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동해안 이미지. ⓒphoto 구글 어스
유라시아 동해안 이미지. ⓒphoto 구글 어스

한국인은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외부 세력의 침입에 언제나 시달려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으로 절반만 진실이다. 오른쪽 지도를 보자. 이 <지도>는 구글 어스로 지구 바깥에서 바라본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지역이다. 캄차카반도, 사할린섬, 쿠릴열도, 일본열도, 오키나와열도, 대만섬, 필리핀열도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연쇄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는 일본열도와 오키나와열도에 감싸인 두 개의 내해(內海) 사이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한반도는 육지에 접한 면보다 바다에 접한 면이 훨씬 넓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어느 시기까지 한반도의 주민들에게는 바다보다 육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생존을 위한 현명한 전략이었다. 왜냐하면 바다에서 유일하게 군사적·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인 일본은 발달되지 않은 항해 기술로 인해 한반도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대규모 공격을 할 수 없었던 반면, 발달된 기마 기술을 보유한 유라시아 동부 평원의 여러 세력을 저지하기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두 개의 천연 장애물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은 북쪽의 대륙 연접 부분에 군사력을 집중시키고 해안 방어는 소규모의 간헐적 침략을 대비할 정도에 그쳤다. 이러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하여 고려와 조선은 북쪽의 육지와 남쪽의 바다를 통해 한반도에 접근하는 세력을 효율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었다.

전략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이 한반도 국가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무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았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전근대에 유라시아 동부의 해안 지역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일본은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여러 형태로 한반도의 군사·정치적 움직임에 간여하려 하였으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그러한 시도는 좌절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라·당과, 백제·일본이 충돌한 663년의 백촌강 전투는 일본 세력이 대륙 진출에 좌절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한편 한반도에 통일 세력이 등장한 이후에는 일본 열도 서부에서 왜구(倭寇)라는 해적 집단이 등장하여 동중국해에서 활동하였으나, 이들은 북유럽 3국의 바이킹 세력들이 러시아, 노르망디, 시칠리 등 유럽 각지에 항구적인 정착지를 확보한 것과 같은 움직임을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 전개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것이 일본 열도의 세력이 대륙 진출에 좌절한 두 번째 사건이다.

1592~1598년의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일본 열도의 세력이 대륙 진출을 시도한 세 번째 사건이자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이 한반도 국가의 존속을 위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일본열도 내의 100년간의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기세를 몰아 한반도, 중국, 인도를 모두 정복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대항해시대’를 선도한 포르투갈·에스파냐 세력은 인도, 필리핀 등지에 이어 일본열도에서도 활발한 선교·식민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유럽 세력과의 이와 같은 상호 접촉 속에서 히데요시는 유럽 세력이 크리스트교 포교를 앞세워 일본열도를 지배하는 것을 저지하는 한편, 유럽 세력의 발달된 군사력과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그들의 세계관을 빌려왔다. 그리하여 중세 일본인이 생각하던 ‘전 세계’인 천축(天竺·인도), 진단(震旦·중국 및 한반도), 본조(本朝·일본)의 3개 지역을 모두 지배하려 했다. 여기서 당시 일본인들이 인도라고 믿은 것은 오늘날의 인도차이나반도로, 이 시기에 일본인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쪽 지역인 태국,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반도 등지에 거주하며 현지 세력과 정치·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대체로 겹치며, 1944년에 일본군이 인도를 침공한 것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 일본이 중세의 활동 영역을 뛰어넘었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중세 일본인에게 알려진 세계를 모두 정복하겠다는 초기의 목표가 조선·명의 대륙 세력에 의해 좌절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은 전쟁의 목표를 한반도의 분단과 남부 지역의 지배로 전환하였지만 그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일본열도의 세력이 대륙 진출에 좌절한 세 번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전까지의 두 번의 시도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조선·명이 해양 세력인 일본 세력에 대응하는 사이에 만주 지역에서 누르하치의 만주인이 흥기하였고 결국 한족의 명나라가 멸망하고 대만의 독립이 상실되는 100년간의 연쇄반응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또한 임진왜란의 실패로 인해 몰락한 도요토미 정권에 이어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인의 활동을 억제하고 포르투갈·에스파냐 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등 내향적인 정책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일본 세력은 소멸하였으며 이 지역에서는 오로지 포르투갈·에스파냐 이후의 유럽 세력과 중국 세력만이 외부 세력으로 남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중세까지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질서를 붕괴시킨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는 대륙의 한족 세력이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인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저지한 완충지이자, 해양 세력인 일본이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한반도는 한족 국가들과 북아시아 지역의 유목민·반(半)유목민들이 충돌할 때마다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이 두 세력 모두 한반도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구려와의 충돌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도 큰 피해를 입은 역사를 교훈 삼아 대륙의 한족은 한반도의 국가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한다는 생각을 선택지에서 제외하였다. 한반도의 한민족 역시 대륙의 한족 국가를 외교적으로 존중하면서 독립을 유지한다는 외교 전략을 수립하게 되었다. 한편 북아시아 지역의 유목민·반유목민들의 경우에는 대륙의 한족 국가들이 최종적인 목표였으며 한반도 지역은 군사적으로 약탈하고 외교적으로 견제할 대상이기는 해도 완전한 정복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한반도는 유라시아 동부라는 거대한 무대의 주변부였으며, 21세기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지정학적 요충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인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반도의 완전한 정복을 꾀하였으며, 대륙의 한족 세력은 해양의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로서 한반도를 이용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대두한 사건이었다. 몽골인의 원나라도 고려를 자국의 판도 내에 넣기는 했지만 다른 지역에서와는 달리 완전한 직할 지배는 하지 않고 느슨한 형태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이는 몽골인에 정복되기 전에 한반도 세력이 보여준 장기간의 저항이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은 임진왜란과 근대 이후 두 번에 걸쳐 한반도의 독립국가를 멸망시키고 직접 지배를 꾀하였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이, 역사상 일본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한반도를 침략한 한족(중국)과 현재 중국에 포섭된 지역에 거주하던 비한족 세력에 비해 일본을 더욱 증오하는 역사적 연원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이 대두하면서 한반도에 주어진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상황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반도에 고난만을 가져다준 것일까. 임진왜란 이전의 한반도 국가들은 압도적인 군사력(hard power)과 우월한 문화적 자원(soft power)을 지닌 한족 세력에 대해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한족 세력과 북아시아의 유목민·반유목민 세력 간에서 균형외교를 전개하려 한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양대 세력의 관계를 한반도 세력이 조정하는 등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질서 재편에 한반도 세력이 개입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통해 20여만의 대군을 바다 건너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그리고 내향적 외교로 조선과 안정적 관계를 유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의 일본이 등장하면서 한반도 세력은 대륙 세력과 교섭할 수 있는 카드를 갖게 되었다. 일본이 대두할 것이고 이는 장차 한반도의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사실을 신숙주가 예견했다는 사실을, 임진왜란 당시 조정을 책임진 류성룡은 전후에 집필한 회고록 ‘징비록’의 첫머리에 적고 있다. 신숙주가 예견하고 류성룡이 탄식한 것처럼, 일본이라는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질서를 주도하는 한 축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초기에 한반도 세력은 이들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데 실패하였다. 대륙 세력과의 교섭에서 일본이라는 해양 세력의 존재를 카드로 이용하는 것 역시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 초의 정묘·병자호란 때나 1910년의 강제병합 때에도 조선은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여 독립과 번영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실패했지만 가치 있었던 균형외교의 역사적 경험이, 1945년의 광복 이후 미국·일본 등 유라시아 동부의 해양 세력과 중국·러시아 등 여러 대륙 세력 간의 길항 관계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대한민국의 성장을 가능케 한 것이다.

2014년 현재 유라시아 동해안에서는 지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되었던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1945년의 패전 이후 군사·정치적으로 미국에 종속하는 대신 경제 일변도 정책을 펼칠 것을 국가의 나아갈 길로 설정한 바 있는 일본은, 이제 유라시아 동부에서 군사적으로도 미군을 보조하여 활동할 것을 미국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다.

최근 아베 신조의 일본이 취하고 있는 각종 움직임에 대해 한국의 일각에서는 100년 전 일본의 ‘군국주의적’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나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한·미·일의 삼각 동맹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미국이 한·일 간의 갈등에 대해 일본에 편드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일각의 바람 섞인 예측과는 달리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대한 미국의 일극 지배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거나 심지어 미국과 충돌한다는 시나리오는 비현실적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지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유명한 저서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American Primac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에서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정도의 군사력을 갖게 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며 중기적으로는 일본 또는 인도와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중국의 공격적 군사·외교 정책에 대해 일본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브레진스키의 이러한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필리핀이나 베트남과 같이 ‘대동아공영권’에 포섭된 경험을 지닌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국가들이 최근 일본의 움직임에 이해를 표명하는 것은, 일본의 군사적·정치적 변화가 일본의 일국적인 우경화가 아닌 미국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아가 유라시아 동해안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꾀하지 않는 미국이, 100년간의 치욕을 씻고자 애국주의적 대외 정책을 추진하는 중국보다 덜 위험하다는 인식 역시 이들 국가들은 공유하고 있다. 1992년에 미군을 자국에서 철수시킨 필리핀이 21세기 들어 다시금 미군과의 공조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 유라시아 동해안 지역의 현 정세를 상징한다. 현재 중국과 일본의 대립 상황을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일본이 주도하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한국 일각의 입장은, 유라시아 동해안 일대의 정치적 복잡성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고 한국과 일본이라는 선과 악의 대립으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단선적 움직임이다. 이러한 한국 일각의 민족주의적 관점에 대해 최근 들어 미국은 지속적으로 경고 신호를 던지고 있다. 지난해 말에 헤리티지 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남한은 종종 21세기의 중국과 북한보다 1930년대의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는 것 같다(Counterintuitively, South Korea often seems to be more fearful of 1930s Japan than 21st-century China and North Korea)”라고 비꼰 것이 미국의 입장을 상징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의 독립과 번영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국가를 굳이 들자면 그것은 일본이 아닌 중국이다. 위의 <지도>는 1982년에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사령관 류화칭(劉華淸)이 제시한 중국의 해양방어선인 ‘제1도련(第一島鏈·First island chain)’과 ‘제2도련(第二島鏈·Second island chain)’이다. 현재 중국 해군은 제1도련을 통과하여 제2도련까지 진출한 상태이다. 이 지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반도 전체가 이미 제1도련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개념적으로 한반도는 이미 중국의 내해(內海)에 포섭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이러한 군사전략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올해 초에 중국의 저명한 국제관계 연구가인 추수룽(楚樹龍) 칭화대(淸華大) 교수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과 미국은 한편으로는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복합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중국과 한·미·일은 상호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적 관계는 일시적인 군사적 갈등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중국에서 종종 발생하는 폭력적인 반일 시위와 일본 상품의 불매 운동은, 내부적 갈등을 외적으로 분출하는 동시에 대일 외교 카드를 확보하고자 하는 중국 측의 계산된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014년 현재 유라시아 동해안의 상황은 100년 전과는 전혀 다르며, 100년 전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한국 일각의 해석은 역사의 전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결과이다. 만약 굳이 현 상황과 유사한 역사적 시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19세기 말이 아니라 통일신라와 당나라, 헤이안 일본이 경제·문화적으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군사적으로 균형을 유지한 9세기일 것이다. 그러나 각 시대와 지역은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 시기의 역사가 후대에 반복된다는 발상은 학문이 아닌 종교에 속한 것이다.

근본적 문제는 미국이든 중국이든 어느 한 나라에 군사·정치·경제 등 모든 부문을 전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다. 유라시아 동해안의 국제적 동향을 무시하고 어느 한 나라에 종속되어 편안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과 해양 세력 사이에 자리한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복잡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힘들지만 자립되고 번영하는 세력으로 존재할 것인가. 2014년 현재 한국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한반도를 유라시아 동부의 진정한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시킨, 그리하여 한반도에 고난과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준 임진왜란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 역사를 움직인 원동력을 추적할 것이다. 연재 중에는 낯선 인명과 지명, 사건이 빈번하게 등장할 것이다. 이들은 필자가 학식을 자랑하기 위해 역사의 궁벽한 곳에서 애써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한국이 동아시아사를 중국 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놓치고 있는 것들이다. 그 누구보다도 세계를 염두에 두고 전략을 구상해야 하는 군인과 기업가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명·지명·사건을 언급했을 때 청중들이 당혹스러워하거나 심지어는 반발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경험했다. 이번 연재가 한국의 시민들이 세계를 복합적·다층적으로 바라보며 국가 전략을 구상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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