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실나이의 영캐주얼 ‘꼬마크’
돌실나이의 영캐주얼 ‘꼬마크’

김정수 한복진흥센터 연구원은 “개량한복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개량’이라는 의미는 나쁜 점을 보완해 좋게 고친다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한복은 단점을 고쳐 나간다기보다 생활에 친숙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생활한복’이 적절한 표현이다.

바야흐로 생활한복 전성시대다. 전통한복에 현대적 요소를 가미한 의상부터 이게 과연 한복이 맞는지 갸우뚱하게 만드는 의상까지, 한복의 진화가 놀라울 정도다. 이를 일컫는 용어도 개량한복, 퓨전한복, 패션한복, 생활한복으로 다양하다. 현재 전국에 있는 크고 작은 생활한복 업체는 1000여곳이 넘는다. 전통한복까지 포함하면 1만여곳에 달한다.

‘날라리 한복’ ‘족보도 없는 옷’이라는 지적을 받던 생활한복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한복진흥센터가 지난 7월에 개최한 ‘한복, 청바지와 만나다’ 디자인공모전에서는 젊은 디자이너의 신선한 감각이 넘쳤다. 한복 고유의 전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실용성을 살린 디자인을 선보여 생활한복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주간조선은 추석을 앞두고 국내의 대표적인 생활한복 디자이너들을 찾아가 이들이 만든 생활한복을 보고 한복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돌실나이’ 국내 최대 규모

국내 최대 규모의 생활한복 업체는 전국 40여개의 체인을 소유한 20년 역사의 ‘돌실나이’다. 돌실나이는 매년 700여벌의 생활한복 디자인을 선보이며 연매출은 100억원에 이른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돌실나이 본점에서 만난 김남희 대표는 ‘한복’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복은 양복이 한국에 들어온 일제강점기 이후에 양복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하기 위해 생겼다”며 “‘우리 옷’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우리 옷을 생활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돌실나이는 우리 옷의 전통을 살리되 불편을 최소화하는 것에 역점을 둔다. 시대적 유행을 반영하는 것도 돌실나이의 정체성 중 하나다. 치렁치렁한 저고리의 옷고름 대신 브로치를 달거나 소매의 폭을 좁혀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식이다. 김 대표는 “한복은 누구나 편하게 할 수 있는 옷이 돼야 한다”는 철학을 가졌다. ‘어르신들 우리 옷’뿐 아니라 2030을 겨냥한 생활한복도 선보인다. 김 대표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옷을 보여줬다. 치마의 길이는 짧아지고 레이스를 응용하거나 한국의 조각보와 비슷한 패치워크 디자인을 적용하기도 했다. 십장생을 캐릭터화해 체크무늬로 표현한 옷도 있다. 얼핏 보면 한복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때 ‘전통한복모임’에서 이단아로 불렸다.

김영진의 ‘차이킴’ 틸다 스윈튼이 사랑한 한복

차이킴
차이킴

양복에 한복 전통의 선과 맵시를 재해석하는 디자이너가 있다. ‘차이킴’의 김영진 디자이너가 대표적이다. 그의 한복을 두고 ‘한복이다, 아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에서 그녀는 유명한 한복디자이너다. 지난 5월 내한한 영국의 여배우 틸다 스윈튼은 차이킴의 한복코트를 마음에 들어하며 구매해 갔다. 현재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 패션쇼’에 초청돼 파리에 가 있는 김영진 디자이너 대신 이곳의 디자인 팀장을 만났다.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는 ‘차이킴’ 매장에서 만난 김유진 디자인 팀장은 차이킴의 한복 정체성 논란에 대해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지켜봐주는 게 맞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변화해 가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차이킴의 옷은 중세유럽 의상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전통한복 기법을 되살리기도 한다.

차이킴에서 가장 자신 있게 내놓은 한복 디자인은 독창적 아이템인 ‘철릭 원피스’다. ‘철릭’은 상의와 하의를 따로 마름하여 허리에 연결시킨 겉옷으로 관복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 여성 옷에 적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반응이 매우 뜨겁다고 한다. 얼마 전 MBC의 ‘복면가왕’ 프로그램에 가수 배다해씨가 입고 등장해 더욱 화제가 됐다. 차이킴은 전통한복의 ‘당’이라고 부르는 한복 패턴을 현대식 재킷에 적용하기도 했다. 또한 와이셔츠의 칼라를 한복의 깃을 응용해 선보였다. 한복의 소재로 널리 쓰이는 실크뿐만 아니라 면, 울, 캐시미어 등 다양한 원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차이킴의 고객은 폭넓다. 김 팀장은 “2030세대뿐만 아니라 5060세대까지 고객층이 두껍다. 처음에는 국악 연주자나 한복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이 주로 찾았다면 지금은 달라졌다. 일상생활에서 입으려는 고객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한복을 즐겨 입는 사람들의 선호도도 바뀌고 있다. 국악 연주자들의 경우 처음엔 전통한복만 고수했지만 국악도 서양음악과 퓨전화되면서 퓨전한복을 찾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한다. 김 팀장은 “이제는 외국 관광객들도 우리 옷을 찾는다”고도 했다. 한남동에도 차이 김영진 매장이 있는데, 일본 관광객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박미정의 한복이야기’ 군복 바지통에 시스루 저고리까지

박미정의 한복이야기
박미정의 한복이야기

전통한복의 형태는 고수하면서 디테일한 부분만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곳이 있다. ‘박미정의 한복이야기’다. 멀리서 보면 전통한복과 다를 바 없지만 자세히 보면 곳곳에 현대적 패션 요소가 들어 있다. 옷고름 대신 단추나 끈을 대는 식이다. 박미정 대표는 최근에는 한복에 양복의 입체재단을 적용한다. “한국인의 체형은 서구적으로 변하고 있다. 키가 커지고 어깨가 넓어지고 허리는 가늘어지는데 여유를 중시하는 한복의 선은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박 대표는 남자 한복의 바지통을 확 줄이고, 여자 한복 저고리에 시스루를 적용하기도 한다. 스키니진을 선호하고 과감한 옷을 거부감 없이 입는 젊은 세대를 위한 디자인이다. 이를 위해 그는 군복 바지나 속이 비치는 서양의 시스루 디자인을 참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박 대표는 “한복 고유의 전통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녀의 한복 주 고객층은 젊은층, 특히 전통한복을 좋아하면서도 실용성을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박 대표는 “전통한복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복이 외면당하거나 다음 세대에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은 기모노, 유카타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하다. 입는 것도 자연스럽다. 반면 한복은 길에서 입고 다니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이런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다.”

‘리슬’의 황이슬 10~20대가 주고객층

리슬 ⓒphoto 전명진
리슬 ⓒphoto 전명진

젊은 세대의 한복 디자이너 가운데서는 ‘리슬’의 황이슬 디자이너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생활한복이 아닌 ‘신한복’ 디자이너란 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한복의 ‘韓(한)’ 자는 대한민국을 나타내는 한자이니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담은 옷은 새로운 한복이라고 생각한다.” 황 디자이너의 주 고객 연령대는 10~20대로 매우 젊은 편이다. 최근에는 패션에 관심 많은 남성들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살린 한복을 만들어 달라며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한다.

젊은층을 사로잡는 비결에 대해 그는 “예쁘지만 불편함 혹은 시선 때문에 망설였던 부분을 해결해 주는 한복 디자인을 선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리슬’의 대표적인 ‘신한복’ 아이템은 셔츠 저고리다. 저고리의 요소인 깃과 고름을 서양의 롤업 소매셔츠와 융합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리슬’의 디자인은 성별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특징. 또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입을 수 있어 일상복으로도 훌륭하다.

한복진흥센터에 따르면 국내 한복시장 규모는 2012년 기준 1조3000억원 정도. 이 가운데 섬유·원단을 제외하면 도·소매 한복제품시장은 약 7000억원 수준이다. 국내 전체 패션시장 규모(약 34조3000억원으로 추정)의 약 2% 수준에 불과하다. 한복이 고전(苦戰)하고 있는 데에는 생활의상으로 정착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문화사업 육성진흥 방안 연구’에 따르면 ‘한복 입은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에 대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는 응답이 78.3%로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좋으나 직접 입기에는 망설여진다’ ‘불편해 보인다’는 응답도 많았다. 또한 한복진흥센터에서 실시한 ‘한복 기피 이유’에 대한 조사(2014년)를 보면 ‘관리와 세탁이 어렵고 입는 방법이 어렵다’는 이유가 55.7%에 달했다. 이 두 조사 결과는 역으로 한복에 대한 인식 개선과 실용성 문제만 해결한다면 얼마든지 한복이 대중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복진흥센터 김정수 연구원은 “전통한복의 정체성은 반드시 유지해야 하며 생활한복은 이와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 한복의 특성을 활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나가야 ‘유물’이 아닌 ‘패션’으로 다음 세대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형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