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photo 뉴시스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photo 뉴시스

지난 6월 중순 일본 금융사 및 대기업 오피스가 밀집한 도쿄 오테마치(大手町)에서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의 강연회가 있었다. 그의 모교인 미 컬럼비아대학 MBA 일본 동창 모임이 신 회장을 연사로 초청했다. 마침 그 다음날부터 일본 증권사 및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설명회(IR)가 예정돼 있어서인지 그는 ‘롯데그룹의 세계전략’을 주제로 얘기했다. 참석자 100여명은 컬럼비아대 동문 일본인이 대부분이었다. 소규모 자리였으나 3시간에 걸쳐 강연과 문답, 다과회가 이어졌다.

신 회장은 투자은행 출신답게 사업 부문별로 구석구석 숫자를 다 외워 발표했다. 유려한 일본어 실력과 유머가 깃든 화술은 한국이나 일본의 전형적 최고경영자(CEO)상과는 오히려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최근 인수한 뉴욕 팰리스호텔을 비롯해 동남아·러시아 지역의 호텔 비즈니스 이야기가 나오자 “해외 출장 가실 때 꼭 저희 호텔을 애용해 주세요”라는 애교 섞인 당부를 했고 이에 청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저희가 중국에 먼저 진출해 ‘락천(樂天)’이란 한자어 브랜드를 선점했거든요. 그래서 요즘도 미키타니(木谷·일본 최대 온라인 쇼핑몰 ‘라쿠텐(樂天)’ 창업자) 사장이 저만 보면 왜 그 이름 가져다 썼냐고 그럽니다”며 소개한 일화도 흥미로웠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특히나 수많은 인수·합병(M&A)을 통해 외형상 한국의 5대 그룹까지 도약한 이야기를 할 때는 “노무라증권에 있으면서 기업가치가 떨어져 있을 때 오히려 적극적으로 베팅해야 한다는 걸 회사 선배들에게 배웠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청중이 가장 관심을 보인 대목은 그가 일본 롯데와 한국 롯데의 매출 수준을 비교설명할 때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과 롯데 비중이 5 대 5였으나 현재는 95% 가까이 한국 롯데가 점유하고 있다고 했다. 매출액 기준 총 8.5조엔 중 한국 기반의 롯데가 8.0조엔을 차지한다는 것. 외환위기 무렵 1997년부터 2014년까지 특히 한국 롯데가 연간 14.8%라는 초고속 연평균성장률을 달성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일본 롯데의 안정적 신용도를 인정해 준 일본 금융기관을 통해 저금리 자본조달로 한국 롯데에 많은 투자가 유입되었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에서도 5000억엔 남짓한 매출 규모에 비해 ‘롯데’ 브랜드 자체는 막강한 편이다. 글로벌 리서치업체 닐슨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일본 내 롯데의 브랜드 인지도는 소니·파나소닉·메이지·애플·도시바·모리나가·시세이도·샤프에 이어 9위였다. 이 때문에 향후 양국의 시너지 창출 계획, 또 일본 내에서의 추가 사업확장 전략을 묻는 질문이 잇따랐다.

신 회장은 “백화점 같은 기존 유통업에서는 이미 짜여진 구도를 헤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지금 긴자에 조성 중인 대형 롯데면세점 진출(내년 3월 예정)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를 구상 중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인 기업대표’로서의 자신감도 묻어났다. 그는 “일본은 의사결정 과정에 지연이 많아 한국처럼 순발력 있게 투자집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과감한 발언’도 했다. 이에 앞서 신 회장은 강연 모두에 ‘시게미츠 아키오(重光昭夫)씨 강연회’라는 포스터를 쳐다보며 굳이 “와타시노 혼묘와 지츠와 신데스(제 본명은 사실 신입니다)”라고 밝힌 것도 개인적으로는 인상적이었다. 그의 일본 성은 시게미츠이고, 한국 성은 신(辛)이다.

돌이켜보면 이 강연회 때만 해도 이미 어느 정도 그룹 내부에서 신동빈 회장의 일본 롯데 관할에 관한 재가 움직임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올 초 한·일 롯데그룹 전체의 지주회사 격인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에서 신 회장의 형인 신동주씨가 해임되면서 권력구도 재편은 예견된 측면이 있었다. 형제 간의 분쟁이 표면화되기 전인 지난 7월 15일 공식적으로 신동빈 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공동대표로 취임한 것도 같은 연장선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photo 윤동진 조선일보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photo 윤동진 조선일보 기자

일본에서는 ‘기업으로서의 롯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먼저 강연회 자리에 참석한 일본 재계 리더급 인사들도 “그 같은 양국의 매출 규모 차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고 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도 기업 내부 사정은 잘 알려진 것이 없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외감법’(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대한 법률)이 있어 자산 100억원 등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은 상장기업이 아니어도 재무제표를 비롯한 기본 경영사항에 대해 외부 공시 의무가 있지만 일본은 아니다. 오히려 자산이 많은 비상장 업체들은 세무조사를 의식해 축소 신고하는 경향도 있다.(일본 롯데는 요지에 대형 부동산 등 알짜 고정자산이 많은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지난 7월 말 벌어진 롯데그룹 오너 가족 대주주들 간의 갈등 양상에 대한 보도에 대해 니혼게이자이, 요미우리 등 메이저 일본 매체들은 첫 기사를 모두 서울 특파원들이 송고했다. 한국 언론에서 ‘왕자의 난’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카피해 ‘시게미츠 일족(一族)의 난(亂)’이라고 명명한 것부터,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은 전부 서울 롯데 본사의 보도자료나 관계자 코멘트로 정리했다. 이를 다시 “일본 언론에 따르면…”이라고 재인용하는 것은 외신보도의 뉴스 공급자들의 기존 관성 때문일 것이다.

기업 내부 사정과는 별개로, 롯데의 강력한 브랜드 파워는 비상장 기업의 전략적 모호성이 기여한 부분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요즘 같으면 일본인들이 라인(Line)을 일본 기업으로 인식하는 것처럼(사실은 한국 네이버의 100% 자회사), 일본에서 롯데는 일본 기업으로 알려져 있고, 신문 제목에도 오너 가문 소개 시에는 반드시 일본 이름 시게미츠가 먼저 등장한다. 한국 롯데가 1967년 일본 롯데의 자본금으로 탄생한 자회사 개념이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번 돈을 일본에 배당 송금하지는 않으므로 개별 독립 회사로 보아도 무방하다.

일본 롯데는 한국처럼 유통 소매업에 중화학까지 커버하는 종합재벌그룹은 아니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식품업체로 볼 수 있다. 제빵, 유제품 업체 1위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과자 업체로만 좁히면 2013년 회계연도 기준 매출액 5649억엔으로 일본 1위다. 1984년부터 20년 이상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한국 빼빼로의 원작(原作) 격인 ‘포키(Pockey)’의 제조 판매사 글리코(3154억엔), 한국에서 대히트를 기록한 허니버터칩의 원조 ‘시아와세 버터(행복버터칩)’를 출시 중인 가루비(1999억엔), 아베 신조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의 친정 가문 모리나가(1646억엔)를 멀찍이 제치고 있다. 매출과 이익이 정체이긴 하지만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져 시장자체가 줄고(어린이 절대인원 감소) 밀가루 등 원재료 값이 상승하는 것에 비하면 선전하는 편이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photo 뉴시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photo 뉴시스

2007년부터 일본 롯데를 관할하는 롯데홀딩스라는 지주회사가 등장했는데 산하기업으로 롯데리아, 크리스피크림 도너츠, 긴자 코지 코너, 메리 초콜릿 컴퍼니 등의 외식사업 체인을 다수 보유 중이다. 또 브랜드 파워를 키워주는 요인으로 프로야구단 롯데 마린스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 총 관람객 2200만명 중 122만명을 동원해 12개 구단 중 최하위이긴 하지만 한국으로 치면 지역연고가 옅은 수원이나 고양시 정도에 해당하는 수도권 치바(千葉)를 연고지로 하고 있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1960년대 후반 ‘도쿄 오리온스’ 프로야구단을 롯데가 인수하게끔 알선한 역할을,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동빈 회장은 6월 초에는 아베 총리와 도쿄의 일본 총리공관에서 독대하기도 했는데 집안 어른들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인연이 독대의 배경이라고 한다.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 또한 신 회장과는 유년 시절부터 과자 업계 라이벌(모리나가) 가문의 2세 신분으로 친분을 이어왔다. 롯데 브랜드 가치 향상에는 오래도록 각인되어 온 광고 카피와도 관계가 깊다. ‘입안의 연인(お口の戀人) 롯데’는 닛케이BP컨설팅이 해마다 조사하는 ‘기업 메시지 조사’에서 50년 관록의 힘을 바탕으로(1959년에 처음 사용) 2001년부터 2012년까지 연속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모태는 껌회사이기 때문에 심플하고도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 전달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일본 롯데는 1948년부터 시장을 석권한 이래 현재도 일본 껌시장에서 60% 이상 점유율을 자랑한다. 그 이후 캔디, 초콜릿, 아이스크림, 드링크 순으로 시장을 넓혀갔다. 아사다 마오가 현재 홍보 모델로 선전 중이며 한국에도 동일 브랜드로 유명한 ‘가나초콜릿’, 찰떡아이스의 원조 격인 ‘유키미다이후쿠(雪見だいふく)’는 늘 안정적 매출을 낳는 스테디셀러다. 글로벌 선두 과자업체답게 일종의 연구개발(R&D) 센터인 ‘롯데중앙연구소’를 두고 식소재 기초연구부터 바이오기술, 충치예방 등의 접목은 물론 포장기술 혁신도 다듬고 있다.

조인직

고려대 영문과 졸업, 미국 컬럼비아대 MBA. 동아일보 기자, KDB대우증권 국제영업부 팀장 역임. 현 KDB대우증권 도쿄지점장

조인직 KDB대우증권 도쿄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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