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중앙총부
원불교 중앙총부

서울 용산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연결되는 호남고속철 KTX가 지난 4월 2일 개통했다. 2시간37분 걸렸던 이 구간을 빠르면 1시간33분 만에 갈 수 있다. KTX 정차역 가운데 눈여겨보아야 할 여행지가 전북 익산이다. 익산 하면 먼저 떠오르는 여행지는 미륵사지다. 익산시 금마면 한가운데 솟은 미륵산 자락 아래에 자리한다. 신라 땅으로 가 섬섬옥수 선화공주를 데려왔던 백제 사내 무왕이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점에 지은 절이다.

시인 신동엽은 서사시 ‘금강’에서 미륵사에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준다.

‘어느날/ 선화는/ 미륵산 아래/ 산책하다/ 미륵불 캤다.// 땅에서/ 머리만 내놓은/ 미륵부처님의/ 돌,// 마동왕의 손가락/ 이끌고 다시 가보았다./ 안개./ 비단 무지개,// 백성들이 모여/ 합장,/ 묵념.// 그들은/ 35년의 세월/ 머리에 돌 이고/ 염불 외며/ 농한기/ 3만평의 땅에/ 미륵사,/ 미륵탑, 세웠다.’

백제의 고결한 웅지를 집약한 이 절을 두고 훗날의 역사는 ‘동양 최대 최고’라는 수식어로 치장한다. ‘삼국유사’에는 ‘전각 탑 회랑을 각각 3개씩 세우고 그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고 적혀 있다. 2000개가 넘는 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미륵사탑은 목탑 양식으로 쌓은 최초의 석탑이었고 이 땅에서 가장 컸다. 조선 중기의 지리서인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미륵사 탑이 매우 크고 동방 석탑 중 최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륵사지로 대표되는 백제의 유적지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익산. 하지만 익산에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근대건축물이 여럿 남아있다. 근대를 주제로 여행을 떠날 때 이웃한 군산 못지않은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땅이 익산이다. 익산으로 떠나는 근대문화여행의 가장 첫걸음을 놓아야 할 곳이 화산 천주교회다. 나바위 성지 또는 나바위 성당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나바위라는 이름은 화산 끝자락에 위치한 너른 바위에서 유래했다.

나바위 성당은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정면에서 보면 벽돌로 만들어진 영락없는 서양식 교회다. 수직으로 솟은 첨탑을 기준으로 아치형 입구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건물 측면을 보면 건물의 모양이 바뀐다.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올렸다. 처마 아래로는 툇마루를 개조해 만든 회랑이 이어진다. 뒤쪽에서 보면 엄연한 팔작지붕의 한옥 건물이다.

1906년 처음 지어질 당시, 나바위 성당은 흙벽과 마룻바닥, 기와지붕과 나무로 만든 종탑이 선 순한옥 목조건물이었다. 1916년까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한옥과 양옥의 형태가 뒤섞였고 이 독특한 양식 때문에 지난 1987년 7월 국가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110여년 전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 건물 안에는 남녀가 따로 앉던 의자와 청(淸)나라 건설 기술자들이 와서 남긴 팔각 창문 등이 남아 있다. 본당 옆의 사제관도 벽돌조에 한식 기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티끌만 한 위세나 권위도 없는, 지극히 소박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몸을 감싼다. 내부에는 공간을 가르는 8개의 목조 기둥이 있는데, 이는 남녀유별의 관습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 소 제대의 감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목뼈)가 봉안되어 있다. 창도 이채롭다.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한지의 수묵 그림을 댔다. 성당 분위기가 한층 그윽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바위 성당
나바위 성당

외양도 외양이지만 성당이 이 자리에 들어선 의미가 걸음을 더 붙잡는다. 1845년 10월 12일 밤 8시, 금강의 물길을 타고 배 한 척이 들어선다. 중국에서 출발한 라파엘호다. 배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신부,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조선인 신자 11명과 함께 올라 있었다. 그들은 황산포 포졸들의 눈을 피해 화산의 나바위에 상륙한다. 11개월 후, 1846년 9월 김대건 신부는 참수되었고 1897년 화산 아래 나바위 부락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나바위 성당에서 멀지 않은 성당면 두동리에는 1929년에 세워진 두동교회가 있다. 한옥으로 지어진 ‘ㄱ’ 자형 교회로 김제의 금산교회와 더불어 국내에 두 곳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지은 이유는 남녀 신도가 따로 앉아서 설교자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남녀가 모두 잘 보이는 곳에 강대를 놓은 것이 눈에 띈다. 성당 앞 마당에는 나무로 쌓아올린 종탑의 모습도 그대로 간직돼 있다.

두동교회에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1923년 마을에는 대지주인 박재신이 살았다. 대를 이을 아이가 없던 그는 고심 끝에 아내를 교회에 다니도록 허락했다. ‘교회에 다니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한 아내는 거짓말처럼 아이를 가졌고 박재신은 창고를 신도들에게 예배장소로 개방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그만 죽고 만다. 게다가 집의 어른까지 세상을 떠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집안의 소작농들이 어른의 상여가 나가는 출상일에 상여를 메지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화가 난 박재신은 소작농들을 내쫓고 예배당으로 쓰던 창고를 도로 빼앗아버렸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태안에서 출발한 소나무를 가득 실은 뗏목이 폭풍에 밀려 가까운 성당포구로 떠내려온 것이다. 뗏목이 난파했다는 소식에 서둘러 내려온 뗏목 주인은 나무를 다시 가져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결국 소작농들에게 헐값으로 나무를 팔았다. 그 나무로 지은 것이 바로 두동교회다.

호소카와 주택
호소카와 주택

익옥수리조합
익옥수리조합

일제강점기 이후 익산은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번성한다. 익산이기 전, 이리였던 마을은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호남평야에서 곡식을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1907년에 전군도로를 개설하며 쑥쑥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14년, 이리를 연결지점으로 호남선 철도가 놓이면서 만경강 유역의 한촌은 근대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익산을 상징하는 건물이 구(舊)익옥수리조합 건물이다. 1930년 지어진 이 건물은 익산과 옥구군의 농장 지주들이 농지를 관리하고 쌀 생산량을 늘리고자 창설한 익옥수리조합의 사무소였다. 나중에 1996년까지 전북농지개량조합의 청사로 사용되다 지금은 익산문화재단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창문과 창문 사이에 벽돌로 치장 쌓기를 한 것이라든지, 테두리보의 벽면을 붉은 벽돌로 쌓은 것 등은 현재 건축기법과 다르다고 한다. 독특하면서도 정교한 장식 역시 당시의 수준 높은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건축의장 및 기술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익산 시내에서 나와 만경강을 따라가면 춘포라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을 다니다 보면 유난히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경영했던 농장들이 밀집되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여러 집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가옥은 호소카와 주택이다. 등록문화재 제211호. 당시 조선에 진출한 가장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이었던 호소카와 농장의 농업기술자였던 에토라는 사람이 1940년경 지은 것이다. 호소카와 농장의 주인이었던 대지주 호소카와 모리다치(細川護立)는 일본 귀족원 의원이며 고향인 구마모토현의 후작이었다. 그는 1904년 조선에 진출해 당시 돈으로 15만원을 투자, 1909년경 850보 정도의 토지를 소유했다고 한다. 그는 1920년대 말에는 3000보가 넘는 대토지를 소유하게 된다.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1993~1994년 재임)가 그의 손자다.

춘포역
춘포역

당시 이런 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주변에 관리해야 할 농지가 많았으며 많은 소출을 내기 위해 물관리를 잘해야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익산 주현동과 김제 죽산의 하시모토 농장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한 한국 근대 농업 수탈의 역사를 증언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호소카와 주택에서 5분 거리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이 남아 있다. 1914년에 세워진 춘포역이다. 등록문화재 제210호. 동익산역과 삼례역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역인데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2007년경 전라선 이설로 인해 자동적으로 폐역처리됐다. 춘포역은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이름이 ‘대장(大場)역’이었다. 일본식 지명인 ‘대장촌리(大場村里)’에서 유래한 것인데 1996년 익산시의 일제 잔재 청산 명목으로 조선시대 이름인 ‘춘포(春浦)리’라는 이름을 되찾으면서 역명도 춘포역으로 바뀌었다.

이름을 다시 달았지만 채 2년도 안 돼서 폐역이 된 춘포역. 다행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차역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철거는 면했다. 소규모 철도역사의 건축양식과 슬레이트를 얹은 맞배지붕 형식의 목조 건물이 가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역사는 전형적인 간이역 건물이다. 지어질 당시를 감안하면 일본식 역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더욱이 여객보다는 이 일대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으로 수송하는 게 주 역할이었으니 말이다.

익산 근대문화여행의 마무리는 익산 시내에 자리한 원불교 중앙총부다. 원불교의 산역사를 느낄 수 있는 순례지이자 한식과 일식이 혼합된 1920년대의 다양한 근대건축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종사의 거처로 지어진 금강원·대종사뿐만 아니라 2대 정산 종사, 3대 대산 종사가 열반한 종법실, 집회소였던 공회당, 대종사의 집필장소였던 송대 등이 모두 일본식 주택건축 영향을 받은 목조 구조의 개량 한옥들이다. 벚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수목이 어울려 있어 봄산책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기타 여행정보

왕궁면에선 일몰을 황등면에선 비빔밥을

서울 용산역에서 익산행 KTX를 탈 수 있다. 자동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 고속도로나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익산IC로 나오면 된다. 익산은 경주와 공주, 부여와 함께 한국의 4대 고도(古都)다. 특별법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왕궁, 왕릉, 사찰, 산성이라는 고도의 4대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뜻이다. 왕궁이 들어섰던 자리는 왕궁면 왕궁리에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무왕은 그의 땅에 궁을 짓고 정사를 폈다. 왕궁리 오층석탑이 남아있다. 두동교회와 가까운 성당포구 마을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세곡을 관장하던 성당창이 있던 곳이다. 한때 쌀 600석을 실을 수 있는 배 60척 이상이 정박할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물안개와 낙조가 풍광을 이루는 한적한 강변 마을이다. 일몰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여산면도 들러보자. 지금이야 쇠락한 작은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 왕비를 잇달아 냈고, 목포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던 길목이기도 했다. 여산 동헌 앞의 ‘백지사(白紙死)’는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도들을 포박해 눕힌 뒤 한지를 얼굴에 올려놓고 그 위에 물을 뿌려 질식시켜 처형했던 곳. 22명의 천주교 신도가 목숨을 잃었다. 백지사터는 그 시신들이 버려졌던 곳이다. 가까운 천호성지에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 황등면의 황등비빔밥은 익산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한때 우시장까지 있었다던 황등시장은 위세를 잃었지만, 비빔밥집은 성업 중이다. 황등비빔밥은 밥을 살짝 비벼 고기국물에 토렴을 한 뒤 그릇을 데워 수분을 말리고 육회를 얹어 내는 게 특징이다. 한일식당(063-856-4471), 진미식당(063-856-4422), 시장비빔밥(063-858-6051)이 맛집으로 꼽힌다. 기본 찬과 더불어 선짓국을 곁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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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여행작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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