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나무(부분)
생명의 나무(부분)

성서는 천지창조로 시작된다. ‘태초에’ 신은 우주만물을 만들었다. 특히 사람을 포함해 생물을 ‘종류마다’ 각각 창조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런 창조주를 믿는 종교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발달로 창조설은 크고 작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충격적인 도전이 바로 진화론이다. 찰스 다윈(1809~1882)은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1859)을 통해 “모든 생명체는 종마다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화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신의 정체성까지 뒤흔들었다. 그 파장은 지금도 완전히 잦아들지 않고 있다.

종(種)이란 교배를 통해 2세를 생산할 수 있는 개체군이다. 같은 종일지라도 그 안에 변이(variations)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변이는 개체마다 보유한 각각 다른 형질을 가리킨다. 사람만 해도 생김새나 성격이나 체질이 제각각이다. 다윈도 갈라파고스군도에서 섬마다 부리 모양이 다른 새들을 관찰했다. 나중에 그것들이 같은 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한편 모든 생명체는 생존할 수 있는 개체 수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낳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극심한 생존경쟁을 피할 수 없다. 이때 환경에 가장 적합한 변이를 가진 개체들만 살아남아 자손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이다. 이를 통해 장기간 변이가 후대로 전달, 축적되면서 서서히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 이런 과정이 바로 진화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당시에는 획득형질 유전설이 회자되기도 했다. 기린이 목이 긴 것은 높은 곳의 먹이를 먹으려고 자꾸 목이 길어졌고, 그렇게 얻어진 형질이 후대에 전달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운동으로 아무리 몸매를 가꾸어도 자식이 몸짱으로 태어나는 일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목이 긴 변이를 가진 기린이 장기간 자연선택을 반복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종의 기원’에는 수식(數式)이 단 하나도 없다. 오로지 간단한 그림 하나만 달랑 들어 있다. 이것은 나무둥치로부터 나뭇가지가 갈라져 나오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속에 진화론의 핵심 개념이 오롯이 담겨 있다. 거기서 나뭇가지들은 종이고 나무둥치는 공통조상을 의미한다. 나중에 학자들은 이 그림에 ‘생명의 나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침팬지가 사람이 된단 말이냐?” 이런 투정(?)은 진화론에 대한 통속적 비판 중의 하나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침팬지나 사람은 같은 둥치에서 갈라져 나온 나뭇가지이다. 즉 머나먼 과거에 같은 조상을 둔 이웃 종일 뿐이다. 따라서 침팬지가 진화를 거쳐 인간이 된다는 것은 부질없는 오해이다.

다윈은 진화의 증거를 지질학적으로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당시로서는 성과가 불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아프리카원인(猿人), 베이징원인(原人) 등의 화석이 발견되어, 인간의 진화 과정이 일부 드러났다. 또한 최근에 공룡과 새의 중간 동물의 화석, 육상 포유류와 고래의 중간 동물의 화석 등 다양한 발견이 잇따르고 있다. 이른바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s)’가 차츰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화석들은 새로운 종이 출현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좌) 찰스 다윈. (우) ‘종의 기원’ 초판
(좌) 찰스 다윈. (우) ‘종의 기원’ 초판

‘종의 기원’ 초판 1250부는 출간 당일 바로 매진되었다. 이처럼 진화론은 자연계의 진리로 빠르게 수용되었다. 처음에 종교계는 부정과 단죄로 맞섰으나, 20세기 중반 무렵부터 차츰 적극적 대응에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개신교 일각의 창조과학이다. 거기서 ‘즉각적 창조론’이 제안되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기록대로 신이 엿새(144시간) 만에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입장이다. 아쉽게도 현대과학과 아무런 접점이 없다.

그 후에 등장한 대응으로 ‘점진적 창조론’이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날’(히브리어 ‘욤’)을 24시간이 아니라, 탄력적인 ‘시대’ 개념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타임 라인을 그대로 인정한다. 즉 46억년이라는 지구 역사 전반에 걸쳐 신이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를 인정하지 않고 종마다 창조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비교적 최근에 제시된 것이 ‘유신진화론’이다. 이것은 진화를 사실로 수용하되, 그 자체가 신의 섭리라는 견해이다. 한마디로 신이 진화를 창조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영육(靈肉)이 모두 진화의 산물인지, 육만 진화의 산물인지 등의 이론(異論)이 있다. 이 입장은 진화론을 거의 온전하게 인정하여 갈등을 상당 부분 해소한다.

한편 가톨릭교회의 대응은 개신교보다 다소 유연하다. 이미 1950년에 비오 12세 교황은 진화론을 “인간 발달에 대한 타당한 접근”이라고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6년에 “인간의 육체가 그 이전의 생물체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신이 직접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진화론을 온전히 인정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현 교황은 2014년에 “생명이 진화한다는 논리(진화론)가 교회의 가르침(창조론)과 충돌하지 않는다”면서 “(우주의) 빅뱅이론과 (생물의) 진화론 또한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유신진화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반면 개신교는 그 특성상 다양한 견해가 혼재해 갈등 중이다.

처음에 진화론을 접한 종교계의 당혹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다윈도 신앙의 문제로 ‘종의 기원’의 발표를 주저했다는 추측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신은 성서뿐만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드러낸다. 통로가 다르다고 해서 신의 뜻이 다를 리가 없다. 설사 자연에서 얻어진 진리라도 ‘확실하다면’ 그것 또한 신의 뜻일 것이다.

인간은 창조된 것인가, 진화한 것인가. 이것은 인간을 어느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의 문제이지, 결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신이 인간을 지었다면, 인간을 지은 그의 뜻도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인 본질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종교와 과학은 그 본질, 즉 진리로 향하는 다른 접근로(路)일 뿐이다.

물론 종교가 중심적인 접근로이다. 그러나 과학도 보조적인 접근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처음에야 다소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결국에는 더욱 깊은 성찰을 통해 우리에게 새롭고 풍성한 진리를 가져다 준다. ‘종의 기원’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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