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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375호] 201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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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명성황후, 임오군란 때 말라리아로 사경”

을미사변 120주년 ‘임오유월일기’ 한글 번역

이동훈  기자 

▲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저서 ‘독립정신’에서 사용한 명성황후의 사진.
오는 10월 2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년) 120주년’을 앞두고 임오군란(1882년) 당시 명성황후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는 기록이 한글로 완역 공개됐다. 2006년 발견된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는 당시 피신 중이던 구(舊)한말의 실권자 명성황후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자료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구식 군대의 반란을 피해 궁궐을 떠난 직후 극심한 인후염(咽喉炎)을 앓았고, 다리에는 종기가 나 고름이 생겼다. 피란 중후반에는 7~8월의 무덥고 습한 날씨 속에 ‘말라리아(학질)’에까지 걸려 목숨이 1주일간 위태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란 당시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는 내용은 이번에 주간조선 보도를 통해 언론에는 처음으로 공개된다.
   
   ‘임오유월일기’에는 명성황후가 임오년 6월 13일 이경(二更·오후 9시 전후) 궁을 나올 때부터 시작해 8월 1일 신시(申時·오후 3~5시경) 환궁하기까지, 매일매일의 기상 상황과 함께 명성황후가 매일 복용했던 한약의 이름까지 소소한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자료는 을미사변 120주년을 앞두고 명성황후에 얽힌 각종 오해를 푸는 데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임오유월일기’를 각주까지 붙여 한글로 완역한 박광민(63)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에 따르면, 임오유월일기를 기록한 사람은 파악되지 않는다. 박 연구위원은 “명성황후의 구체적 병세와 복용했던 보약이 세세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의술에 능한 수행원이 기록자일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일기에 따르면, “명성황후가 피란 중 한양 도성의 측근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국을 좌우했다”는 세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피란 중에 남의 이목을 피해 잠행해야 했던 것은 물론, 신체적으로도 극심한 인후염과, 말라리아(학질)까지 걸려 사경을 헤매는 내용이 당시 기록에 보이기 때문이다. 말라리아는 지금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창궐하며, 연 2억~4억명가량이 걸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생하는 질병이다. 말라리아 모기에 물릴 경우 입에 거품을 물고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게 된다. 말라리아를 100% 예방하는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다. 위생수준이 떨어지는 구한말까지는 말라리아가 한국에서도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오유월일기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말라리아 증세가 최초로 언급되는 날짜는 피란 중반인 7월 19일쯤이다. 당시는 인후염이 점차 회복되고(7월 5일), 다리에 났던 종기 상처도 거의 아문 직후(7월 9일)였다. 7월 19일 기록은 “학질(말라리아) 때문에 옥체가 미령하셔서 향사평위산(香砂平胃散) 두 첩을 올렸다”고 적고 있다. 명성황후는 7월 9~19일 사이에 말라리아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때 7~8월 무더운 날씨에 계속 맑은 날이 계속되다가 7월 14일과 15일 양일 간 각각 ‘종일 비가 옴’ ‘흐리고 비가 쏟아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덥고 습한 날씨에 말라리아 모기가 창궐하면서 말라리아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 임오유월일기 원본 photo 박광민

   이후 명성황후는 수삼(水蔘) 한 냥과 산삼(山蔘) 반 냥을 비롯해 향사평위산, 안신사물탕(安神四物湯), 가미군자탕(加味君子湯), 가감군자탕(加减君子湯), 평진탕(平陳湯) 등의 보약을 수일에 걸쳐 집중적으로 복용한 다음에 회복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또 수행 의원들로만은 역부족이었던지 “양성(陽城)에 있는 의원 박응종을 불러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양성은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으로 추정된다. 명성황후의 말라리아 증세는 8월 1일 신시(오후 3~5시경), 환궁하기 직전까지 100%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7월 29일자 기록에 따르면, “학질(말라리아)은 아직 옥체에 남아 있었다”고 나온다. 앞서 인후염과 다리의 종기로 고생할 때인 6월 18일, ‘감길탕(甘桔湯)’ 한첩과 개장국(보신탕) 한 보시기(甫兒·작은 사발), 붕어 고은 국 한 대접 등으로 처방했던 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명성황후가 환궁할 수 있었던 것도 임오군란 당시 청군을 지휘한 오장경(吳長慶) 제독과 연락에 성공한 덕분으로 일기를 통해 확인됐다. 7월 26일 일기에는 “중궁전하(명성황후)를 위한 탄원서를 청국 오장경 제독에게 전했는데, 곧 받들어 모셔오라는 희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오장경은 청말의 실력자인 이홍장(李鴻章)의 막료장수로 광동수사제독(광동 해군사령관)을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자신의 사병 집단인 ‘경군(慶軍)’을 이끌고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원세개(袁世凱) 등 휘하 장수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임오군란을 배후 지휘했다”는 죄명으로 고종의 아버지이자 명성황후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납치해 중국 톈진(天津)으로 데려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일 명성황후는 오장경이 죽자 그를 추모하는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란 사당을 세웠다. 예전 동대문야구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있던 ‘오무장공사’ 건물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한성화교중학(중고등학교)으로 옮겨져 남아 있다.
   
   가로 14.7㎝, 세로 20㎝, 모두 8쪽 분량의 ‘임오유월일기’가 일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6년 5월 초다. 민응식(閔應植)의 친척 집안이 보관해오던 일기를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에 기탁하면서다. 민응식은 명성황후(민자영)와 일가인 여흥 민(閔)씨 집안이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발발 직후 궁을 빠져나와 최초로 몸을 숨긴 곳도 벽동(碧洞, 현 종로구 송현동·사간동·중학동 일대)에 있는 민응식의 집이다. ‘임오유월일기’ 6월 13일자 기록에 따르면 “맑음, 이경(오후 9시 전후)쯤 되어서 중궁전하(명성황후)께서 벽동에 있는 익찬 민응식의 집으로 납시었다. 인후염으로 인해 옥체가 미령하셔서 박하유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일기에 따르면, 다음날 아침 민응식과 진사 민긍식(閔肯植), 현흥택(玄興澤), 시비 한 명은 명성황후를 수행해 광주부 취적리로 피란을 간다. 광주부 취적리는 지금의 성남시 고등동 저푸리마을로 추정되는 곳이다.
   
▲ ‘임오유월일기’를 한글로 번역한 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임오유월일기를 한글로 완역한 박광민 연구위원은 ‘임오유월일기’에 등장하는 구한말의 지명들을 지금의 지명과 비교대조해서 특정하는 작업도 끝마쳤다. 일기 속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한 세기를 거치면서 행정구역 변경과 통폐합으로 인해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종잡을 수 없는 곳이 많다. 박광민 연구위원은 1917년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가 펴낸 ‘일제 행정구역표’와 정부 수립 후 내무부(행정자치부의 전신)가 편찬한 행정구역 일람표를 대조해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당시 전전했던 곳들을 지금의 지명으로 모두 바꿔 달았다.
   
   명성황후는 도성을 빠져 나온 직후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 사이의 뱃길을 통해 한강을 건너 남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으로 치면 옥수동과 압구정동 사이에 놓여 있는 동호대교를 따라 남하했다. 이후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고등동(옛 광주부 취적리)과 경기도 광주시 목현1동(새오개)을 거쳐 경기도 이천과 여주 방면으로 갔다. 그리고 지금의 충북 충주시 노은면까지 남동진했다가, 다시 서울로 발길을 돌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노은까지 내려갔을 때는 “노은의 유학 이시일(李是鎰)의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임오유월일기’에 남아 있다. 여주문화원 조성문 사무국장은 “왕비께서 노은에 있는 신흥동(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으로 피란하면서 그 동네에서 잘사는 한씨 집에 머물고자 했으나, 후환을 두려워한 한씨의 거절로 가난한 모자(母子)가 사는 이시일의 집에 묵게 됐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 명성황후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배후로 의심되는 ‘민승호(민영익의 양부) 폭사사건’(1874)때 함께 몰살한 것으로 알려진 민승호의 부인도 ‘임오유월일기’에 등장한다. 임오유월일기 6월 22일자 기록에는 “옛 판서 민승호의 처이자 올케인 정경부인 덕수 이씨와 전 참판 민영익의 처 정부인 김씨가 안성의 죽산(竹山)에서 왔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간 결정적 반목의 계기가 되는 ‘민승호 폭사사건’의 구체적 면모도 파악할 수 있다. 민승호는 임종 당시 운현궁(흥선대원군의 관저)을 손가락으로 두세 차례 가리킨 뒤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은 “경기도 광주가 내 고향인데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때 광주를 거쳐 고향인 여주로 피란 간 것을 알고 계속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올해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 120주년을 맞이해, 세간에 잘못 알려진 명성황후의 진면목이 조금이라도 더 드러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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