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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418호]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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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워싱턴에서 古代도시 페르가몬까지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의 원형을 찾아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Dying Gaul)’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렸던 ‘페르가몬과 고대 헬레니즘 왕국전(Pergamon and the Hellenistic Kingdom of the Ancient World)’이 최근 막을 내렸다. 지난 4월부터 3개월간 이어진 이 전시에는 연일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폐막 직전 이 전시를 보면서 필자는 지난 4월 다녀온 페르가몬(Pergamon)의 추억을 다시 떠올렸다. 고대 로마 시절, 아나톨리아(Anatolia) 문명을 꽃피웠던 고대도시 페르가몬의 유적들이 왜 난데없이 독일 베를린에 가 있는가를 알게 된 것도 페르가몬에서였다. 고대도시 페르가몬은 현재는 터키에 속해 있으며, 지금은 베르가마(Bergama)로 불린다.
   
   당초 페르가몬을 찾은 이유는 한 조각상 때문이었다. 조각상과의 조우(遭遇)는 2014년 2월, 미국 워싱턴DC 국립미술관(www.nga.gov)에서였다. 당시 이곳에서는 ‘이탈리아 특별문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을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한 대리석 조각이 전시됐다. 1층 중앙분수대 바로 앞에 설치된, 그 유명한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Dying Gaul)’다. 프랑스와 독일에 걸쳐 있는 알프스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켈트족의 후손이 갈리아 전사다. 기원전 51년 로마의 카이사르가 평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 터키 페르시아를 무대로 활동했던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이었다. 대리석상은 전쟁 중 죽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갈리아 전사의 기상이 드러난, 예술사에 남을 수작이다.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는 문자 그대로 죽음을 눈앞에 둔 전사의 최후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칼을 잡을 힘조차 없는, 털썩 주저앉은 채 초점을 잃은 눈으로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전사가 주인공이다. 벌거벗은 몸이어서 칼이나 화살을 막아낼 방어장비는 아예 없다. 칼에 찔려 흘러내리는 오른쪽 가슴의 피는 뜨겁고도 세차게 느껴진다. 믿기 어렵지만,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는 진품이 아니다. 청동상을 모델로 한 복사품이다. 그리스 청동상이 원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로마 대리석 작품의 대부분은 그리스 청동상의 ‘짝퉁’이다. 그러나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창조해낸 곳이 바로 로마다.
   
   

   로마에 필적하는 메트로폴리탄
   
   당시 전시회에서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오리지널 청동 조각상의 출처다. 원래 어디에 세워진 조각을 복사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터키 에게해에 인접한 고대도시 페르가몬이 답이었다. 터키는 그리스 로마 시대 때 아나톨리아로 불린 곳이다. 현재는 이슬람 문화권에 들어가 있지만, 기원전 4세기부터 600여년간은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 속했다.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이다. 아테네와 로마에 필적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도시였다.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 인구는 무려 20만에 달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가 페르가몬 한가운데 있던 제우스(Zeus) 제단 주변 청동상을 본뜬 것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 조각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필자는 결국 지난 4월 페르가몬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제우스 제단의 모습과,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의 원형인 제단 주변의 조각상들을 보고 싶었다. 그리스 로마 당시의 예술작품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몇몇 사람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다. 모두가 마음과 힘을 합쳐 창조해내는, 공화국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예술이라 불리지만 당시의 조각이나 그림은 인간의 즐거움과 무관했다. 신에게 바쳐지는 신성한 경외(敬畏)의 증거이자 공물이었다. 그리스 로마 조각에서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같은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만이 아닌, 신의(神意)에 의탁하는 인간들의 열정이 페르가몬 전체에 드리워져 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해진다.
   
   베르가마는 시리아 난민 문제로 언론에 자주로 오르내리는 터키 이즈미르(Izmir)에서 북쪽으로 100㎞ 정도 떨어져 있다. 터키 에게해 주변 지역은 그리스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올리브 나무, 눈부신 태양과 이름 모를 들꽃, 낮은 언덕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염소와 양…. 서로 다른 종교로 인해 철천지 원수로 돌아선 듯하지만, 에게해를 사이에 둔 터키와 그리스는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너무도 닮아 있다.
   
   베르가마는 인구 20만명의 도시로 주된 산업은 관광과 카펫이다. 고대도시 페르가몬은 도시로 들어서는 순간 곧바로 발견할 수 있다. 산 정상에 우뚝 솟은 그리스풍의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달러 정도를 주면 정상까지 왕복운행하는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마치 경주 석굴암에 오를 때처럼 굽어진 길이 이어진다. 고대도시가 대개 그러하듯 정상에서 만난 페르가몬의 모습은 황량하고도 쓸쓸하다.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겠지만 바람소리만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있었다는 제우스 신전을 찾아나섰지만, 이오니아 스타일의 대리석 기둥과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 특별한 것이 없다.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에 준할 만한 조각상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1만여명을 수용했다는 30도 각도가 됨 직한 언덕 위의 야외극장이 눈에 들어올 뿐, 페르가몬의 영광은 2000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먼지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황량한 페르가몬의 풍경이 세월이 아닌 탐욕스러운 인간 탓이란 사실을 안 것은 택시 운전사 덕분이다.
   
   “여기 남아 있는 유물 유적의 1만배 정도가 독일 베를린에 옮겨져 있다. 19세기 독일인들이 와서 전부 훔쳐갔다. 터키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독일 정부는 복사판이라면 제공하겠다면서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 페르가몬의 아스클레피온 유적지에 있는 야외극장.

   독일인이 훔쳐간 페르가몬
   
   택시 운전사가 말하는 훔쳐간 유물·유적의 현주소는 베를린에 소재한 ‘페르가몬 박물관’(www.smb.museum)이다. 독일에서 가장 큰 박물관 중 하나로, 입장객 수를 기준으로 할 때 독일 최대의 문화공간이다. 박물관 중심에 들어선 제우스 제단이 최대 인기 명소다. 터키 페르가몬에 있던 제단을 100% 똑같이 재현한 공간이다.
   
   기차(汽車)공학도 출신의 고고학자 칼 휴먼(Karl Humann)이 터키 페르가몬 발굴의 주역이다. 1886년 독일이 정부 차원에서 벌인 페르가몬 유적 발굴의 총책임자로, 이후 독일 고고학계의 최고봉에 올라선 인물이다. 19세기 말 독일은 신생독립국이었다.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 탄생을 천명한다. 고대 유물 유적 발굴과 전시는 신생 독일제국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모델은 1801년 런던이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정문의 장식품을 통째로 뜯어와 영국박물관으로 옮긴 토머스 브루스(Thomas Bruce)가 칼 휴먼의 멘토였다.
   
   그리스 주재 외교관이었던 브루스는 터키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아테네 신전 주변의 유물·유적을 아무런 제재 없이 쓸어담았다. 터키의 술탄은 식민지 나라의 유물·유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영국은 파르테논 유물·유적을 런던으로 수송한 즉시, 영국의 권위와 역사 만들기의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대내적으로는 영국이라는 국가를 튼튼하게 지켜줄, 이른바 네이션빌딩(Nation Building)의 근거로 그리스의 파르테논이 등장한 것이다. 기원전 4세기 해양대국 고대 그리스를, 해가 지지 않는 19세기 대제국 영국과 일체화시킨 것이다. 사실 그리스 문화가 서구유럽 문화 문명의 원형으로 정착한 것은 전적으로 브루스 덕분이라 볼 수 있다. 영국박물관 1층 중앙에 들어선 75m 길이의 파르테논 장식 조각들은 바로 최전성기 영국의 모습인 동시에, 터키에 종속됐던 그리스의 뼈아픈 상처이기도 하다.
   
   그리스 정부는 터키 술탄과의 거래가 무효라 주장하면서, 파르테논 유물·유적 반환을 영국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갖고 있는 영국에 대한 반감의 상당 부분은 바로 파르테논을 둘러싼 역사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은 바로 영국박물관 내 파르테논 전시관의 복사판이라 보면 된다. 19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의 나폴레옹에 이어, 뒤늦게 네이션빌딩에 나선 독일이 고대사를 통한 새로운 역사 창조에 나선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약육강식 19세기 제국주의 역사가 그러하듯, 얼마나 훔치고 약탈했는지가 당시 문화 문명의 정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였을 듯하다. 돈으로 매수하고, 대량으로 훔치고, 불법으로 약탈한 것이 많은 나라가 21세기 선진 문화국으로 추앙받고 있다.
   
   페르가몬은 산 위의 도시에 그치지 않는다. 기원전 282년에 등장한 필리타에루스(Philetaerus) 왕을 시작으로, 로마로 흡수된 기원전 133년까지 149년간 아나톨리아 남부지방을 지배한 거대 왕국이기도 했다. 이른바 아탈리드(Attalid) 왕조다. 페르가몬은 그 왕국의 수도에 해당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열병으로 급사한 기원전 323년 이후, 유럽과 아시아로 이어진 마케도니아 대제국은 4개 권역으로 분할된다. 아나톨리아 지방은 셀루시드(Seleucid) 제국권에 들어간다. 아탈리드 왕조는 셀루시드 제국에서 파생된 나라로,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를 원류로 한다. 아테네 파르테논에 나타난 전성기의 그리스 문화 문명이 아탈리드 왕조에 그대로 계승된 것이다.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170년간이 최전성기다. 페르가몬은 아테네보다 200여년이 흐른 후인 기원전 2세기부터 문화강국으로 재등장한다. 워싱턴에 전시된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는 기원전 225년 아탈리드 왕조가 갈리아에 맞서 승리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 대리석상을 제우스 신전에 바쳐 신에게 감사하고, 아탈리드 왕조의 번영을 기원한 것이다.
   
   미적 기준에 대한 이론(異論)이야 있겠지만, 아탈리드 왕조가 남긴 조각들은 그리스가 남긴 그 어떤 작품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로마 한복판 ‘팔라조 알템프스(Palazzo Altemps)’ 박물관에 있는 ‘루도비시 갈리아 전사(Ludovisi Gaul)’는 고대 그리스 예술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가슴에 와닿는 역작이 아닐까 싶다.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와 함께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에 설치된 조각상이다. 그 누구라도 ‘루도비시 갈리아 전사’를 보게 되면 조각에 대한 관심과 감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같은 인류의 역작을 창조해낸 곳이 바로 아탈리드 왕조의 페르가몬이다. 독일은 그곳을 철저히 약탈했다.
   
   
▲ 아스클레피온 성소 중앙에 위치한 제우스 석상.

   로마시대 병원 아스클레피온
   
   페르가몬 정상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아스클레피온(Asclepeion)이란 이름의 고대 유적지를 만나게 된다. 현지에서는 집시들이 모여사는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기원전 3세기로 돌아가면 아탈리드 왕조를 지탱하던 서민들의 거주지에 해당한다. 페르가몬 산 꼭대기는 왕과 특별 신분 소유자의 거주지이지만, 바로 아래의 아스클레피온은 시장, 극장, 목욕탕, 경기장이 들어선 서민의 무대였다. 사실 아스클레피온은 페르가몬에 빠져들수록 한층 더 주목하게 되는 유적지다. 페르가몬이 로마에 흡수된 이후 나타난, 아나톨리아·이탈리아·그리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병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스클레피온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를 기린 도시다. 영어의 위생(Hygiene)이란 단어의 유래가 된, 청결의 여신 하이지아(Hygieia)가 아스클레피우스의 여동생이다. 아버지는 아폴로, 어머니는 코로니스(Coronis) 공주다. 아스클레피우스는 그리스어로 ‘자르고 튀어 나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태어날 때처럼, 제왕절개 수술에 의해 탄생된 신이다. 배를 가르고 태어난 이유는 어머니인 코로니스 공주가 아폴로의 저주로 살해됐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인물이 인간들을 치유하는 신으로 격상된 것이다.
   
   아스클레피온은 규모로 보면 정상의 페르가몬보다 훨씬 더 크다.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3차선은 될 만한 대리석 도로가 수킬로미터 이어져 있다. 2세기 최전성기에는 1만여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한다. 로마 전국에서 찾아오는 환자와 가족을 상대로 한 시장(Agora)도 엄청나다. 주의할 부분은 그리스 로마 시대 병원의 개념이다. 약이나 수술을 통한 치료와는 거리가 멀다. 아스클레피온을 찾아온 사람은 먼저 지하 숙박지에 머문다. 마음을 정결하게 하면서 제우스 신에게 기도를 한다. 신을 찬미하는 심야의 초대형 의식에도 참가한다. 예수의 제자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아스클레피온과 페르가몬을 ‘사탄의 도시’로 묘사한다. 환자들이 잠을 자는 동안 지하에는 수백수천 마리의 뱀들이 돌아다녔다. 병원 측에서 의도적으로 방사(放蛇)한 것이다. 뱀은 지혜와 치료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약국이나 병원에서도 볼 수 있는 나무를 감싸고 있는 뱀은 과거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비몽사몽간에 잠을 설친 환자들은 다음 날 어떤 꿈을 꿨는지 병원 측에 알려야 한다. 당시의 의사들은 사실 ‘해몽가’ 정도로 볼 수 있다. 꿈 얘기를 듣고 환자의 상태와 치료법을 제공한다.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감사하라”는 말이 대부분의 결론이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진단이지만, 정신적 위안과 안정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날 그 누구도 하기 어려운 일들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페르가몬은 미와 추, 성과 속, 신과 인간, 생과 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교차하는 인류 역사의 압축판일지 모르겠다. 황량하게 먼지만 남은 고대도시지만, 인간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과 유한한 운명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영원의 도시이기도 하다. 한 번 더, 아니 몇 번이라도 더 찾아가고 싶은 깊고도 넓은 로망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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