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의 정치학자로 평가받는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
일본 최고의 정치학자로 평가받는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

지난 6월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 인문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석근(53) 박사는 일본의 원로 정치사상사 연구자인 히로이시 나오아키(平石直昭·69) 도쿄대 명예교수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에는 히로이시 교수와 또 다른 일본의 원로 학자인 마쓰자와 히로아키(松澤弘陽·84) 홋카이도대 명예교수가 서명한 성명서가 첨부돼 있었다. ‘우리는 일본의 현 정권이 강행하는 자위대의 해외무력 행사 구상에 반대합니다’라는 성명서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현 정권이 강행하려고 하는 자위대의 해외 무력행사 용인 방침에 반대합니다. 현 정권이 성립하는 근거가 된 지난 총선거에서, 이 문제는 큰 쟁점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 두 정당 사이에 그 문제를 둘러싼 협의가 난항을 겪어왔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더 좋은 증거라 하겠습니다. 일본국 헌법이 의거하고 있는 민주주의 원리에서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습니다. 정치가는 국민의 신탁(信託)에 근거해 정치를 하는 공무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총선거에서 우리는, 자위대의 해외에서의 무력행사라는 문제에 대해서, 정치가에게 백지위임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정권이 신탁을 받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자의적인 결정을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와 헌법질서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중략)…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역사는, 그때그때의 정세에 대해 임기응변적인 대응을 거듭하면서 침략 확대의 길을 걸었으며, 안팎의 인사(人士)들에게 크고 많은 참화를 안겨주었으며 패전의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국 헌법 제9조의 평화주의는 그런 반성을 토대로,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전쟁 부정 결의를 표명했던 것입니다. 2차 대전 이후 70년 동안, 일본이 의거해온 온 그 원리를, 그 문제에 대해서 신탁을 받지도 않은 한 정권이 자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민주주의와 입헌주의 원리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라 생각합니다.’

김석근 박사는 친분이 있던 일본 원로학자들로부터 날아온 이 성명서를 한글로 번역해 자신이 아는 한국의 소장학자들에게도 배포했다. 이 성명서를 읽어본 학자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우리도 일본 원로학자들의 성명을 외면할 수 없다. 힘을 실어주자.” 이러한 반응은 지난 7월 24일부터 이틀간 열린 한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됐다. 아산정책연구원 주최로 열리는 ‘마루야마 마사오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원로학자들의 성명을 지지하는 별도의 성명서가 발표된다. 이 학술대회를 기획한 김석근 박사는 지난 7월 21일 기자와 만나 “일본 최고의 정치학자로 평가받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에게 직접 배우거나 그를 연구한 한·일 학자들이 모이는 것을 계기로 학회가 끝난 후 아베 정권을 비판한 일본 원로 학자들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석근 박사는 이어 “한국의 학자들은 학회 참석자 전원과 그 밖의 다수 소장학자들이 서명할 것으로 예상되며 학회 참석 일본 학자들에게는 본인들의 의사를 존중해 원하는 경우 성명서에 서명을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석근 박사에 따르면, 자신에게 이메일로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보내온 두 일본 원로학자도 마루야마 마사오로부터 직접 배운 제자들이라고 한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일본 측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직계 제자인 와타나베 히로시(호세이대학)를 비롯해 오쿠보 다케하루(게이오대학) 등 8명의 학자가, 한국 측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에게 배운 최상용 고려대 교수(전 주일대사), 김영작 국민대 교수 등 10여명의 학자가 참가한다. 정치학자로서 마루야마 마사오를 연구해온 이홍구 전 총리가 축사를 한다.

한·일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의 성명을 이끈 마루야마 마사오는 누구인가.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을 2차 대전 패망과 원폭, 피폭이라는 참사로 이끈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으로 명성을 얻은 학자다. 살아 있을 때 ‘학계의 텐노(天皇)’로 불리며 학계와 지식인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나는 마루야마 마사오 선생이 일본의 다양한 전문 분야의 지식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분야인 정치학 영역을 넘어 그만큼 일본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다. 서구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천착한 그는 일본 ‘자유민주주의의 기수’로도 불린다. 그는 냉전시대, 특히 일본에서 사회주의가 득세할 때도 좌와 우 양극단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으며 자유주의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등 그의 저술은 지금도 일본 정치학의 교과서로 쓰이며, 일본 바깥에서도 그의 저술은 전후 정치와 파시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힐 만큼 학문적으로도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김석근 박사에 따르면, 마루야마 마사오는 지금 일본에서 부활하고 있다. 김 박사는 “죽은 지 18년이 됐고 일본 지성계에서도 지나간 사람으로 받아들이던 마루야마 마사오가 최근 아베 정권의 폭주로 인해 되살아나고 있다”며 “군국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과 분석이 주목받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일본의 보수우파 진영으로부터는 ‘눈엣가시’로 여겨졌던 그를 회고하는 학술대회가 한국에서 열린 것에 대해 일본 극우파들은 주시하고 있다. 김석근 박사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한·일 학자들이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할지 모른다는 게 알려지면서 일본 보수우익들이 애용하는 사이트인 ‘2채널’에서 난리가 났다”며 “이번에 참석하는 일본 학자들에게 성명서 참여를 강권하지 않기로 한 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일본 학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고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서다”라고 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군국주의 비판은 ‘초(超)국가주의’ ‘무책임의 체계’ 등의 개념 규정에 담겨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근대국가가 서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기반 위에 자리 잡고 있다고 강조한다. 유럽의 근대국가는 중성(中性) 국가였다. 진리라든지 도덕과 같은 내용적 가치에 관해서는 국가가 중립적 입장을 취하며, 가치의 선택과 판단은 교회 같은 다른 사회 집단이나 개인의 양심에 맡기고, 국가 주권의 기초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법 기구 위에 두고 있다. 반면 일본의 근대국가는 보편적 윤리와 가치를 홀로 점유하는 존재였다. 일본의 자유민권론자들은 근대적 인격의 전제인 도덕의 내면화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주체적 자유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대결해야 할 전통적인 ‘충(忠)’과 ‘효(孝)’와 맞서지도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의 민권은 처음부터 국권을 수반했고, 결국 국권에 매몰돼 버렸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대표적 저작인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서 “제1회 제국의회의 소집을 눈앞에 두고서 ‘교육칙어’가 발표되었다는 것은 일본 국가가 윤리적 실체로서 가치 내용의 독점적 결정자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 것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고 썼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서는 국가질서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는 사적 영역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됐고 자유롭고 양심적인 인격체로서의 시민도 형성되지 못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에서 사적인 것은 곧 악이거나 악에 가까운 것으로서, 어느 정도의 꺼림칙함을 끊임없이 수반했다”고 지적했다.

정신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일본 국가주권은 그 내부에 내용적 정당성의 규준(規準)까지 갖고 있다는 것이 마루야마 마사오의 주장이다. 때문에 국가의 활동은 언제나 대의(大義)와 함께 존재하며 행동하는 것이 곧 정의로 간주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서 “국가가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행동하는 것이 곧 정의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긴 쪽이 좋다’는 이데올로기가 ‘정의는 이긴다’는 이데올로기와 미묘하게 교착되어 있는 점에 일본의 국가주의 논리의 특질이 드러나고 있다. 자체가 진선미의 극치인 일본제국은 본질적으로 악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포악한 행동도 어떠한 배신적인 행동도 허용되는 것이다!”고 썼다.

‘마루야마 마사오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기획한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센터장.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마루야마 마사오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기획한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센터장.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마루야마 마사오에 따르면 윤리와 가치를 독점하는 국가는 결국 천황이라는 존재로 수렴된다. 이에 대해 김석근 박사는 “일본 군국주의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일본의 건국신화부터 내려오는 독특한 구조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집단주의, 천황 중심주의가 있다는 게 마루야마 마사오의 견해”라고 했다. 결국 일본 초국가주의에서는 권위의 중심이며 도덕의 근원이기도 한 천황과의 거리가 모든 가치의 규준이 된다. 천황과의 거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수직으로 놓는 종축의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비극과 파탄이 드러난다는 것이 김석근 박사의 설명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강조한 ‘무책임의 체계’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군국주의를 떠받치는 국가 구조를 ‘미코시(神與) 메는 것’에 비유했다. 미코시란 마츠리(축제)에서 사용하는 신을 모셔온 가마로, 너무 커서 여러 사람이 함께 든다. 이렇게 모두가 모두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책임은 ‘모두의 책임’이 되고 결국 누구의 책임도 아니게 된다. 일본 지배층이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을 호도할 목적으로 만들어낸 ‘1억 총참회’라는 말은 그런 무책임의 심리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러한 일본 군국주의의 독특한 심리구조는 같은 파시즘 국가였던 독일과도 다르다고 지적한다. “나치의 지도자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그 원인이 어떻든 간에 개전(開戰)에의 결단에 관한 명백한 의식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그 정도의 큰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나야말로 전쟁을 일으켰노라는 의식이 지금까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무엇인가에 짓눌리면서 국가 전체를 전쟁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다는 이같은 놀라운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의 불행은, 과두세력에 의해서 국정이 좌우되고 있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과두세력이 사태에 대한 의식이나 자각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배였다.”(‘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김석근 박사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군국주의 비판의 요지를 설명하면서 “지금 아베가 폭주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도 60여년 전 마루야마 마사오가 분석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우려를 자아낸다”고 지적했다. “지금도 일본은 집단주의적인 분위기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헌법 9조 개정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한 양심적인 지식인과 건전한 시민이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한국에서 이들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김석근 박사는 “과거 일본의 지식인들이 한국이 민주화를 위해 독재와 싸울 때 힘을 실어주지 않았느냐”며 “이번에는 우리가 일본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일본의 양심 세력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분석에 매달린 것은 자신의 전쟁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사카에서 정치평론기자이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 때 도쿄로 옮겨 도쿄부립 제일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도쿄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37년 대학을 졸업한 후 1940년 법학부 조교수가 됐고 1942년부터 동양정치사상사 강의를 담당하는 등 학자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김석근 교수는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전부터 대학에서 서양정치사상 강의를 했지만 일본정치사상, 동양정치사상은 마루야마 마사오가 개척자”라고 했다.

그가 겪은 2차 대전의 비극은 1944년 7월에 시작됐다.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그에게 징병 통지가 날아온 것이다. 막 결혼해 신혼이었다.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로 징집당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시국에 비판적인 글을 발표한 것이 화근이 됐다고 얘기된다. 그는 ‘국가학회잡지’에 ‘근대 일본의 성립’이라는 특집 논문을 쓰던 것을 유서처럼 남기고 전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조선의 평양 신병훈련소에 입대했고, 이후 히로시마 육군선박사령부에 재입대해 암호교육을 받은 후 참모부 정보반에서 근무했다. 그가 종전을 맞은 곳도 히로시마다. 그는 원폭의 피해자다. 근무하던 곳이 원자폭탄 투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다행히 살아서 캠퍼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석근 박사에 따르면, 마루야마 마사오는 냉전시대를 살면서 자유주의자라는 쉽지 않은 길을 걸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고등학생 시절 ‘유물론 연구회’에 연루되어 경찰 조사를 받을 정도로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많이 했지만 1945년 이후 일본 군국주의 비판에 전념하면서도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를 경계했습니다. 오히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일본 대학가를 휩쓸던 전공투 극좌 학생들과 많이 부딪쳤습니다. 그들을 대놓고 야단쳤고 그로 인해 감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74년이 도쿄대 정년퇴임 해인데 학생들한테 시달리기 싫다며 1971년 조기 은퇴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일본 사상사 연구에 침잠했죠.”

외로운 길을 걸어서인지 마루야마 마사오는 매우 논쟁적인 인물이고, 여러 정치 분파들로부터 공격을 당해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를 근대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옹호하는 ‘근대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우익들은 그를 ‘일본 해체를 꿈꾸는 반일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에서의 ‘개인’과 ‘시민’: ‘주체’ 문제와 관련해서’라는 논문을 발표한 김석근 박사는 마루야마 마사오에게는 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서의 두 가지 면모가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1996년 마루야마 마사오가 죽자 NHK는 두 차례에 걸쳐 그에 대한 특집을 방송했는데, 그 제목이 ‘민주주의의 발견’ ‘영구혁명으로서의 민주주의’였다. 그만큼 마루야마 마사오는 민주주의자로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유주의자로서도 조명받았다. 영국의 타임스(The Times)는 그를 ‘급진적 자유주의자(radical liberalist)’로 규정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개인의 주체성 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고, 일본이 새롭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각 개인이 양심의 자유를 갖는 자유로운 인격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에게 개인은 ‘자립화된 개인’과 ‘민주화된 개인’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는 자립화된 개인이 자유의 이상을 지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민주화된 개인은 평등을 강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본 자유민주주의의 기수로 불리지만 학생운동과의 갈등 등을 겪으며 포퓰리즘, 다수주의 등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말년에 그는 순수한 자유주의자로 회귀한 듯합니다.”

김석근 박사에 따르면, 이번 마루야마 마사오 학술대회도 작년에 아산정책연구원이 기획한 ‘냉전시대를 산 자유주의자’ 시리즈의 일환이라고 한다. 이사야 벌린, 마이클 오크숏, 하이에크, 칼 포퍼, 한나 아렌트 등 냉전시대를 살아온 자유주의 사상가들을 다루는 저술출판과 학술대회를 기획하면서 이들 사상가들 중 한 명으로 마루야마 마사오를 포함시켰다고 한다. 이번 학술대회를 기획한 김석근 박사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국정치사상을 연구하면서 연구 방법론 등을 고민하다 일본 정치사상을 학문적으로 개척한 마루야마 마사오를 만났고, 이후 마루야마 마사오에 빠져들었다. 그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 도쿄대 법학부 정치학과에서 1년간 연구했고, 1990년대부터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일본의 사상’ ‘전중과 전후 사이’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충성과 반역’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 등 마루야마 마사오의 단행본 6권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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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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