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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 기고]  개교 100년 원불교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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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403호] 201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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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개교 100년 원불교의 사람들

김무성도 김종인도…

박청천  원불교중앙총부 훈련교화부 교무·초기교사 집필 

▲ 서울 동작구에 있는 원불교 서울회관 전경.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지금부터 백 년 전, 신록이 날로 빛을 더하는 생생약동 봄날에 전라남도 영광 두메산골의 한 젊은 농부가 도를 깨쳤다.
   
   그가 도에 뜻을 둔 것은 네 살 적 엄마 등에 업혀 동산에 달이 오르는 것을 보고 “엄마, 달 따러 가” 보채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곱 살 적에 글공부를 시작하며 ‘하늘 천 따 지’를 배우며 “하늘은 왜 푸르며 바람은 왜 불며 구름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하늘 천(天) 자에 머물러 더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소년은 그 의심을 풀기 위해 3년간 산신 기도하러 다니고, 도사 소설을 읽은 뒤로는 도사를 찾아 3년간 끈질기게 다녔다.
   
   당시 조선 최고 도인 두 분이 계셨다. 불교계의 경허선사와 선도계의 증산상제이다. 그때 경허는 일대시교를 접고 삼수갑산에 은거할 때요, 남도 땅의 증산은 화천(化天) 3년을 앞두고 당신 경륜을 계승할 법기를 찾고 있을 때였다. 이 땅의 최고 도인 그분께 소년은 16~18세까지 3년간 한 달에 한 번 이상 수십 번 끈질기게 찾아갔을 것이다. 이 무렵 남도 땅에는 증산상제의 태을주 치성이 한창이었다. 태을주 치성을 하여 병이 낫고 소원성취한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상하게도 증산은 소년을 정식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년의 전도에 고무적인 언사와 희망을 아낌없이 불어넣으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그를 가까이 두지 않았다. 그 흔적은 두 분의 행적과 언행록에 역력히 반영되어 있다. 증산이 소년에게 그렇게 한 것은, 소년 뒤에 증산을 만나 제자가 되고 태을도(普天敎) 교단을 만든 차경석(車京石)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650만의 신도를 확보하고 시국의 황제(天子)라고 자처하지만, 종내 간교한 일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말로가 될 것을 예견한 것으로 볼 때, 이는 소년에 대한 증산의 내밀한 원려(遠慮)로 볼 수밖에 없다. 보천교뿐만 아니다. 한말에 출현하여 교세를 떨치던 민족종교 천도교와 대종교(大倧敎)는 극악한 일제의 탄압으로 지하로 잠적한다. 증산은 박중빈이 불법(佛法)을 연원으로 회상을 펴야 회체(會體)를 유지할 것을 예견한 것 같다.
   
   강증산 서거 이듬해 경술국치를 당하고 소년은 부친상을 당한다. 겸하여 영광 부자로부터 성화 같은 채무 독촉에 시달려 주막집도 해보나 실패하고, 임자도 근해 타리섬의 민어 파시(波市)에 가 거금을 벌어 채무 청산하지만 이내 빈털터리가 된다. 다시 납덩이같은 무게로 “이 일을 어찌할꼬” 도업이 남아 있었다. 빈자 발도심(貧者發道心)이라, 하루 한 끼니 잇기도 어려울 정도로 극빈의 지경에서도 그는 구도일념을 놓치지 않았다.
   
   24세 무렵에는 그의 집념이 워낙 외골수여서 복부가 물동이 올려놓은 것처럼 팽만하였고 360 기혈이 막혀 온몸은 종기로 뒤덮여 동네 사람들은 그를 문둥병자로 알고 피해 다녔다. 스물다섯 살 적에는 아침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든 채 점심에 이른다든지, 오뉴월 한낮에 어디를 가던 중 소피를 보다가 바지를 내린 채 한나절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든지, 법성포 장보러 가다가 나루터에서 해거름까지 서 있었다든지, 그렇게 1년간 입정돈망(入定頓忘)이 계속되었다. 시절이 무르익어 스물여섯 살 되던 해, 마침내 그가 도를 깨닫겠다는 집념마저 놓는 날 그는 확연 대오하였다.
   
   
▲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미래 종교는 일하는 생활종교
   
   병색이 씻은 듯 사라지고 얼굴에 광명이 어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박중빈(朴重彬)이라 하였다. 빛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다.
   
   도를 깨치고 그가 한 일은 당장 먹고사는 일이었다. 영광·법성·구수미·무장 등지의 장을 보러 다니며 시국을 관찰하는 것과 일본인 농장주들이 전개하는 간척사업 공사 현장을 둘러보며 살길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동네사람들에게 수수만년 버려진 갯벌을 가리키며 언을 막자(방언·防堰)고 말하였다.(‘防堰’은 영광 사투리로 갯벌막이, 즉 간척사업)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것은 단결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우리는 단합합시다. 경제력을 키우고 교육합시다.”
   
   박중빈은 자신의 집과 밭과 세간살이를 모두 팔아 방언 조합금으로 내놓았다. 그의 뜻에 동조하는 동네사람들도 금주·금연과 매끼니에 한 숟갈씩(匙米·시미) 근검저축하여 조합금을 모았다. 오도 후 그는 각지의 장에 다니며 석유 등 목탄 값이 폭등하는 것을 파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일본도 참전 중이었다. 그 자본금으로 구수산 골짜기의 숯을 사들여 1년 만에 10배의 수익을 올렸다. 그 자본금으로 구절양장 산골 동네 앞까지 들어온 바닷물을 막을 계획을 세웠다. 수수만년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개펄을 동네사람들과 합심하여 막아 1년 만에 8만5950㎡(2만6000평)의 옥답을 만들었다. 논 한 배미 없고 큰애기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말도 못 먹던 동네가 논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각후 박중빈은 선서, 유서, 성경 그리고 불서를 읽고 탄식하였다. “옛 어른들께서 이미 다 아셨구나. 불법은 무상대도(無上大道)라 불법을 연원으로 회상을 펴리라.” 일제는 저네들의 신도와 불교, 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고 우리 민족종교는 유사종교로 폄하하고 탄압하였다.
   
   박중빈은 모악산 금산사에 가서 미륵전 옆 송대에 머물며 짚신을 삼았다. 가마솥 위에 서 있는 미륵대불에게 호통쳤다. “만날 서 있기만 하고 불공만 받으면 되겠느냐. 짚신을 신고 나가서 일을 해야 미륵이지”라고 하였다. 이후 그는 호를 소태산(少太山)이라 하였다. 솥에 들어와야 산다는 뜻이다.
   
   갑자년(1924) 초여름에 소태산은 호남 교통의 중심지 이리(현 익산)에 왔다. 이리에는 법당 안에 서 있기만 하던 미륵이 마당에 나와 서 있었다. 구릉지대 작은 절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하고, 미륵산 아래 황등호숫가 신룡벌에 불법연구회라는 공동체를 열었다. 호수 서쪽을 호서(湖西)라 하고 호수 남쪽을 호남(湖南)이라 하는 국중삼호(國中三湖)라 일컫는 오래된 호수였다. 소태산은 이곳에서 황무지를 개척하여 신농법으로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고 수박 재배도 하고 축산과 양계장을 운영하여 ‘불법연구회’ 상표가 붙은 달걀을 멀리 만주까지 출하하였다. 이리경찰서에서도 자기들의 호마를 길러달라고 맡길 정도였다. 동아일보는 ‘맑은 호숫가의 이상촌 건설’이라고 불법연구회를 소개하였다. 타 종교는 물론 멀리 일본 오사카에서 견학을 오기도 하였다.
   
   “귀교의 부처님은 어디에 봉안하였느냐”는 질문에 소태산은 논밭에서 작업하고 농구를 메고 돌아오는 산업부원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우리 집 부처요”라 하였다.
   
   천주교 신자와 대화하는 중에 그들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조물주라는 말을 듣고 소태산은 “귀하의 조물주는 귀하”라고 답하기도 하였다.
   
   

   在家主義 生活佛敎 강조
   
   한 제자가 물었다. “수운 선생은 새벽에 닭이 홰를 치고 울어 만생을 깨우는 역할이요, 증산 선생은 농력 절후를 일러주는 역할이요, 선생님은 논밭에 나가 일을 하는 역할이라 비유하면 어찌하오리까.” 소태산은 “그럴듯하다”며 두 분은 선지자(先知者)와 신인(神人)이라 하였다.
   
   소태산은 오는 세상은 집집마다 생불이 살며 죄복의 소종래를 알고 있으므로 따로 교회나 절에 나갈 필요가 없으며 네 종교니 내 종교니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소태산은 오도하고 고향 마을의 수수만년 버려진 갯벌을 간척하고 최초의 교당을 지을 때 그 기둥에 17자 기다란 옥호를 달았다. ‘大明局靈性巢左右通達萬物建判養生所’ 즉 ‘크게 밝은 공동체/ 영성의 보금자리/ 사통오달 통하지 않은 것이 없는/ 창조적인 판을 만들어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라는 뜻이다. 미래 불교를 바라보는 소태산의 경륜이 함축된 옥호이다.
   
   만해 한용운은 경술국치 전에 일본 불교계를 견문하고 승려가 결혼하고도 수행하고 애국하는 것을 보고 와서 “중이 장가가야 나라가 부흥한다”는 요지의 ‘조선불교유신론’을 내었다. 현실적으로 불교 제도권 안에서 불교유신은 어렵다. 수천 년 내려오던 관습을 쉽게 깨기 어렵다. 결국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찰령이 반포되고 결혼한 승려에게만 주지직을 주는 제도를 강행하여 승려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여론이 일었다.
   
   소태산은 ‘조선불교혁신론’이라는 책자를 내고 불교의 제도권 밖에서 새롭게 재가주의(在家主義) 불교 방안을 내놓았다. 구성원 모두가 기혼자들이므로 시대불교·생활불교·대중불교를 강조하였다. 허례가 심하고 번거로운 관혼상제를 간소화하고, 산중불교를 재가불교로, 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어려운 한문 경전에서 쉬운 한글 교과서로, 등상불 숭배를 심불(心佛) 신앙과 수행을 강조하였다. 소태산은 거진출진(居塵出塵) 사상, 즉 재가주의 생활불교를 강조하였다.
   
   일찍이 진묵 대사가 “진승(眞僧)은 하산(下山)하고 가승(假僧)은 입산(入山)한다”는 예언이, 강증산이 “내 일은 판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예언이 이로써 실현되었다.
   
   1930년대에 가장 파격적인 것은 소태산의 여권신장운동이다. 부부권리 동일을 주장하고 부부 각자가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는 부부각산(夫婦各産)을 주장하였다. 이는 나중에 주요 교리인 4요의 자력양성(自力養成)으로 발전한다.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과부나 첩, 기생들도 일정 교육을 이수하면 목사나 신부처럼 교무 자격을 갖고 단상에 올라 당당하게 설교하였다.
   
   
   한판 크게 변모할 때
   
   소태산을 두고 ‘평범한 성자’라고 한다. 불법연구회는 광복이 되자 정산 종법사 대에 비로소 정식 종교로 등록하고 교명을 ‘원불교’라 하였다. 원불교는 못난 사람들이 다니는 종교라는 말들을 한다. 세상에 나가 난 체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들 중에 각 방면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가 많다. 경제계에 이건희(삼성전자 회장)·신용호(교보생명 창업주), 언론계에 홍진기(전 TBC 회장)·홍석현(중앙일보 회장)·김상만(전 동아일보 회장), 문화계에 홍라희(리움미술관장)·안도현(시인)·김형수(평론가)·정도상(작가)·최차란(차, 도예)이 있으며, 법조계에 김병노(초대 대법원장)·김종대(전 헌법재판장), 교육계에 박길진(전 원광대 총장)·고윤석(미주선학대 총장)·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이면우(전 서울대 교수)·민준식(전 전남대 총장)·오희필(전 대전대 총장), 사회사업에 황온순·박청수·김혜심(남아공·스와질란드 의료봉사), 행정계에 조상호(전 체육부 장관)·정세현(전 통일부 장관)·김정수(전 보사부 장관)·조정제(전 해수부 장관)·조기상(전 정무장관)·박재완(전 기획재정부 장관)·김태호(전 경남도지사)·최문순(강원도지사)·김도훈(산업연구원장), 정계에 박정립(독립운동가, 오사카 교무)·변극(독립운동가, 원광대 한의대 초대학장)·정해영(전 6선 의원)·정재문(전 5선 의원)·조세형(전 5선 의원)·장경순(전 5선 의원)·김무성(새누리당 대표)·김종인(더민주당 대표)·김성곤(전 4선 의원), 예술계에 추송웅·임이조(한국무용), 국악인에 김월하(창)·이생강(대금)·조상현(창)·신영희(창), 서예인에 강암 송성용·남정 최정균·여산 권갑석, 미술인 최용신(어진화가)이 있다.
   
   원불교는 개교 100주년을 기하여 이제 한판 새롭게 변모할 때가 되었다. 소태산은 각후 첫 법어 중에 ‘시대를 따라 학문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학문이란 새 교법이다. 법이란 물 수() 변에 갈 거(去)이니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사는 게 법이다. 한국 사회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민중의 목마름을 적셔줄 생수는 무엇인가, 세계 대세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종교가 이래도 되는가, 종교와 영성 문제 등등을 반조하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시대를 따라 새 교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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