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보민
일러스트 김보민

# 사례 1 지적장애가 있는 8살 친딸을 두 차례 성폭행한 아버지가 항소심에서 감형받았다. 지난 11월 18일 대구고법 제1형사부(김현석 부장판사)는 미성년자 강간·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등의 혐의로 기소된 A(45)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의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7년과 80시간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재판부가 밝힌 감형 이유는 “딸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이다.

# 사례 2 15살 알바생을 성추행한 사장 B(44)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지난 11월 17일 서울고법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B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B씨가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B씨에게 부양해야 할 두 자녀가 있다는 점을 참작했다”고 밝혔다.

# 사례 3 13살 된 딸의 친구를 성폭행한 C(45)씨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지난 1월 18일 서울고법 형사9부(김주현 부장판사)는 “C씨가 동종 전과가 없고, A양의 법정대리인에게 5000만원을 주고 합의했다”고 감형 사유를 밝혔다.

사회를 들썩이게 한 성범죄 사건이 발생하고, 충격에 비해 약한 형벌이 논란이 되면서 최근 성범죄 양형 기준이 강화됐지만 성범죄 처벌 수위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특히 최근에는 항소심 등에서 감형받는 성범죄 가해자가 많다.

김혜정 영남대 산학협력단 연구원이 대검찰청의 의뢰를 받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성범죄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 비율은 66.5%로, 지난 2012년 43.6%에 비해 20%포인트 이상 늘어났다. 2012년에는 선고된 실형의 평균은 46.35개월, 약 4년을 못 미쳤다. 그러나 2014년 들어서는 선고된 징역형 평균이 33.09개월로 크게 줄었다. 선고된 집행유예 기간도 줄어들었다. 2012년에는 33.07개월이었는데, 2014년에 선고된 집행유예 평균은 28.09개월이었다. 전반적으로 선고된 형량이 낮아졌다.

성범죄 양형 기준은 2013년 6월 19일부터 개정됐는데, 이전에는 13세 이상 강간 사건의 경우 징역 1년6월~7년이던 것이 개정 기준으로는 2년6월~5년으로 강화됐다. 특히 13세 미만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범죄 양형이 크게 높아져 징역 6~13년에서 8~12년이 됐다. 그런데 지난 8월 한국여성변호사회가 여성가족부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 6월부터 올해 3월까지 1심 선고를 받은 전국 아동·청소년 대상 강간 및 준강간 혐의 피고인 169명의 사건을 조사한 결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피고인은 27명이나 됐다. 양형 기준이 낮아서 성범죄에 엄중한 선고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기준이 강화됐는데도 집행유예 선고를 받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양형 기준만의 문제가 아닌 셈이다.

지난해 대검찰청이 펴낸 양형 백서는, 성범죄의 경우 형을 깎아주는 감경 요인이 반복적으로 고려되면서 형량이 낮게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감형 사유로 가장 흔한 것이 ‘처벌 불원’, 즉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피해 보상에 대한 합의를 한 경우다. 여기에 피해자가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거나 ‘형사처벌 전력이 없다’는 이유가 가장 흔하게 고려됐다. 김혜정 연구원의 자료를 보면 처벌 불원으로 인해 감경된 경우는 42.2%, 형사처벌 전력이 없어 감경된 경우는 33.5%,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경우는 19.1%다.

신진희 성폭력피해자 국선전담 변호사는 “처벌 불원이란 피해자가 직접 재판정에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경우를 말한다”며 “대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피해에 대해 합의를 했을 때”라고 말했다. 만약 이상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합의가 이뤄진다면 감형을 고려해볼 만하다. 박철현 동의대 교수(경찰행정학과)는 “한계가 있지만 피해자와 가해자의 합의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면서 “피해자가 피해를 보상받기란 실질적으로 어려운데, 가해자를 통해 보상받음으로써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합의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방식대로 진행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구에 살다가 지난 3월 서울로 이사 온 한진숙(가명·25)씨는 가해자의 집요한 합의 요구에 시달리다가 도장을 찍었다. “가해자는 학교 선배였는데, 제가 성폭행으로 고소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나니 학교에서도 친구들을 통해 합의를 시도하더군요. 친한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사람 인생 망칠 일이 있느냐’ ‘직접 만나서 반성하고 사과하고 싶다고 한다’라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연락이 왔어요.” 연락해 오는 거야 무시하면 되지만, 한씨의 부모가 힘들어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일을 키우지 마라’고 몇 번 말씀하시는데 그냥 원하는 대로 합의해주고 접근금지 조건을 걸어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결국 그 가해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신진희 변호사는 이처럼 합의에 의한 처벌 불원의 경우 피해자의 진짜 의도와는 상관없이 감형되는 경우가 상당수라는 점을 지적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다는 가해자까지 엄격한 처벌을 받을 수는 없지요. 더욱 중요한 것은 합의가 뭔지도 잘 모르는 13세 미만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문제입니다.”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특성상 피해 사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고,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에 어른의 개입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신 변호사는 “특히 부양 능력이 없거나 친부모가 아닌 보호자 밑에서 자란 피해자는 아동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보호자의 결정으로만 합의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 ‘2차 피해’까지도 우려할 만하다는 지적이다.

동종 전과가 없으면 긍정적 감경 요소로 고려하는 것 또한 최근에 와서는 비판받는 부분이다. 황일호 중앙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자의 82.2%, 아동 성폭력 범죄자의 78.6%가 동종 전과가 없다. 강도나 상해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각각 68.7%, 63.1%가 동종 전과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즉 동종 전과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성범죄의 흉악성을 덜어주는 얘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황일호 교수는 “성폭력 범죄가 재범률이 높은 범죄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만큼 재범 여부가 감경 요소로 고려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고 재판부가 감형을 결정하는 것도 비판의 대상이다. 박철현 교수는 “판사에게 과도한 재량을 주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진지한 반성이라는 부분은 결국 판사가 피의자가 재판정에서 갖춘 태도, 하는 발언 등으로 판단하는 것인데 이 부분의 진정성은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신진희 변호사는 “진지하게 범죄에 대해 반성하는 사람에게까지 엄벌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형벌의 목적은 교화에 있는 만큼, 반성을 하고 있다면 충분히 감경 요소로 생각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반성이라는 부분은 재판부가 임의로 결정할 부분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그 ‘반성’이 와 닿는가를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소심으로 가면 감형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문제로 꼽히기도 한다. 2012년 김희정 당시 의원(새누리당)이 주관한 ‘성범죄 양형 기준 과연 적절한가’라는 세미나에서 조석영 당시 대검찰청 검찰 연구관은 “관대한 형 선고 경향의 가장 큰 원인은 항소심에서의 ‘형 감경’ 관행”이라고 비판했다. 항소심은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 선고된 사건 이외의 사건에 대해서는 항소심이 최종심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1심 판결에 대해 항소심에서 형을 감경해주는 관행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조석영 당시 연구관의 말이다. 실제로 항소심에서 형을 감형받은 사건은 많다. 지난해 9월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가수 고영욱도 항소심에서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징역 2년6월로 감형받았다.

무엇보다 피해자와 피해자가 입은 피해를 중심으로 형량을 결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관행적으로 감형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진희 변호사는 꾸준히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불러오는 ‘공탁 제도’를 그 예로 들었다. 공탁이란 형사사건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와 합의하려 하지 않을 때, 가해자가 최후의 수단으로 일정 금액을 법원에 납부해 최소한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제도인데 대개 형량을 감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신진희 변호사는 “그런데 피해자가 전혀 바라지도 않는데 공탁을 했다는 이유로 감형돼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공탁금을 걸면서 편법으로 알게 된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합의를 시도하는 데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별거 중인 아내를 유인해 강제로 손과 발을 묶고 성폭행한 남편에 대해 ‘죄질이 불량하다’면서도 ‘법률상 부부인 점, 피해자를 위해 금원을 공탁한 점’ 등을 고려해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결이 대표적인 사례다. 신 변호사는 “성범죄의 형량이 낮고, 감형 사유가 주관적이라는 부분은 ‘법 감정’이나 엄벌주의 문제를 떠나서 피해와 범죄의 심각성에 맞는 판결을 하는지의 문제”라면서 “무엇보다 성범죄의 형량 선고에도 피해자 중심주의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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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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