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 확산 운동을 펼쳐온 사단법인 한국편지가족 권미령 회장(왼쪽)과 노기화 사무국장.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손편지 확산 운동을 펼쳐온 사단법인 한국편지가족 권미령 회장(왼쪽)과 노기화 사무국장.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5월 13일 천안 우정공무원 교육원 강의실은 울음바다가 됐다.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로 진행한 ‘편지쓰기’ 강좌 시간이었다. 교육에 참석한 70여명은 오랜만에 편지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손편지를 썼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가 아닌 ‘나’를 위한 편지였다. 가슴 한편에 자신도 모르게 묻어두었던 상처와 후회들이 연필을 통해 아프게 살아났다. 편지쓰기가 끝나고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나와 자신의 편지를 읽었다.

‘배우자를 두고 잠시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첫사랑에 가슴 설레었던 기억이 언제였는지, 이 나이에 그런 감정이 내게 올 줄은 몰랐다. 마음이 흔들리는 만큼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컸다. 오늘 이 편지에 내 감정을 털어내며 흔들림을 멈춘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감정을 이해받고 마음을 다 잡으려는 걸까. 반성문처럼 읽어 내려가는 편지를 듣던 사람들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한 고백이 사람들의 마음을 연 덕분인지 서로 자신의 편지를 읽겠다고 나섰다.

15년 만에 돌아온 남편을 용서하면서 겪었던 마음의 갈등을 털어놓으며 자신을 위로하는 편지, 2차 항암치료를 받고 유서가 될지 모르겠다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편지 등 오랜만에 민낯의 마음을 마주한 사람들은 누구의 사연이랄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날 편지쓰기 강의를 맡았던 노기화 한국편지가족 사무국장은 “그날 나도 실컷 울었다. 오랜만에 눈물을 흘리고 나니 가슴속이 시원해지더라. 순식간에 쓰고 소비되는 디지털 문자와는 달리 손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 글은 계속 남기 때문에 진심을 담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상처도 치유된다. 그것이 바로 편지의 힘인 것 같다. 편지쓰기를 통한 마음 달래기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한국편지가족은 편지쓰기 교육을 15년째 무료로 이어오고 있다. 주로 전국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성인 강좌도 요청이 들어오면 환영이다. 한국편지가족이 전국 학교로 찾아가 진행한 강의는 2013년 850학급, 2014년 630학급에 이른다. 한 번 강의는 90분으로 간단한 편지쓰기 교육부터 시작해 직접 편지를 써보게 하고 우수편지는 시상도 한다. 또 우수상 수상자는 상장받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나만의 우표’를 만들어 보내준다.

‘한국편지가족’(회장 권미령)은 편지의 힘을 믿고 편지쓰기의 필요성에 공감한 주부들이 주축이 돼 운영되고 있다. 전국 9개 지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은 500여명이고 이 중 40~50명이 편지쓰기 강사로 뛰고 있다. 강사는 2년마다 단체에서 실시하는 강사교육을 통해 배출하고 있다. 지회장 추천을 통해 한 지회당 2~3명이 강사교육을 받는다. 회원들은 우정사업본부에서 매년 주최하는 편지쓰기 대회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주축으로 시인, 수필가 등 문인들이 많다.

한국편지가족은 1982년 11월 국무회의를 통해 설립한 ‘편지쓰기 장려회’가 시작이다. 이후 1999년 사단법인 한국편지가족이 발족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미래창조과학부 우정사업본부 산하 공식 법인으로 등록돼 있다. 2000년부터 시작한 편지쓰기 강좌를 비롯해 초·중학생 편지쓰기 캠프 개최, 계간 소식지 ‘편지’ 발간, 편지쓰기 대회 수상작 모음집 등을 출간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에서는 사무실과 책 발간비, 강사들의 교통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회원들의 활동은 봉사에 가깝다. 때로는 회원들의 주머니를 털어야 한다. 지난 6월 24일 서울 광진구 자양로 동서울우편집중국 3층에 있는 한국편지가족 사무실을 찾은 날, 올해 두 번째 소식지 ‘편지’와 학생들의 편지글을 모은 ‘개울가에서 쓴 편지’가 막 인쇄를 앞두고 있었다.

올 1월 정기총회를 통해 8대 회장으로 선출된 권미령 회장은 “현장에서 편지쓰기가 아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매번 절감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이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든다. 경제만 보고 달려온 탓에 그동안 마음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사회갈등, 세대갈등이 심각한 요즘 마음치료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손글씨는 심장을 통해서 나온다고 했다. 손으로 쓰는 편지는 훌륭한 마음치료의 방법이다. 강의를 하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가 많은지 깜짝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디지털로 실시간 소통하는 아이들에게 편지는 아주 낯선 소통의 방법이다. 손편지를 한 번도 보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편지봉투 쓰는 법부터 가르치는데 우편번호 여섯 자리 칸에 아파트 동·호수를 적는가 하면 전화번호를 써야 하는 줄 알고 칸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서툴지만 아이들이 편지지에 끄집어낸 마음들은 의외로 진지했다. 노기화 사무국장이 들려준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의 이야기이다. 수업시간에 떠드는 것은 물론 반 친구들하고도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담임 선생님께 귀띔을 받고 들어갔는데 수업 시작부터 떠들기 시작하더니 편지도 안 쓰겠다고 하더라고요. 가만 보니 혼자서 볼펜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조용히 옆에 가서 왜 편지를 쓰기 싫으냐고 물었더니 ‘엄마 아빠가 싫어서’라고 해요. 그런데 안 쓰겠다고 우기던 아이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한 장을 겨우 쓰는데 한 장 반이나 썼더라고요. 아빠에게 쓰는 편지였어요. 내용을 보니 부모가 이혼한 후 엄마랑 살고 있었어요. 아빠한테 매 맞은 기억밖에 없는데도 아이는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가끔씩 아빠가 만나러 와서 먹을 것을 사주고 장난감도 사주고 하는 모양인데 아이는 아빠가 사준 물건보다 아빠랑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적어놓았더라고요. 엄마 눈치 보지 말고 학교로 만나러 와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써 있었어요. 수업시간에 떠들고 친구들을 못살게 구는 것도 모두 자신을 봐달라는 외로움의 표현이었던 거죠.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그 아이의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져 울컥했어요. 1등 상을 주고 칭찬을 해줬더니 아이가 우쭐해하더니 조용해졌어요. 누구에겐가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거죠.”

노 국장은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 아인 분명 달라졌을 것”이라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를 처음으로 드러낸 편지 한 장이 그 아이의 인생을 바꾸는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노 국장 또한 편지와 얽힌 사연이 많다.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악필이었지만 손편지에서 느껴지는 투박한 진심이 와 닿아서였다. 문학소녀였던 노 국장은 손편지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마음을 전할 때도 말보다 손편지가 진심을 담기 좋았다. 아들과도 주로 손편지로 소통을 했다. 손편지로 키운 아들은 글을 썩 잘 쓴다. 최근 재결성을 발표해 화제가 된 그룹 SG워너비의 리드보컬 김진호가 아들이다. 글쓰기 좋아하던 진호는 작사·작곡도 직접 한다. 진호가 중학생 때 진호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 국장은 힘들 때마다 팔당댐이 내려다보이는 남편의 묘지를 찾아가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놓고 오곤 했다. 그런 사연을 담아 ‘팔당우체통’이란 제목으로 쓴 수필이 2004년 동서문학상을 탔다. 글을 읽은 친구들이 어느 날 진호 아빠의 무덤에 함께 가자고 했다. 무덤 앞에는 친구들이 마련한 빨간 우체통이 서 있었다. 남편이 죽은 후 눈물을 흘리지 말자고 결심했던 노 국장은 우체통 앞에서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후 빨간 우체통은 노 국장뿐만 아니라 진호도, 진호 아빠의 친구들도 무덤을 다녀가면서 하늘에 마음을 부치는 곳이 됐다. 노 국장은 “우체통은 진호 아빠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위로터”라고 말했다.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손편지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속도의 시대에 부치고 기다려야 닿는 손편지의 ‘느림’이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기가인터넷보다 빠를 수가 있다. 지난해 말 KT 전남본부에 손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발신자는 전남 신안군 임자도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 김희주였다. ‘어린이 날 KT에서 해줬던 스마트폰 체험교육이 재미있었다. 또 와주면 안 되느냐’는 내용이었다. 손편지에 적힌 간절한 바람이 KT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KT는 임자도에 최신 인터넷망을 깔아줬다. 손편지가 일으킨 기적으로 임자도는 기가아일랜드가 됐다.

서울 숭신초등학교는 지난해부터 교내에 행복우체국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우편진흥원과 MOU를 맺고 우체통, 편지지, 교내서만 통용되는 교내우표 등을 기증받았다. 친구, 선생님에게 보내는 손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학생들로 구성된 ‘메신저’들이 배달해준다. 올해 2기를 뽑은 메신저는 신청을 받아 선발하는데 경쟁률이 3 대 1이 넘는다. 서류심사, 면접을 거쳐서 선발하는 만큼 메신저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메신저들은 우체통에 있는 편지들을 수거해 진짜 편지처럼 도장도 찍고 수신자 책상에 배달을 해준다.

행복우체국을 제안한 정연재 선생은 “1주일에 한 번 수거하다 편지가 많아 두 번씩 하고 있다. 전교생 평균 1명당 작년에만 4~5통씩은 쓴 것 같다. SNS는 비속어도 많고 거친 표현들이 많은데 편지를 쓰다보면 언어도 순화되고 불편신고제를 운영해서인지 기분 나쁜 내용의 편지도 사라졌다. 소통의 창구가 있으니 왕따도 확실히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한국편지가족의 편지쓰기 강좌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도 크다. 권미령 회장은 “담임이 세 번이나 바뀐 문제의 반을 맡아 들어간 적이 있었다. 천방지축 문제아들도 편지쓰기 시간이 되자 95% 이상이 엎드려 편지지를 채우더라. 엄마 아빠에게 보내는 반성의 편지도 있고, 친구에게 보내는 우정의 편지도 있고, 부모를 대신해 키워주는 조부모에 대한 감사의 편지도 있었다”고 전했다. 하루 종일 디지털 기기에 코를 박고 사는 아이들에게도 기계가 대신해 주지 못하는 말들이 많았던 것이다.

권 회장은 “손편지 한 장으로 한 사람의 마음만 바꿔도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편지쓰기 교육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다. 매년 학교에 공문을 보내고 신청을 받아서 강의를 해주는데 예산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신청하는 학교를 다 받지는 못한다. 새롭게 신청하는 학교를 우선으로 해주고 있는데 좀 더 많은 학생들에게 손편지의 힘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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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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