치입니다. 경제개발에서 소외됐고 정치적 억압의 대상이었던 호남을 대변한다는 의미가 있었죠.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적 주변부로서의 호남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영호남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서울과 지방이라는 대립구도가 더 부각됐습니다. 수도권의 호남 출신 유권자와 호남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도 이젠 서로 다릅니다. 고향이 아니라 거주지역 중심으로 정치 행태가 바뀐 거죠. 또 하나 민주당이 표방했던 가치는 민주, 인권, 자유, 평화 같은 것들인데 이것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공고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젠 양극화와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해졌는데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이끌 정치적 상품을 민주당이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 교수는 “정치는 결국 새로운 가치를 던져줄 수 있느냐는 문제인데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지났지만 민주당은 자신들이 집권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며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이라면 대선에서 패배했더라도 뭔가가 남았어야 하는데 지금 민주당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지난 대선 때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박근혜 후보에게, 정치개혁은 안철수 후보에게 빼앗긴 민주당이 지금도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오히려 민주당은 오래된 자유주의에 안주한 자유당의 애스퀴스처럼 호남 기득권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비판이다. “의원들 각자로는 지역에서 경쟁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집권 대안세력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의원들은 각자도생하려고만 합니다. 나만 당선되면 된다는 생각만 했지 우리가 집권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럴 때 선거제도 개혁 등을 통해 호남에서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치세력에 더 공간을 열어주면 유권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텐데 똘똘 뭉쳐서 기득권에 안주하는 모습입니다. 새누리당 같은 보수 정당은 원래 그렇다 치고 변혁과 진보를 얘기해야 할 정당이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 교수에 따르면 자유당의 몰락 과정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의제설정(agenda-setting)의 중요성이라고 한다. 당시 자유당은 제국주의 전쟁인 1차 대전에 참가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당내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건 잘못 짚은 이슈였다. 강 교수는 “당시 사회의 변혁에 맞춰 자유당 내의 정치적 논쟁이 제국주의가 아니라 급진주의적 정책이나 강령, 나아가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는 문제를 두고 전개됐다면 자유당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도 강 교수는 ‘가치에 대한 논쟁이 실종된’ 민주당을 비판했다. “지금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은 가치에 대한 치열한 논쟁입니다. 자신들의 기반인 호남을 벗어날 건지, 성장과 복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건지, 양극화를 어떻게 해소할 건지 등 당의 정체성과 관련된 치열한 논쟁을 해야 하는데 이게 실종됐습니다. 이런 논쟁을 벌이면 당장은 분열로 비쳐지지만 정당 입장에서는 생산적인 가치가 남고 나아갈 길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은 이런 생산적인 가치를 낳기 위한 논쟁 대신 그냥 당권을 장악하기 위한 파벌 간 다툼만 남은 꼴입니다. 긴 안목에서 집권의 그랜드 플랜을 짜고 당의 체질을 변화시킬 리더십이 나와야 하는데 이게 없습니다. 김한길 대표 체제에서 일할 건 하고 타협할 건 타협하는 새로운 야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건 정치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적 문제, 일종의 스타일의 문제일 뿐입니다. 미래지향적인 가치라는 근원적인 고민이 빠져 있습니다.”

강 교수는 “지금의 민주당은 과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치열한 노선 다툼을 벌인 신민당보다도 활력이 떨어진다”며 “당시 신민당의 분란은 스타일이 거칠어서 그렇지 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진지한 고민이었다”고 강조했다.

자유당의 몰락 과정에서 보여지는 민주당과의 또 하나 공통점은 지도부의 분열이다. 자유당은 보수당과의 연립 여부를 놓고 당이 쪼개졌다가 합해지는 과정을 겪었다. 당이 봉합된 후에도 보수당에 가까운 자유당 국민파, 노동당에 협조적인 로이드 조지파, 그리고 노동당에 적대적인 그룹 등으로 분열돼 있었다. 지금의 민주당도 이미 열린우리당으로 쪼개졌다가 합해지는 분열과 갈등을 겪었고, 지금도 친노냐 아니냐는 계파 간 갈등이 여전하다. “열린우리당이 탄생할 때부터 민주당은 경고 사인을 받은 겁니다. 운동과 구분되지 않는 아마추어 정치, 이념 경도의 정치로 열린우리당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한번 이렇게 버림을 받은 입장에서는 치열하게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며 당을 확 뒤집으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민주당은 아무 해결책 없이 미봉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것도 문 후보가 집권하면 과거 열린우리당 시절과 무엇이 달라질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한 탓도 큽니다.”

강 교수는 “이번에 안철수당이 대안세력으로 조금이라도 비쳐지면 민주당은 2016년 총선에서 결정적 위기를 맞을 것”이라며 “민주당으로서는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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