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가 수련을 심었던 물의 정원.
모네가 수련을 심었던 물의 정원.

유럽 여행을 향한 내 꿈의 불씨를 댕긴 첫 번째 여행은 유럽 박물관 기행이었다. 당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영나 교수님의 인솔로 석박사과정 학생들과 화가들이 함께 박물관 기행을 떠났는데, 나는 그 그룹에서 유일한 ‘비전공자’였다. 모두가 미술사 전공자이거나 화가였는데 나만 국문과 대학원생이었다. 나는 명백한 이방인이었기에 내 ‘무지’를 들키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지만, 박물관에 간 첫날 들통이 나고 말았다. 피카소의 도자기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하고 말았다. “피카소가 도자기도 잘 만들었나요?” 그분은 실소를 금치 못하며 나를 딱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피카소가 조각뿐 아니라 도자기에도 소질을 보였는데, 잘 모르시나 봐요?”

내 얼굴은 순식간에 발갛게 물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질문하는 용기’가 ‘무지를 숨기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른다고 움츠러들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미술 전공자가 모여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에 뭐든지 자꾸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숨기려할수록 무지는 쉽게 탄로 나기 마련이니까. 무엇보다도 책에서만 보던 그림이나 조각을 실제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미치게 좋았다. 문학청년이었던 나에게 미술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신비로운 비상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여행 이후 미술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생겨 틈만 나면 도록을 사 모으고 전시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잠깐의 부끄러움을 참고, 뭐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든 물어보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 외에는 거의 알지 못하던 내가, 미술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네의 ‘수련’ 1911
모네의 ‘수련’ 1911

그때부터 나는 유럽 여행을 갈 때마다 ‘박물관 투어’를 1순위에 놓았다. ‘이 도시에 가고 싶다’고 결정하면 일단 박물관에 있는 작품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모네나 샤갈, 피카소 같은 익숙한 화가들뿐만 아니라 퓌비 드 샤반이나 피에르 아돌프 발레 같은 다소 낯선 화가들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기갈 들린 사람처럼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내셔널 갤러리처럼 웅장한 컬렉션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점차 ‘한 작가’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박물관을 좋아하게 되었다. 파리의 로댕 박물관과 구스타브 모로 박물관, 바르셀로나의 후안 미로 박물관, 그리고 런던의 월러스 컬렉션, 베를린의 케테 콜비츠 미술관 등이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추억의 보물상자가 되어주었다. 그중에서도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눈’ 자체를 완전히 바꾸게 한 박물관이 바로 파리에 있는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이었다. 모네의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로는 루브르 근처의 오랑주리 미술관도 있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연일 북새통을 이룬다. 나의 ‘모네 사랑’이 시작된 미술관이 바로 오랑주리였지만, 조금 더 조용한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모네의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에서 ‘클로드 모네 투어’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모네 ‘투르빌 해변의 카미유’
모네 ‘투르빌 해변의 카미유’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 모네의 걸작이 한눈에

모네가 걸었던 투르빌 해변.
모네가 걸었던 투르빌 해변.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은 파리 시내에 있지만 한적하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 전철역에서 내려 박물관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커다란 말을 타고 가는 가족들을 보았을 정도로, 지도상으로는 도시가 분명하지만 뜻밖의 한가로운 전원 풍경을 살짝 품어 안은 곳이다. 공원에서 한낮의 소풍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박물관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비보(悲報)에 잠시 망연자실했지만, 그럴 때는 사진촬영을 포기하고 작품 자체에 마음껏 몰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상파의 신호탄이 된 모네의 걸작 ‘인상, 해돋이’도 바로 이곳에서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해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은 ‘인상, 해돋이’의 신비로운 이미지가 당시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모네는 혹독한 비난을 감수했지만, 색채와 형태를 고정적인 실체로 바라보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동체로 바라본 모네의 시각적 실험은 결국 긍정적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883년 쥘 라포르그(Jules Laforgue)는 “인상주의의 눈은 인간의 진화 단계 중에서도 최고의 단계에 도달했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은 공간 전체가 ‘모네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석구석 모네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컬렉션의 규모는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을 따라갈 수 없지만, 내실에 있어서는 결코 고흐 박물관에 뒤지지 않는다.

모네가 만든 꽃의 정원.
모네가 만든 꽃의 정원.

투르빌, 모네의 청춘이 살아 숨쉬는 곳

모네의 청년기를 지배한 것은 바다였다. 모네는 평생 아름다운 해안도시 투르빌을 줄기차게 그린 외젠 부댕(Eugene Boudin)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고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햇빛에 비친 바다의 변화무쌍함이 부댕과 모네의 공통적인 관심사였다. 부댕은 사진처럼 고정된 인상이 아니라 찰나의 환영(幻影)처럼 매번 변화를 멈추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야외 작업을 고집했다. 모네는 바로 그런 부댕에게서 생생한 묘사의 중요성과 야외 작업의 장단점을 고스란히 배웠다. 투르빌에서 모네는 천변만화한 바다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배웠고, 기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고수하는 묘사의 정공법만을 추구하다가는 그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결코 화폭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파리에서 살고 있는 소설가 구소은씨 부부의 도움으로 그야말로 우연히 투르빌에 가게 된 나는 그곳에 가서야 투르빌이 모네와 연관된 곳임을 알게 되었다. 모네가 투르빌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어찌나 반갑고 신이 나던지. 투르빌에서는 마치 우리나라 부산이나 속초의 해변에 늘어선 횟집들처럼 싱싱한 해산물을 바로 그 자리에서 직접 손질해서 레몬과 소스만 살짝 뿌려먹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조리를 부탁하면 굽거나 쪄주기도 하지만, 해산물 자체가 워낙 싱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즉석에서 해산물을 커다란 접시에 뷔페처럼 양껏 담아 먹는다. 바닷가재나 생굴은 물론 전복까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싼 가격이라 우리 일행은 모두 흥분해서 커다란 해산물 뷔페 한 접시를 30분도 채 넘기지 않고 싹싹 비우고 말았다.

그저 ‘파리에서 가까운 바다가 어디 있을까’ 검색하다 우연히 찾은 투르빌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자연을 가장 생동감 있는 색채와 붓터치로 담을까’를 고민하는 모네의 젊은 시절과 극적으로 조우할 수 있었다. 20대 시절 나는 모네의 관조적이고 성찰적인 그림이 마치 난해한 선문답 같아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꽃이나 인물에 대한 사랑이 너무 극진하여 대상 속으로 꿰뚫고 들어갈 것만 같은 고흐의 붓질과 달리, 모네는 그야말로 멀리, 아주 멀리서 수련과 연못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신기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모네의 그림이 좋아지는 것은 왜일까. 삶도 나 자신도, 타인들도, 현미경처럼 가까이 관찰하기를 좋아하던 20대와 달리, 지금은 ‘거리 두기’야말로 삶의 피로를 견디는 비결임을 알 것 같다. 그가 밉고 싫어서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넘어 ‘숲’을 보기 위해, 세상의 평면도를 넘어 조감도를 굽어보기 위해, 나는 모네처럼 대상에서 ‘거리 두기’를 배우고 싶어진다.

모네의 정원 뮤지엄숍.
모네의 정원 뮤지엄숍.

지베르니, 화가가 창조한 인공의 천국

모네가 그린 루앙대성당을 관람하는 사람들.
모네가 그린 루앙대성당을 관람하는 사람들.

모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바로 지베르니다. 모네가 수련 연작을 죽을 때까지 그린 곳이 바로 이곳이며, 그가 젊은 시절 새로운 형태와 색채를 연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았던 여행을 멈추고 완전히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고흐가 해바라기나 붓꽃, 농부나 우체부의 인물화를 통해 무한성을 추구했다면, 고흐는 연못 위에 떠 있는 수련을 통해 무한성에 다다르고 있었다.

젊은 시절 모네도 고흐 못지않게 방황하며 수많은 도시와 농촌, 해변 등을 전전했지만 모네는 다행히도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공동체에서 만족을 얻었고 지베르니라는 인구 300명의 작은 마을에서 지상의 천국을 발견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와 멀지 않으면서도 파리의 복잡함을 피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은둔의 장소였다. 모네가 정착하기 전까지 인구 300명의 작은 마을이었던 지베르니는 이제 전 세계에서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지베르니를 찾는 여행자들의 목적지는 하나같이 ‘모네의 정원’이다. 모네가 평생 머무르며 연못과 온실을 만들고, 무려 여섯 명의 정원사를 고용하여 온갖 꽃들과 나무들을 심고 가꾼, 모네에게 있어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모네의 집이자 화실이고, 모네 학파의 산실이며, 인상주의의 성지(聖地)인 이곳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 모네는 우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환경에서 작업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는데, 그 소망에 딱 맞는 집을 구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파리 변두리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던 모네는 마침내 지베르니에서 안식의 거처를 찾았다. 처음에는 지금처럼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었다. 지베르니는 파리 사람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고, 동네주민들은 낯선 예술가 모네를 경계했으며, 모네 또한 아직 ‘이곳이다’라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꽃과 나무들이 늘어갈수록, 그저 ‘관상용’으로 심었던 수련이 그에게 ‘최고의 오브제’이자 ‘눈부신 뮤즈’가 되어갈수록,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살아 있는 낙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아름다운 낙원이었던 것이 아니라 모네와 그의 아내 카미유, 아이들, 정원사들이 모두 나서 맹렬하게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꾼 결과 ‘꽃의 정원’과 ‘물의 정원’은 하루가 다르게 눈부신 변신을 거듭하는 인공의 천국이 되어갔다.

작가 미야사코 치즈루는 ‘가정’이란 ‘집’과 ‘뜰’의 결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노래했다. “가정이란 집(家)과 뜰(庭)로 이루어진 것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내 영혼은 노래하기 시작했다.” 부엌과 침실, 화장실 등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의식주를 실현할 수 있는 시설이 ‘집’이라면, ‘뜰’이란 꽃과 나무, 새들과 동물들, 심지어 벌레들과도 함께하는 공존의 장이다. 모네는 이 ‘집’과 ‘뜰’의 미묘한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희귀한 예술가다. ‘집’은 우리를 편안하게 보호하고 안정된 감각을 갖게 해주지만, 집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안주하는 순간 창조성은 고갈되고 나태와 권태감이 지배하게 된다. ‘뜰’에 나가 신명나게 자연과 함께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이 지나치게 외부를 향하면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추하는 판단력을 잃게 된다.

‘집’이 나의 내부를 향하는 열망을 표현하는 공간이라면 ‘뜰’은 나의 외부를 향하는 열망을 표현하는 공간이다. 도시의 아파트나 원룸은 ‘집’의 시설을 발전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연과 함께하는 ‘뜰’을 삭제해버렸기에, 현대인은 점점 우울하고 착잡하게 오직 ‘나’에게로만 침잠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나’를 지키고 보호하느라 꽃과 나무, 동물과 벌레들과 공생하는 길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네의 ‘꽃의 정원’과 ‘물의 정원’을 산책하며 나는 이 수많은 여행자들이 찾고 있는 ‘마음의 낙원’도 결국 ‘집’과 ‘뜰’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이상적인 공간이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모네는 ‘집’과 ‘뜰’을 모두 끌어안는 환상의 공간을 창조해냈고, 마침내 그 어디로도 외출하지 않고 ‘뜰’의 자유와 ‘집’의 평온을 모두 누리는 완벽한 균형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

루앙대성당, 그리고 다시 지베르니를 생각하며

모네의 연작 ‘루앙대성당’의 실제 모습.
모네의 연작 ‘루앙대성당’의 실제 모습.

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루앙대성당’을 그린 연작을 통해, 모네는 인상주의의 이론적 틀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루앙에서는 마침 대규모 인상파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모네뿐만 아니라 드가, 세잔, 르누아르, 마네, 피사로, 시슬레 등 인상파라 불릴 만한 화가들의 수많은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루앙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중세의 골목길 풍경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루앙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나는 모네가 눈길을 두었을 만한 곳들, 모네가 마음을 빼앗겼을 만한 장소들을 나도 모르게 찾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모네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 자신을 떨리게 하는 색채를 찾아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지베르니라는 ‘인공의 낙원’을 만들어내고는 더 이상 세계를 떠돌지 않았다. 거의 15년 동안 ‘여행 열병’에 걸려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어떻게든 배낭여행을 떠났던 나도 모네처럼 ‘마음의 정원’을 만들고 싶었다. 세계를 이리저리 떠돌 필요 없이 내 작은 집이 곧 소우주이자 완전한 세계인 양, 소박하게 자족할 수 있는 곳. 모네의 정원처럼 거대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가꾸는 나무, 내가 가꾸는 꽃 몇 송이는 생겼으면 좋겠다.

지베르니 전체가 온갖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거대한 팔레트였고, 모네는 호수의 물빛과 하늘빛, 바람의 세기와 태양의 광선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수련의 모습을 때로는 춤추는 요정처럼, 때로는 명상에 잠긴 수도승처럼 그려내기 시작했다. 호수에서 피어나는 평범한 수련이 그토록 천변만화한 표정과 몸짓과 색채로 이 세계를 수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단순히 관상용으로 심었던 수련이 이제는 다시 없는 뮤즈가 되어 모네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빛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무뚝뚝하고 차갑다는 평을 들었던 모네가 지베르니로 이사하자 온화하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며 반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모네를 인터뷰하기 위해, 그리고 이제는 ‘인상파의 전설’이 되어버린 지베르니의 연못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기자들이 앞다투어 지베르니로 찾아왔다. 모네가 굳이 파리로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네를 끊임없이 찾아왔다. 모네의 눈부신 화폭의 비밀이 마치 이 정원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모네는 두 번째 아내 알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심장은 항상 지베르니에 머무르고 있소.” 정말 그렇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베르니에는 아직도 모네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을. 지베르니에는 예술의 심장, 아름다움의 심장, 그리고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 품은 공감의 심장이 아직도 펄펄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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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10’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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