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6일 서울 서초구 리더스빌딩에서 열린 통비법 정책토론회의 모습. ⓒphoto 백이현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난 7월 6일 서울 서초구 리더스빌딩에서 열린 통비법 정책토론회의 모습. ⓒphoto 백이현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RO(혁명조직) 수사 당시 RO 조직 수뇌부들이 비폰(3자 명의의 대포폰)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수사가 종료될 때까지 그들의 통화 내용은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통화를 했었다는 기록만 확인할 수 있었죠.”

지난 7월 6일 서울 서초구 서초중앙로 리더스빌딩 901호. 전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관 윤태화(가명)씨가 201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과 이른바 RO 조직원 수사 당시의 경험을 얘기했다. 당시 수사 실무자였던 윤씨는 “통화 내용만 확보할 수 있었더라도 수사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합법적으로 통화 내용을 확보할 수 있는 관련법이 미비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이었다.

이날 윤씨가 참석한 자리는 자유민주연구원(원장 유동열)이 주최한 통신비밀보호법(이하 통비법) 정책토론회. 이 자리에는 윤씨를 비롯해 유 원장과 김영도 경찰청 보안국 경감, 고영주 변호사, 최대권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 정준현 단국대 법대 교수, 방형남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참가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통비법 개정의 필요성과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통비법 개정은 정치권에서 다시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는 양상이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여당 간사인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6월 1일 이동통신사의 휴대전화 감청 설비를 의무화하는 통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당시 박 의원은 “현행법은 휴대전화를 포함한 모든 전기통신에 대해 법원의 영장에 따라 감청을 허용하고 있지만, 휴대전화 감청에 필요한 설비 등의 불비로 수사기관이 영장을 집행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국회에는 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 외에도 지난해 새누리당 서상기 의원이 비슷한 내용의 통비법 개정안을 발의해 둔 상태고 야당에서도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비롯해 5명의 의원이 통비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야당 의원들의 개정안은 대체로 감청 과정에서의 개인정보 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합법적 감청이 이미 허용돼 있지만 감청 설비의 미비로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현실부터 지적했다. 유동열 원장은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휴대폰 수는 약 5400만개로 전체 통신장비 사용률 중 80%가 넘는다. 현재의 통신비밀보호법 아래서 휴대폰을 감청하기 위해서는 통신사를 통한 감청이 유일한 수단이지만 사실상 통신사를 통한 감청설비가 없다. 때문에 국내 통신장비의 80%가 안보 사각지대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윤태화 전 수사관도 “한국은 80%에 이르는 국내 통신기기에 대한 감청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국내 현행법은 휴대전화를 포함한 모든 전기통신장비에 대해 법원의 영장 발부 여부에 따라 감청을 허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행할 감청설비가 없어 감청허가 영장 자체가 무용지물”이라고 지적했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현실은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윤태화 전 수사관은 “미국의 경우는 감청이 불가능한 전자통신기기의 미국 내 반입 자체가 원천 봉쇄돼 있다”고 말했다. 1996년 한국이 세계 최초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의 휴대폰을 상용화했을 때 미국은 약 2년간 CDMA 방식의 휴대폰 수입을 금지했는데, 그 이유도 미국이 CDMA 휴대폰에 대한 감청기술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미 정부는 CDMA방식 휴대폰에 대한 감청기술이 개발되자 그제서야 반입을 허가했다. 윤 수사관은 “미국의 이 원칙은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영주 변호사(전 서울 남부지검장)도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기술적인 이유로 감청이 안 되는 통신방법은 이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 선진국의 경우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통신사업자의 감청 협조 설비 구축의무가 법제화돼 있다. 휴대전화 감청이 가능해짐으로써 불안해지는 것은 간첩, 테러, 마약 등 중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다. 선량한 일반 국민들이 이런 중범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돼야 하기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이 시급하다.”

정준현 단국대 교수도 “미국과 같은 안보선진국이 정보기관에 신경 쓰는 이유를 꼭 북한과 같은 적대국의 동향 수집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자유롭게 보장된 국가정보기관의 정보활동은 산업스파이로부터 국가 경제를 보호한다. 뿐만 아니라 마약, 납치 등과 같은 강력범죄로부터도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 장치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한국이 과거에도 감청장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정원은 1998년 8국 운영단 개발팀에서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R2를 개발했고 1999년 이와는 별도로 이동식 감청장비 CAS를 개발했다. CAS는 휴대폰 고유번호, 주파수 등을 해독한 후 감청 대상자로부터 약 200m 이내에 근접해 무선구간에서의 휴대폰 통화를 감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청장비는 합법적 감청이 아닌 무차별적인 도청에 활용되면서 큰 사회문제가 됐다. 2002년 당시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에 의해 민간·정치인 대상 불법 감청 주장이 최초로 제기되면서 이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했고 2005년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국정원이 현행법에 어긋나는 여러 형태의 불법 감청을 한 것이 확인됐다. 결국 2005년 8월 5일 당시 김승규 국정원장은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면서 불법 도청에 사용됐던 감청장비를 전량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의 조치는 결국 안보에 구멍을 뚫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이날 토론 참석자들의 지적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휴대폰 사용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휴대폰 감청을 포기해도 안보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지적이다.

윤태화 전 수사관에 따르면, 휴대폰 기술의 빠른 발전 역시 감청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과거 국정원이 불법 감청에 사용한 휴대폰 감청장비는 2G휴대폰 단말기 고유번호를 복제한 쌍둥이 폰이었다. 하지만 3G 이후부터 이동통신사가 고유번호 복제방지용 유심(USIM)칩을 도입하여 쌍둥이 폰은 사용불가 기술이 됐다. 또한 2004년 개정된 통비법은 휴대폰 단말기 고유번호를 불법으로 제공하는 자와 제공받은 자를 징역 3년에 처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설령 고유번호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무선 구간이 암호화돼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김영도 경찰청 경감은 “안보를 위한 정보수집 현장에서 감청에 대한 부분은 사실상 포기한 상태”라고 현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이미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은 통신감청의 허술함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범죄를 입증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외국 이메일 계정 역시 국내 수사권의 권한 밖이다. 때문에 남한에서 활동하는 북한 첩보원들은 모두 해외 계정을 쓴다.” 김 경감은 “우편물이나 유선전화, 신용카드 사용내역 등 추적 가능한 루트를 다 동원해도 휴대폰을 감청하지 못하면 수사에 별 소용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정치권에서 통비법 개정안이 너무 일관성 없이 남발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통비법은 1994년 최초로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22번의 개정을 거쳤고, 지금도 10건이 넘는 개정안이 올라와 있는 상태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제출한 개정안의 경우 통신사의 감청 설비 의무화 등 감청 환경 조성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야당의 개정안은 감청 대상자에게 감청 정보를 폭넓고 빠르게 제공하는 등 인권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국의 경우 1990년대부터 휴대폰 감청에 필요한 통신사업자 협조의무 강제를 법제화(미국 1994년, 독일 1996년, 호주 1997년, 일본 1999년, 영국 2000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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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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