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루쉰공원 매원 내의 ‘매헌’ .
상하이 루쉰공원 매원 내의 ‘매헌’ .

1년간 수리공사 끝에 지난 8월 말 다시 문을 연 상하이 루쉰(魯迅)공원 내 매원(梅園)을 10월 초에야 찾아갔다. 1922년에 ‘홍커우(虹口)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이 공원은 1988년에 지금의 루쉰공원으로 개명했고, 공원 내 녹지 공간을 더 넓히기 위해 1년간 공사 끝에 이번에 재개장했다. 개장하자마자 찾아가야 할 것을 이 날 저 날 미루다보니 개장 한 달이 더 지나서야 찾아보게 돼 윤봉길 의사에게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의사의 기념 사적이 있는 매원 입구에 이르렀을 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년 전 수리공사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왜 공원 내에 매원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만들어졌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원 전체를 재단장하면서 매원이 왜 매원인가를 매원 입구에 분명히 기록해 놓았다.

‘梅園

尹奉吉義士生平事迹陳列室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

Memorial Hall of Yoon Bong-gil’

중국어와 한국어, 그리고 영어로, 매원이라는 공간이 바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리기 위한 공간임을 분명히 밝히는 황동간판을 달아놓았다. 간판 아래쪽에는 대리석 석판에 다음과 같이 새긴 글귀를 중국어와 영어로 새겨 넣었다.

‘매원… 1994년에 건설됐다. 원내의 건축물(매헌)은 고려(高麗·영어로는 Korea로 표기) 풍격(風格)으로 지었고, 곳곳에 매화를 심었기 때문에 매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1998년에 원내에 기념 석비를 세워서 이곳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고인을 기렸다. 고인이 평화롭기를 기원한다.’

오솔길을 따라 100여m 들어가면 1998년에 세워 두었다는 석비가 보인다. 석비에는 중국어와 우리말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록해 놓았다.

“윤봉길 의거 현장(1932. 4. 29)… 윤봉길 생평 사적 소개… 윤봉길, 호 매헌(梅軒), 한국인,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에서 출생. 일찍이 항일 복국(復國·국권회복) 활동에 투신. 1920년 중국으로 유망(流亡·망명).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일본군들의 송호전역(淞滬戰役·일본이 상하이를 공격한 상하이사변) 승리 축하 열병대회에 숨어들어가 폭탄을 투척해서 일본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을 작폐(炸斃·터뜨려 죽임)시키고, 많은 일본 관원들에게 작상(炸傷)을 입혀 현장에서 체포됐다. 1932년 12월 19일 윤 의사는 일본 가네자와(金澤)에서 영용취의(英勇就義·용감한 영웅이 육신을 버리고 의를 향해 나아갔다는 뜻)했다.”

석비의 중국어 비명(碑銘)은 짧지만 명문이다. “시라카와 대장 등을 작폐시키고, 일본 관원들에게 작상을 입혔으며, …영용취의했다.” 작폐와 작상도 통쾌하지만 ‘영용취의(英勇就義)’라는 네 글자에 이르러서는 한국인이라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영웅이 육신을 버리시고 의로운 길로 나아가 의(義)의 화신(化身)이 되셨다.” 윤봉길 의사에게 이보다 더 위로가 되는 글귀가 있을 수 있을까.

석비 바로 뒤편에 아열대 상하이의 녹음이 우거진 한가운데 단아하게 서 있는 매헌 주위에는 지금은 철이 지나 꽃을 볼 수 없지만 윤봉길 의사의 뜨거운 조국애를 상징하는 홍매화를 둘러 심어 놓았다. 매헌은 가운데 난간 부분을 새로 깨끗하게 흰색 페인트칠을 해서 우리 민족을 떠올리게 해놓았다. 매헌 안에는 1층과 2층 전시실을 마련해 사진과 의거 당시 현장 상황도와 윤 의사의 영정을 모두 새롭고 선명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영정 앞에는 상하이 주재 한국 총영사(구상찬)가 가져다 놓은 난초 화분이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당시 말 그대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중국의 허리를 찌르고 들어가던 일본제국 군대의 기세를 꺾어놓았다. 윤 의사의 의거는 당시 항일전투를 파상적으로 전개하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홍군(紅軍·인민해방군의 전신)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마오쩌둥은 당시 상하이에서 항일 비밀공작 활동을 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확실히 파악했고, 임시정부가 윤 의사의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를 거쳐 충칭(重慶)까지 청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저우언라이를 통해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충칭에서 임시정부 청사 개관식을 할 때는 저우언라이가 공개적으로 참석했다는 기록도 있다.

윤봉길 의사가 스물네 살의 젊은 영웅으로 취의(就義)하신 지 13년 만에 대한민국은 일본의 패망으로 국권을 회복했으나, 남과 북으로 분단됐고, 윤 의사 취의 15년 만에 북한의 공격으로 한반도는 3년간의 전쟁에 돌입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면서 한국인들은 윤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매원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윤 의사 취의 60년 만인 1992년 마침내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매원에는 다시 한국인들의 발길이 닿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원을 관리하는 상하이시 당국은 다시 경제강국으로 일어난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해 매원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한 공간임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던가. 동아시아의 정세는 개혁개방 30여년 만에 빠른 경제 발전에 성공한 중국이 일본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형세로 변했고 그런 정세는 상하이시 당국이 루쉰공원의 매원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임을 분명히 밝히게 해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국경절(10월 1~7일) 연휴를 맞은 루쉰공원은 공원에 나와 이후인(二吼引·두 줄짜리 해금)을 연주하며 후취(滬曲·상하이 민요), 쿤취(崑曲·상하이 부근 쿤산지방 민요)를 부르고 즐거워하는 상하이 시민들로 가득했다. 재개장한 루쉰공원은 무료입장이기 때문에 이전 유료입장일 때보다 더 많은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하지만 공원 내 따로 울타리를 두른 매원만은 15위안(元·약 2600원)의 입장료를 받기 때문인지 비교적 조용한 공간이 유지되고 있다. 매원을 잘 보호하기 위해 따로 매원 입장료를 받게 한 상하이시 당국의 배려(?) 역시 우리는 고마워해야 할 듯싶다.

박승준

상하이 푸단대학 국제문제연구원 한반도연구소 방문교수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박승준 상하이 푸단대학 국제문제연구원 한반도연구소 방문교수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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