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 다이노스 응원차 야구장을 찾은 김택진 대표와 그의 아내 윤송이씨. ⓒphoto 정재근 스포츠조선 기자
NC 다이노스 응원차 야구장을 찾은 김택진 대표와 그의 아내 윤송이씨. ⓒphoto 정재근 스포츠조선 기자

‘Conquer the Space! 우주 정복. 우리의 꿈은 우주 정복이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 그곳을 정복하여 꿈의 낙원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여정이다.’(엔씨소프트 홈페이지 중에서)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주 정복을 꿈꾸는 남자가 있다. 물론 이 꿈이 당장 실현될 수 없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행복한 상상과 즐거운 일상, 감동을 선물해 줄 수 있음을 알기에 그는 오늘도 꿈을 꾸고 있다. 한국 게임·IT산업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엔씨소프트 김택진(48) 대표 이야기다.

2015년 가을 김택진 대표는 두 가지 이유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나는 지난 10월 16일, 게임업계 라이벌 넥슨을 이끄는 엔엑스씨(NXC) 김정주(47) 대표와 불편했던 지분 관계를 청산하면서다. 엔씨소프트 경영권을 놓고 격렬하게 다퉜던 김정주 대표와의 결별 후, 언론은 ‘경영인 김택진’의 행보 하나하나를 경제·IT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2013년 KBO 리그에 등장한 NC 다이노스의 급성장이다. 지난해 정규시즌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NC 다이노스. 올해는 정규시즌 2위로 포스트시즌 관문을 뚫었다. KBO 리그 진입 3년차 팀의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이 공룡팀을 만들어 낸 ‘구단주 김택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1997년 작은 벤처로 시작한 엔씨소프트가 한국 게임·IT산업을 대표하는 공룡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전면에 김택진 대표가 있다. 주변인의 마음을 읽어 내던 김택진의 ‘감성’과 ‘상상력’, 그리고 그의 ‘승부사 기질’이 성장의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다.

엔씨소프트와 그 수장 김택진의 성공을 90%쯤 책임져 준 건 단연 MMORPG(다중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리니지’다. 이 리니지가 세상에 나오는 과정 속에 김택진의 감성과 승부사 기질이 녹아 있다. 리니지를 세상에 가장 먼저 끌어낸 인물은 김택진이 아니다. 김정주와 함께 1994년 넥슨을 공동 창업했던 천재 개발자 송재경(48·현 XL게임즈 대표)이다. 김택진은 송재경 대표의 재능을 누구보다 탐냈다.

리니지와 송재경을 품다

두 사람은 1993년 한글워드 개발사로 유명한 ‘한글과 컴퓨터’(이하 한컴)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송재경 대표는 한컴에 입사해 있었고, 김택진 대표는 현대전자 소속으로 한컴에 파견 나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로그’라는 텍스트 롤플레잉 게임에 빠져 있었고, 이 인연으로 빠르게 친해졌다. 이때 김택진은 게임 기획과 제작·프로그래밍에 관해 송재경이 천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1997년 엔씨소프트를 만들면서 김택진이 가장 먼저 찾았던 이가 송재경이었을 정도다. 이에 대해 ‘김택진 스토리’(비즈북스)에 “넥슨 공동 창업자였던 송재경을 엔씨소프트로 데려오기 위해 넥슨과 합병까지 생각했었다”고 언급돼 있다. 물론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송재경이 군복무 대체를 위해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던 ‘아이네트’라는 회사를 그만둘 수 없었서였다.

그런데 1997년 말 ‘외환위기’가 송재경을 영입할 기회를 제공했다. 외환위기가 불거지면서 아이네트는 송재경이 진행하던 ‘리니지’ 프로젝트를 취소시켰다. 또 구조조정 차원에서 아이네트가 게임개발 사업을 ‘마리텔레콤’이란 곳에 매각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하자 김택진의 승부사 기질이 발동했다. 김 대표는 송재경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아이네트 게임개발 사업 인수를 제안했다. 그것도 아이네트가 개발을 취소시킨 리니지가 향후 개발돼 수익을 올리게 되면, 이 수익의 일정 부분을 로열티로 지급한다는 조건까지 수용하며 인수했다.

송재경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사실상 엔씨소프트의 모든 것을 건 결정이었다. 김택진의 이 결정이 송재경의 마음을 움직였고 리니지 개발팀은 이탈 없이 엔씨소프트로 이전됐다. 김택진의 판단은 적중했다. 1998년 리니지가 세상에 나왔고, ‘대박’을 쳤다. 김택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 선택은 엔씨소프트에 엄청난 돈을 안겨 주며 초고속 성장을 이끌어냈다. 1999년 이후 매출과 영업이익이 급성장했다.

리니지 이후에도 2003년 ‘리니지2’를 시작으로 ‘길드워’ 등 연달아 대박 게임을 내놓았다. 이를 통해 엔씨소프트는 넥슨·NHN·CJ인터넷(현 CJ E&M) 등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IT 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 김택진이 넥슨 김정주 대표와 함께 한국 게임·IT산업의 아이콘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올인’ 마다않던 승부사

게임업계에서는 2006년부터 2008년 사이 침체됐던 엔씨소프트의 상황 반전에 김택진의 승부사 기질이 한몫을 했다는 평이 있다. 엔씨소프트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진출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다. 리니지의 인기는 시들해진 반면 ‘타뷸라라사’ 등 후속 게임은 전작들만 못하다는 혹평 속에 고객이 외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2007년에는 매출이 역성장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성장 정체가 깊어졌다.

이때 김택진이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2008년 ‘아이온’이란 게임 한 편 제작을 위해 230억원의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또 이를 최대한 빠르게 집행했다. 당시만 해도 경쟁사는 물론 대기업 계열 게임사들조차 게임 한 편 개발비로 많아야 수십억원을 투자하는 정도였다. 그랬던 시절에 김택진은 게임 하나를 만들기 위해 230억원을 투자한 것이다. 참고로 김택진이 이를 결정한 2008년 엔씨소프트의 영업이익은 500억원 정도였다. 영업이익의 50% 가까운 돈을 게임 하나에 투자한 셈이다.

김택진의 승부수가 이번에도 통했다. 아이온은 리니지에 버금가는 화제를 일으켰다. 한국뿐 아니라 대만과 중국, 유럽에서도 대박을 냈다. 그의 선택이 엔씨소프트의 상황을 반전시켰다. 2008년 엉망이던 실적이 2009년 반전했다. 1년 만에 매출은 거의 두 배, 영업이익은 세 배 이상 증가했다.

‘올인’도 마다않는 김택진의 승부사 기질을 엔씨소프트 구성원들이 거부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김택진식(式) 경영에서 빠지지 않는 ‘수평적 기업문화’가 그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이 김택진과 엔씨소프트의 성장 저력이 만들어지는 바탕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택진은 자유롭게 일했던 ‘한글과 컴퓨터’를 거쳐 벤처기업 ‘한메소프트’를 직접 창업해 구성원들이 수평적으로 일하는 문화에 익숙하다. 또 짜인 틀 속에서 상하관계가 분명했던 재벌 계열사 현대전자에도 몸담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재계 1위 재벌그룹 계열사이던 현대전자가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목격했다. 그랬기에 기업문화가 기업의 성장과 존속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꿈꿀 수 있게 해줘 감사”

김택진식 수평적 기업문화는 곧잘 ‘서클론(論)’으로 불린다. ‘대학교 동아리처럼 편하고 격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만 누구라도 갖고 있는 능력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함께하는 임직원이 ‘고용주와 피고용자’ ‘또 상사와 부하’ 같은 수직적 관계로 굳어지는 순간 창의력과 기발함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창의력과 기발함을 잃어버린 게임·IT기업은 성장엔진이 멈출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취재 중 만난 엔씨소프트 직원은 “생각하고 원하던 것을 시도해 볼 업무 분위기는 갖춰져 있다”며 “경영진이 직원들의 창의력과 아이디어를 존중해 주는 편”이라고 했다.

자율성과 개성, 창의적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김 대표의 경영 스타일이 엔씨소프트의 수평적 기업문화에 바탕이 돼 줬다. 김택진 대표의 이 같은 감성 코드는 KBO 리그 제9구단 NC 다이노스에도 접목되고 있다. 올해 프로야구 1군 무대에 등장한 KT 위즈를 제외하면 사실상 막내 구단인 NC 다이노스의 돌풍에서도 김택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NC 다이노스의 연고지는 경남 창원이다. NC 다이노스의 등장 전까지 창원은 부산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의 연고지였다. 롯데의 골수팬이 즐비했던 경남과 창원을 한순간에 NC 다이노스의 텃밭으로 돌려놓는 데 김택진의 역할이 있었다.

2013년 4월 2일, 연고지 창원에서 첫 홈경기에 등장한 김택진은 팬들을 향해 “꿈을 꿀 수 있게 해줘 감사한다”며 “그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거부(巨富) 구단주가 일반 팬들과 똑같이 팀의 점퍼를 입고 등장해 전한 인사가 경남과 창원의 골수 롯데 팬들까지도 NC 다이노스 지지자로 바꿔 놓는 데 한몫을 한 것이다.

아내 사장에‘가족 경영체제’로

NC 다이노스의 ‘감독’ 선임에서도 김택진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NC 다이노스 감독 자리는 창단 전부터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이들이 거론됐다. 실제 많은 인물이 추천됐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이태일 사장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구단주보다 야구단 대표가 더 많이 알 테니, 더 많이 더 잘 아는 이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김경문 감독은 이렇게 NC 다이노스를 맡았고, 무서운 팀으로 끌어올렸다. ‘리니지’ 개발 과정에서 자기 색을 지우고 ‘리니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송재경에게 개발을 맡겼던 때와 비슷한 모습이다.

이 같은 ‘감성’과 ‘승부사 기질’이 김택진을 게임산업의 스타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최근 경영자 김택진을 향하는 시선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감성은 많이 퇴색했고, 승부사 기질은 자기 이익 방어를 위한 ‘고집’으로 바뀌고 있다는 시각이 크다.

지난 1월 그가 아내 윤송이(40)씨를 엔씨소프트 사장으로 내세운 것은 여전히 논란이다. 윤송이씨는 맥킨지 서울사무소와 SK텔레콤을 거쳐, 2007년 11월 김택진 대표와 결혼했다. 그리곤 2008년 11월부터 엔씨소프트 최고전략책임자(CSO·부사장)로 등장했다. 그리곤 올해 1월 엔씨소프트의 사장이 됐다. 문제는 윤씨의 경영능력이다. 천재소녀라는 이미지만 있을 뿐, ‘SK텔레콤 시절 손댔던 거의 모든 사업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 윤송이씨를 사장으로 내세운 김택진의 승부는 엔씨소프트의 경영구조를 사실상 ‘후진적 가족경영 체제’로 변질시킨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결국 윤송이씨를 내세워 강화시킨 가족경영 사건은 최대주주였던 넥슨과 경영 분쟁으로 확전됐다.

김택진의 변심에 대한 시장의 우려는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윤송이 씨는 2012년에 엔씨소프트의 북미·유럽 법인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엔씨소프트의 북미·유럽 법인은 2014년 말까지 흑자를 냈다. 그런데 윤송이 씨가 엔씨소프트의 사장직을 맡기 시작한 후인 올 상반기(1월~6월), 그가 맡고 있던 북미·유럽 법인 엔씨웨스트홀딩스가 140억원 넘는 영업적자를 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경영컨설팅 전문가는 “엔씨소프트의 가족경영 강화는 사실 기업 경쟁력 약화와 불투명 경영으로 비판을 받는 일부 재벌의 족벌경영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엔씨소프트 황순현 전무는 “적자였던 해외 법인을 지난 3년 동안 흑자로 바꾼 것에서 글로벌 경영능력이 검증 됐다”며 “엔씨소프트는 사외이사로 구성된 보상위원회 및 감사위원회를 운영하는 등 경영 투명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넥슨과 자본 제휴, 경영권 분쟁, 아내 윤송이씨 사장 선임, 넥슨 방어용 넷마블과의 자본 제휴 등 최근 벌어진 김택진의 기업 운영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한 상황이다. 취재 중 김택진에 대한 평을 요청하자 교수들과 업계 관계자들의 반응은 이전과 매우 달랐다. 한국 1세대 벤처기업가로 의료기기 회사 메디슨을 창업했고 현재는 대학에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는 L 교수는 “(김택진 리더십에 대해) 노코멘트 하겠다. 내가 얘기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언급을 피했다. 다른 이들 역시 “할 만한 말이 없다”거나 “평하기 힘든 부분”이란 반응이었다. 그만큼 2000년대 열정적 모습을 보였던 김택진과 2015년의 김택진은 많은 면에서 달라져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게임·IT산업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재미있는 설문조사가 있다. 지난 10월 20일 직장인 블라인드SNS 운영사 팀블라인드가 게임기업 관계자 186명에게 ‘게임업계 종사자가 생각하는 업계 대표 인물’을 물었다. 넥슨 창업자 김정주 엔엑스씨 대표(32.3%)에 이어 김택진 대표(29%)가 2위였다. 또 지난 9월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직장인 2151명에게 ‘함께 일하고 싶은 CEO’를 물었다. 이 조사에서 김택진은 5위에 올랐다. 이처럼 최근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수성가형 기업인 김택진을 통해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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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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