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판사 펭귄북 로고
영국 출판사 펭귄북 로고

책과 출판사가 정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영국 출판사 펭귄북(Penguin Books)은 보여준다. 붉은색에 가까운 오렌지색 바탕에 세로로 선 타원형 원 안에 하얀 배를 내밀고 서 있는 까만 펭귄 로고는 세계인이 알아본다. 바로 이 로고를 회사 상징으로 쓰는 펭귄북이 창립 80주년을 맞았다. 이 펭귄북이 영국에서 갖는 위상은 이 말 한마디로 정리된다. ‘영국 날씨가 영국인을 만들었다면 펭귄북은 영국인의 머리를 채웠다.’

1935년 창립 이후 지난 80년간 영국인 중에 펭귄북을 한 권이라도 안 산 사람이나 안 읽은 사람이 있다면 정말 놀라울 일이다. 펭귄출판사 말로는 영국에서 책 32권이 팔리면 그중 하나가 펭귄클래식이다. 3%가 조금 넘는다는 말이다.(영국인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한다.) 명성과 비교하면 많은 수는 아니다. 그러나 고전문학으로 가면 비율은 확연하게 커진다. 영국 학생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때 특히 고전을 배울 때는 ‘반드시’라고 해야 할 만큼 펭귄클래식으로 공부를 한다. 펭귄클래식은 세계적으로도 매일 2만권이 팔린다. 그만큼 고전문학에 대한 펭귄클래식의 영향력은 크다.

한 출판사가 영국인의 머리를 채웠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영향을 어떻게 미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한번 풀어 보자. 한마디로 말하면 펭귄북은 ‘보급판 문고(paperback)’를 만들어 사업도 성공했을 뿐 아니라 영국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펭귄북이 창립된 1935년경 영국에서는 좋은 책을 읽으려면 돈이 아주 많든지 아니면 도서관 출입증이 있어야 했다. 그만큼 책값이 비쌌다. 당시는 모든 책이 양장본(hardcover)이어서 사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도서관 출입증도 당시에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컨트리클럽 회원증을 받듯이 신청을 한 뒤 한참을 기다려서 인터뷰를 한 뒤에야 가질 수 있었다. 인터뷰까지 가기도 엄청 어려웠을 뿐 아니라 도서관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정도의 인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 지방에서 존경받을 만한 신분이 되어야 출입증을 받을 수 있었다. 영국박물관에 있는 영국국립도서관 열람실 벽에 붙은 과거 출입증 소지자 명단을 보면 모두가 당대 상류층이거나 명사, 지식인이었다. 소위 말해 일반인에게 책은 그림의 떡이었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당시 책은 사치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호사품이었다. 많은 숫자를 인쇄하지 않아 기본 가격도 비쌌지만 거의 양장본으로 장정해서 더 고가가 되었다. 책 한 권을 구하면 돌려서 읽고 빌려서 읽었다. 당시 평균 한 집에 책이 10권 이하였다는 통계도 있다. 그래서 일반인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에 속했다. 물론 저렴한 책들이 있긴 했지만 책의 내용은 물론 장정, 활자, 인쇄마저도 형편없어서 막상 읽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영국을 펭귄북이 바꾸어 놓았다. 누구나 책을 부담 없이 사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가히 혁명 같은 일을 펭귄북이 했다. 펭귄북은 ‘보들리 해드’라는 출판사의 이사였던 알렌 레인이 영국 데본 지방에 살던 영국 추리소설의 대가 애거사 크리스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탄생했다. 알렌이 엑시터역에서 책을 하나 사서 기차 안에서 읽으려고 보니까 잡지와 빅토리아 시대 때 소설 재판(再版)밖에 없었다. ‘쓸 만한 소설을 일반인이 손쉽게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출판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갔다. 세상을 뒤집는 ‘보급판 문고’의 아이디어가 여기서 나왔다.

알렌은 그런 보급판 문고를 전통적인 서점뿐만이 아니라 기차역이나 동네 구멍가게 혹은 울워스 같은 대형 연쇄점에서 판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렇게 해서 펭귄북이 탄생했고 지난 80년간 펭귄북은 영국 출판업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도서출판에 새 세상을 열었다.

당시 여러 가지가 펭귄북의 성공 요인으로 같이 작용했다. 펭귄북의 상징인 ‘펭귄’ 로고 채택에서부터 책 표지 디자인, 책 판매 방식, 도서 선정까지 모든 것이 기여를 했다. 특히 알렌은 자신들 회사 상징을 뭘로 할까 상당히 고민했다고 한다. ‘위엄이 있으나 동시에 경쾌해야 한다(dignified but flippant)’는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 맞는 로고 상징을 찾다가 자신의 건너편 칸막이 너머에 있던 여비서가 펭귄을 제시해 로고로 결정했다고 한다.

알렌 레인은 전통적인 서점뿐만이 아니라 기차역 대합실 편의점, 신문가판대에서까지 책 판매를 하게 했다. 알렌 레인은 심지어 런던의 가장 번잡한 차링크로스역에 책 판매 기계를 설치해 펭귄북을 팔았다. 사람들은 이를 ‘펭귄큐베이터(Penguincubator)’라고 불렀다. 따지고 보면 전자책 판매를 빼면 현대의 책 판매 방식이 여기서 크게 더 나가지도 않았다.

당시 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이미 보급판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알렌은 책 표지를 글자로만 장식하고 크기도 양복 상의 양옆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남자 상의 양옆 주머니는 원래 크기가 세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책의 가로세로 비율도 황금비율로 맞추었다. 동시에 책의 내용을 색깔로 표시해서 독자가 선택하기 쉽게 만들었다. 오렌지색은 소설, 푸른색은 전기, 초록색은 범죄물 같은 식이다. 첫 시리즈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모로아,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나왔다.

보급판 가격을 당시 담배 한 갑인 6펜스(현재 파운드로 1파운드10펜스. 현재 영국 담배는 정부 정책으로 제일 비싼 담배 한 갑에 무려 1만6000원이나 한다)로 맞춘 점도 성공의 이유였다. 첫 해에 무려 300만권을 팔았다. 당시로는 정말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이런 성공을 업고 비소설류 인문서를 펠리칸시리즈로, 아동 도서를 퍼핀시리즈로, 전통고전을 펭귄클래식(현재까지 2600종 출간)으로 출판했다. 펭귄 셰익스피어시리즈도 나왔다.

펠리칸시리즈를 비롯해 펭귄북시리즈는 배움에 목말라 있던 영국인에게 ‘재가학교(在家學校·home schooling)’ 역할을 했다. 제대로 된 공식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당시대의 많은 사람들, 특히 독학자들은 인문지식에 목말라 있었다. 그들에게 펠리칸시리즈는 교범과 같았다. 1969년에 영국에서 시작된 ‘오픈 유니버시티(Open University)’의 전형이었다. 실제로 펠리칸시리즈는 1945년 신생 정당이던 노동당이 당시 다수당이던 보수와 자유당을 제치고 정권을 잡는 데 아주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동자의 눈을 열게 해주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고 노동운동을 하게 했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1960~1970년대의 정치, 성(性) 같은 각 방면의 자유주의 물결의 물꼬를 펭귄시리즈가 텄다고까지 말한다. 극작가이자 당시 펭귄의 편집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톰슨은 “우리는 정말 우리가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도 했다. 온 나라를 교육해서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흥분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펠리칸시리즈라는 이름이 나온 연유는 런던 킹스크로스역 가게에 서 있던 알렌이 “거기 있는 펠리칸 책 하나 주세요”라는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시리즈 작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펭귄을 잘못 발음한 데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펠리칸시리즈는 향후 50년간 인문·과학·예술 등의 비소설 분야의 책 3000종을 발행했는데 이미 발행된 책의 보급판 문고였다. 아주 멋지고 세련되게 디자인되었고 특히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와 두께였다. 도합 2억5000만권이 팔렸다. 이 시리즈는 권당 보통 5만권을 발행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요즘 인문책들은 어디나 초판 2000권 이상을 찍지 않는 데 비하면 정말 엄청난 숫자이다. 펠리칸시리즈는 대중적으로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계속해서 잘 팔렸다. 가장 전설적인 예로 회자되는 것이 ‘히타이트 1952년 연구서’이다. 이는 고대 아나톨리아 사람들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진지한 전문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팔렸다. 요즘 같으면 몇 권을 팔았을까.

당시 영국의 분위기는 흡사 200년 전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 시대 같은 분위기였다. 국민이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 대중의 욕구를 펭귄북이 시의적절하게 잘 맞추어 준 것이다. 알렌이 내세운 ‘싸고 좋은 책(good books cheap)’ 전술은 상업적 선견지명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적이기도 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지식이 특권계급의 전유물이 아닐 때 민주주의가 비로소 개화를 한다는 의미에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굳이 혁명이나 정치 혹은 사회운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펭귄북은 잘 보여줬다.

어떻게 한 개인의 영감(inspiration·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다)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이렇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참 놀랍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심지어는 ‘영국을 영원히 바꾼 요인이 BBC, 복지국가, 그래머스쿨(사립학교 수준의 공립학교), 그리고 펠리칸북 시리즈’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다. 알렌은 사업을 통해 돈도 벌고 사회도 개혁시키고 정말 ‘도랑 치고 가재 잡고’의 표본을 보여 주었다.

지난 2월 펭귄북이 새로 선보인 ‘리틀 블랙 클래식’ 시리즈. 64쪽 분량, 권당 80펜스의 미니 문고판이다.
지난 2월 펭귄북이 새로 선보인 ‘리틀 블랙 클래식’ 시리즈. 64쪽 분량, 권당 80펜스의 미니 문고판이다.

펭귄북의 역사상 책 한 권으로 올린 가장 큰 성공은 1960년 당시로는 금서로 분류되어 있던 D. 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무삭제 출판이다. 당시에는 출판물 풍속단속법이 엄연히 살아 있어서 출판을 하면 분명 제재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렌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출판을 강행했다. 법정으로까지 가겠다는 승부수를 띄웠다. 물론 출판 전에 저명한 변호사들과 상의하고 심지어는 언론인들에게도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통보하고 협조를 부탁하는 주도면밀한 작전을 폈다. 결국 법정까지 가서 승소를 했다. 이 사건은 영국 출판 자유의 분수령 같은 재판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모험으로 펭귄북은 더 할 수 없는 상을 받게 된다. 이 책은 6개월 사이 200만권이 팔린다. 펭귄출판사의 그 전년도 매출의 3분의 2를 이 책 한 권이 올렸다. 이 소설책은 350만권이 팔린다. 펭귄출판사는 그 다음해 회사를 주식 시장에 상장하는데 주식을 사겠다는 사람들의 주문량이 상장주식보다 150배가 많았다.

펭귄북은 2012년 ‘펭귄 쇼트 프로그램’이라는 디지털 출판 프로젝트를 시도한 적이 있다.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아주 상징적인 시도여서 아직도 여운이 남아있고 미래 출판의 방향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전자책을 출판했는데 아주 짧은 내용들이고 가격은 1.99파운드였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문고판으로 일종의 싱글 레코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짧고 독특한 에세이나 시사적인 논평 그리고 단편소설이 이런 디지털 문고판 포맷으로 시도되었다. 그전까지는 책으로는 발행될 수 없었던 내용들이었다. 보통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책은 도저히 독자들의 관심이 살아 있는 시간 내에 출판을 할 수가 없다는 게 상식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풍자지 ‘샤를르 에브도’ 테러 사건이 일어나면 저자에게 집필을 의뢰해도 몇 달이 걸린다. 편집을 해서 출판을 할 때까지는 빨라도 5~6개월, 보통은 1년이 걸린다. 그때는 이미 독자들의 관심이 최근에 일어난 다른 사건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TV, 인터넷 매체 심지어는 신문이나 잡지와도 책은 경쟁이 안 된다. 이러한 난관을 출판업계가 타개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펭귄의 ‘쇼트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랜덤하우스 출판사도 ‘스토리 커트(StoryCut)’, 판 맥밀란 출판사도 ‘쇼트 리드(Short Read)’라는 비슷한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대개 30쪽 이하의 팸플릿 수준의 디지털 출간물이었다. 디지털 문고의 제작 기간은 보통 3~4주이다. 내용도 짧고 포맷도 거의 정해져 있고 편집도 디지털 방식이어서 시간이 오래 걸릴 이유가 없다. 원고가 들어오면 1~2주 만에 디지털 책이 나온다. 당시 이런 디지털 문고판의 가격은 50펜스부터 2파운드39펜스까지 다양했다.

이에 대해 펭귄은 “이런 시도가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펭귄의 원래 철학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고 말했다. 창업자 알렌이 살아 있었다면 먼저 서둘러서 시도했을 것이라고 했다. ‘좋은 내용의 책을 싼 가격에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으로’라는 게 알렌의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2년 전에 태동을 했던 문고판 전자책이 최근 다른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종이책으로 돌아온 것이다. 펭귄북이 창업 80주년을 맞아 작고 가벼운 사이즈의 문고판 80권을 만들어 지난 2월부터 80펜스에 판매하고 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페이지 수는 80쪽이 아니고 64쪽이다. 비록 64쪽이지만 축약판이 아니다. 이름하여 ‘리틀 블랙 클래식(Little Black Classic)’ 시리즈다. 또 다른 형태의 문고판이자 음악계의 싱글 같은 종이책이다. ‘펭귄 쇼트 프로그램’이 책으로 부활한 셈이다. 책은 제인 오스틴의 ‘아름다운 카산드라’, 찰스 디킨스의 ‘그레이트 윙글버리의 결투’, 존 키츠의 ‘성 아그네스의 저녁’, 일본 13세기 시인 겐코의 ‘벚꽃나무 밑에서 청주 한 잔’ 등을 포함해 80권이 출간되었다. 그중에는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쓴 서간문 모음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도 들어 있다. 페르시아·러시아·그리스·중국·아라비아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독자가 그동안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내용들을 모아서 작게 출판했다. 펭귄의 고전시리즈를 상징하는 블랙 표지 디자인이다. 이를 일러 한 기자는 “모든 여인들의 로망인 타이트한 블랙 드레스를 본뜬 것이다”라는 평까지 했다.

담배 한 갑 가격으로 거의 10권을 살 수 있다. 책 한 권이 64쪽이니 10권이면 640쪽짜리 책을 사는 셈이다. 문고판으로서는 사실 그렇게 싼 것은 아니지만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판형이라 기대가 크다. 더욱이 지금까지는 책의 형식으로 출판할 수 없었던 내용들을 모았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단편집 속에 숨어 있던 단편 하나(찰스 디킨스의 첫 책이자 단편집인 ‘보즈의 스케치’에 들어 있던 ‘그레이트 윙글버리의 결투’), 단독 책 발간이 불가능했을 길이(모차르트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영국 독자가 이런 책이 아니면 도저히 접해 보지 못할 내용(겐코의 ‘벚꽃나무 밑에서 청주 한 잔’) 같은 것들을 모았기에 의의가 있다. 저녁에 퇴근하고 들어가다가 한 권 사서 읽다 보면 집에 도착할 때쯤 다 읽고 가족들에게 던져 줄 수 있는 분량이고 가격이다. 영국 커피 한 잔은 3~4파운드이니 커피 한 잔 값에도 못 미친다. 주요 신문 값보다도 더 싸다. 책의 패스트푸드화라 할 만하다.

펭귄북의 80주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역사가 오래된 출판사도 많다. 그런데도 펭귄북 80주년이 각광을 받는 이유는 그만큼 영국인이 펭귄북을 사랑해서다. 펭귄북의 주인이 영국인이 아니라 독일 회사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영국인에게 펭귄북은 영원한 영국 책이다. 그래서 펭귄에 관한 기사도 많이 나온다. 최근에는 펭귄북, 특히 펭귄클래식 책 표지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들이 나오는 것을 두고 ‘펭귄을 너무 착취하는 것 아니냐’는 시비성 기사까지 나왔다.

영국인에게 펭귄클래식 표지는 정말 사랑받는 대상이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 표지가 불러일으키는 향수와 같다고 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펭귄클래식 표지로 만든 상품이 나와 있는데, 이를 보고 전통주의자들은 펭귄클래식을 격하시킨다고 난리다. 가만히 보면 펭귄클래식 표지를 활용한 상품들은 모두 펭귄클래식의 용도와 너무 잘 맞는 것들이다. 손가방, 머그잔, 티타월, 선탠용 접는 의자다. 뭔가 감이 잡히는가. 모두 펭귄클래식을 읽을 때 필요한 물건들이다. 영국인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에 필요한 물건들이라 할 수 있다. 일요일 오후 부엌에는 할머니와 며느리가 늦은 점심을 준비하고 있고 아들은 응접실에서 한숨과 환호를 번갈아 내쉬며 축구를 보고 있다. 손자손녀들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노는 정원 한귀퉁이에서 할아버지는 밀짚모자에 선글라스를 쓰고 휴대용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한 채 선탠을 하면서 펭귄클래식을 읽는다. 물론 그 옆 티테이블의 티타월 위에는 머그잔에 잉글리시티 한 잔이 들어 있다. 기가 막힌 조화가 아닌가. 더 이상 펭귄클래식과의 어떤 조화를 만들어낼 건가?

펭귄북의 창시자인 알렌에 대해 ‘보기보다는 지적이지 못하다’고 전기작가들은 썼다. 책 편집자도 아니고 출판인이 반드시 지식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냥 선견지명이 있고 승부사 기질을 가진 장사꾼이면 되는 것 아닌가. 이번에 출판된 리틀 블랙 클래식 시리즈를 보면서도 마찬가지 생각이 들었다. 펭귄은 먼지 묻은 재산을 털어 포장만 달리 해서 새로운 형태의 책을 내놓았다. 원가도 별로 안 들여 수익도 창출하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도 알리니 일거양득이다. 더군다나 이 시리즈는 이미 저자 판권이 아주 오래전에 없어져 누구에게도 원고료나 판권료를 줄 필요가 없다. 후배들도 창업자의 정신과 수완을 잘 물려받은 셈이다. 새로운 형태의 이 책을 정말 ‘블랙 리틀 드레스’ 말고는 잘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 표현을 만들어낸 기자는 기사 말미에 이렇게 썼다. ‘매끈하고(sleek), 세련되고(chic), 멋지고(classy), 본질적이고(essentially), 아름답고(beautifully), 겸손하게(understatedly) 섹시하다.’ 어떻게 한 물체, 특히 책을 놓고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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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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