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1층은 지하철과 버스, 2층은 자전거와 보행자가 다니도록 설계돼 있다.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1층은 지하철과 버스, 2층은 자전거와 보행자가 다니도록 설계돼 있다.

미국 뉴욕시의 브루클린이 새롭게 와닿았던 것은 지난 4월 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2016년 대통령 선거본부로 브루클린을 최종 결정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힐러리 클린턴 선거본부의 정확한 주소는 브루클린 하이츠 피에르폰트 플라자 1번지(1 Pierrepont Plaza in Brooklyn Heights). 이곳의 건물 두 개층을 쓴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브루클린이라는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브루클린은 ‘쿨(Cool)’의 상징이라는 데 많은 미국인이 공감한다. ‘여피 힙스터(Yuppie Hipsters)’는 브루클린의 대명사다. 고급스러운 환경에서 일하는 도시의 고소득자를 가리키는 말로, 특히 유행에 민감한 스타일리스트란 의미를 담고 있다. 문화적·경제적·사회적 차원에서 브루클린은 특별한 브랜드로 인식된다. 맨해튼의 소호(Soho)를 쿨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브루클린과 비교하면 세상 돌아가는 속도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 21세기 뉴욕, 아니 미국의 첨단은 브루클린에 있다. 1960년대 히피의 요람이었던 서부 샌프란시스코를 뛰어넘는, 시대를 리드하는 전위(前衛)들이 요즘 모여드는 곳이 브루클린이다.

정치 성향으로 볼 때도 브루클린 주민의 70%는 민주당을 지지해왔다. 공화당 지지자는 10%대에 그친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에 처음 도전했던 2008년, 힐러리의 선거본부는 워싱턴에 있었다. 2016년 대권을 노리는 힐러리의 기반은 정치의 도시 워싱턴이 아니라, 쿨한 청춘들이 모여드는 브루클린이다.

지난 4월 뉴스를 접한 뒤 힐러리의 선거본부를 직접 보고 싶었다. 브루클린을 선거본부로 선택한 ‘감각’을 재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갔다. 힐러리의 선거본부는 공산당 건물을 연상케 하는 우중충한 브루클린 공립도서관 근처에 들어서 있다. 일요일에 간 탓이겠지만, 선거본부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건물 앞 곳곳에 반(反)힐러리 데모대가 남긴 선전물이 흩어져 있었다. 브루클린 선거본부 뉴스가 나온 직후부터 힐러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거의 매일 출근하면서 힐러리 반대를 외치고 있다고 한다. 놀랍게도 선거본부 앞에는 한국인과 관계가 깊은 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이다. ‘전쟁에 참전한 모두에게 영광을’이란 문구가 공원 입구 돌판에 새겨져 있다. 공원은 위치상으로 볼 때 힐러리 선거본부의 참모들이 점심식사를 마친 뒤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보였다. 한국전쟁은 이제 한국인에게조차 잊혀져 가는 과거사이지만, 2016년 선거를 준비하는 힐러리의 참모들은 이곳에서 한국전을 자주 되새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엄스버그 다리 인근 브루클린 거리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홍콩의 액션스타 브루스 리 그림.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브루클린과 차이나타운을 연결한다. 브루스 리, 즉 이소룡은 뉴욕 젊은이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다.
윌리엄스버그 다리 인근 브루클린 거리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홍콩의 액션스타 브루스 리 그림.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브루클린과 차이나타운을 연결한다. 브루스 리, 즉 이소룡은 뉴욕 젊은이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다.

힐러리 선거본부 앞에는 브루클린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통해 브루클린은 맨해튼으로 이어진다. 브루클린 다리는 브루클린과 맨해튼의 중간을 흐르는 이스트 리버(East River) 위에 걸쳐진 3개의 다리 중 하나다. 1883년 완공된,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길고도 긴 역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브루클린 다리는 세 개의 다리 중 특별히 사랑받는다. 1977년 개봉된 영화 ‘애니 홀(Annie Hall)’에도 나온다. 영화 속에서 우디 앨런이 다이안 키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소가 브루클린 다리다. 다리 위에서 행하는 고백이란 점에서 낭만적이라 볼 수 있지만, 우디 앨런은 영화에서 성(性)적인 열망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우디 앨런스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그것이 당시에는 브루클린의 이미지에 맞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같은 생각은 21세기 브루클린 청년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다. “우디 앨런의 브루클린 다리는 20세기 얘기다. 21세기는 그린(Green)과 자전거로 무장한 윌리엄스버그 다리의 시대다.”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50년간 살아온 미국인 친구가 브루클린을 찾은 나에게 내뱉은 말이다. 브루클린 다리에 대해 향수를 갖고 있다면 과거형 인간, 윌리엄스버그 다리에 대해 특별한 정감을 갖고 있다면 미래형 인간이란 의미다. “차이를 알고 싶다면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걸어보면 될 것이다. 자동차는 잠시 놓아두고 운동한다 생각하고 두 발로 직접 경험해보면 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친구는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걸어볼 것을 권했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또 다른 다리다. 브루클린·윌리엄스버그·맨해튼 다리를 통틀어 뉴요커들은 ‘스리 브리지(Three Bridges)’라고 부른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로 향했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그동안 자동차로만 달려봤다. 눈에는 익숙한 다리다. 브루클린 다리는 우디 앨런을 흉내 내 몇 번 걸어다녀 봤지만,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도보로는 미개척지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맨해튼의 차이나타운과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 거리를 연결한다. 길이는 2200m. 보행은 브루클린 쪽에서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보행자용 도로의 입구가 자동차 전용도로와 별도로 설치돼 있다. 사방팔방이 낙서투성이지만, 입구에서부터 브루클린 특유의 쿨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연분홍색으로 칠해진 철망이 보행자용 도로의 안전장치다.

브루클린 거리의 시인. 돈을 주면 즉석에서 시를 써준다.
브루클린 거리의 시인. 돈을 주면 즉석에서 시를 써준다.

한국에서는 다리 위의 인도가 자동차 도로의 액세서리쯤으로 보인다. 자동차 도로의 양쪽에 설치된, 한두 사람이 겨우 걸어갈 정도의 좁은 ‘통로’다. 서울에서 한강 다리 위를 걸어가는 사람을 쉽게 보기는 어렵다. 늦은 밤 한강 다리 위로 걸어가면 누군가가 나타나 “다시 생각하길 바란다”라는 말을 던질 듯하다. 27개에 이른다는 한강 다리지만, 마음 편히 도보용으로 걸어다닐 만한 곳이 드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운전을 하다가 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보면 “차비가 없어 저러나, 아님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라며 궁금해하기 십상이다.

뉴욕의 경우 이상할 정도로 다리 위를 걷는 사람이 많다. 다리를 걸으려고 작정을 하고 나온 보행족도 많다. 이유는 보행자 전용도로가 특별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자동차 1차선 너비 이상의 보행자용 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윌리엄스버그 다리의 경우 아예 보행자용과 자동차용 도로가 2층 구조로 나눠져 있다. 1층이 자동차와 전철, 2층이 보행자 전용도로다. 자동차와 전철의 소음은 엄청나지만, 안심할 수 있는 보행자 천국이다. 2층 보행자 전용도로는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과 보행자 도로가 완전히 분리돼 있다. 가운데가 뻥 뚫어진 길 좌우 양쪽으로 자전거가 다닌다. 윌리엄스버그 다리 아래를 흐르는 이스트리버는 말이 강이지 사실상 바다다.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소금물이 흐르는 곳이다. 항상 바닷바람을 느끼면서 걸어갈 수 있다. 오후 늦게 가면 석양의 맨해튼 풍경을 즐기면서 천천히 걸어갈 수 있다.

브루클린 거리의 표지판이 온갖 낙서와 광고전단으로 도배돼 있다. 전위적인 미술작품 같은 느낌이다. 일본어와 중국어도 보인다.
브루클린 거리의 표지판이 온갖 낙서와 광고전단으로 도배돼 있다. 전위적인 미술작품 같은 느낌이다. 일본어와 중국어도 보인다.

윌리엄스버그 다리가 ‘21세기형 다리’라는 친구의 말은 다리에 다가서면서 이미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다리에 들어서기 전에 만난 수많은 자전거 판매점과 수리점 때문이었다. 선진국 대도시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자전거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곳이 21세기 뉴욕이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포르쉐와 같은 자동차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적어도 브루클린에서는 한물간 사고다. 브루클린 청년들의 관심은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다. ‘얼마나 가볍고 단단하며 안전한 자전거인가’라는 것이 브루클린 ‘여피 힙스터’들의 최대 관심사다. 땀을 흘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친환경적인 탈 것이 21세기 청년문화의 가치이자 원칙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전거 전용도로를 가진 윌리엄스버그 다리에는 고만고만한 자전거들만 다니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1000달러는 넘을 듯한 ‘쿨’한 자전거들이 수시로 보였다. 씨티은행이 제공하는 뉴욕시민 전용 회원제 무료 대여 자전거도 보였지만, 티타늄을 소재로 한 북구산의 고급 자전거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커피는 자전거와 더불어 21세기 청년문화의 새로운 가치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나만의 원두와 제조법에 기초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커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도 그런 젊은 커피 매니아들의 천국이다. 다리 인근에 보통 식사 한 끼보다 더 비싼 커피를 파는 개성 만점의 커피점들이 들어서 있다. 스타벅스와 같은 커피 체인점이 아니라 커피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운영하는 점포들이다. 커피에 관해 워낙 까다롭게 굴기 때문에 스타벅스와 같은 체인점들이 고전을 하는 곳이 브루클린이다.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본부를 둔 커피점 ‘블루 보틀(bluebottlecoffee.net)’을 보자. 미국 커피 매니아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커피점은 원래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다가 2010년 처음으로 뉴욕에 점포를 세운다.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 거리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그 같은 ‘커피의 정통성’을 믿는 젊은이들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윌리엄스버그 다리 위 난간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러브 록’, 즉 사랑의 자물쇠.
윌리엄스버그 다리 위 난간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러브 록’, 즉 사랑의 자물쇠.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차이나타운으로 연결된다. 다리는 문화만이 아니라 물리적 소통의 출발점이다. 21세기 중국의 힘은 브루클린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통해 브루클린으로 넘어오는 중국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산책 때문에 오는 중국인들이 아니라, 아예 브루클린에 사는 중국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840만 인구의 뉴욕시(2013년 기준)는 맨해튼을 비롯해 전부 5개구(區)로 이뤄져 있다. 브루클린은 전체 5개구 가운데 가장 많은 260만 인구를 가진 곳이다. 원래 브루클린은 흑인, 유대인 그리고 폴란드인의 중심 거주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가장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것은 중국계다. 뉴욕 5개구 전체의 중국인 인구는 35만명(2013년 기준). 2000년 조사 때의 26만명보다 35%가 늘어난 규모다.

현재 뉴욕 거주 중국인은 불법 체류자를 포함할 경우 100만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뉴욕 인구 10명 중 한 명이 중국인이라는 말이다. 맨해튼의 차이나타운과 퀸즈의 중국계 거주지가 포화상태에 들어서면서 브루클린이 새로운 중국인들의 보금자리로 떠오른 셈이다. 브루클린의 중국계 거주자는 13만명 정도라고 한다. 2000년에 비해 45% 정도 늘어났다. 불법 체류자를 포함할 경우 약 40만명이 브루클린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거주지는 브루클린에, 일하는 곳은 다리 건너편의 차이나타운을 포함한 맨해튼이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걷는 중국인이 유독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서울역 고가도로가 ‘공중정원’이란 이름으로 변신할 것이라고 한다. 서울시장이 적극 추진하는 야심 찬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고가도로 위에 나무나 꽃을 심어 산책로로 만든다는 것이다. 방치하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백번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퍼붓고 나무와 꽃을 심는다고 해도 역시 문화가 중요하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보행자를 위한 장소인 동시에, 브루클린 청년문화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야외무대이기도 하다. 방 두 칸짜리 월세가 4000달러에 육박하는 브루클린과, 방 한 칸에 10명이 합숙하는 차이나타운을 연결하는, 극과 극의 문화가 윌리엄스버그 다리 위에서 펼쳐진다. 필자가 다리를 걸어가는 동안 사진을 찍는 모델, 색소폰을 연주하는 거리의 음악사, 러시아 관광객들에게 브루클린과 맨해튼의 역사를 설명하는 통역 도우미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수많은 러브 록(Love Lock), 즉 사랑의 자물쇠는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낭만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는 한번 걷는 것만으로도 뉴욕의 문화와 정취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환경만이 아니라 문화로서의 공중정원을 원한다면, 우선 뉴욕의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걸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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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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