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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9호] 2016.10.24

한대수, 밥 딜런을 말하다

“시대를 깨운 혁명가 그는 나의 전설”

한대수  작곡가·가수 

▲ 1984년 스위스 바젤에서 공연 중인 밥 딜런. photo 연합
밥 딜런(Bob Dylan)이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은 혁명이다.
   
   어떻게 대중가수가 문학 거장들만 받는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 윌리엄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 토마스 만, 펄 벅, T. S. 엘리엇, 존 스타인벡, 파블로 네루다, 사뮈엘 베케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같은 거목들만 받는 상을 억만장자 록스타에게 주다니!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딜런이 어느 문학가 못지않게 세계인들을 감동시키고, 그의 음악과 시가 세상을 바꾸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양호한 쪽으로.
   
   나는 밥 딜런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들었다. 한창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에 빠져 있을 때였다. 노래도 못 부르는 유대인 남자가 하모니카를 불며 가사를 중얼중얼대는데, 나는 하나도 매력을 못 느끼며 무슨 이런 음악이 유행을 하나? 하고 자문을 했다.
   
   나는 1967년 미국 동부의 뉴햄프셔대학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여름방학 석 달 동안 보스턴의 유명한 ‘켄스 앳 코플리 스퀘어(Ken’s at Copley Square)’라는 음식점에서 햄버거 셰프로 일을 했다. 그때 나는 ‘비콘 힐(Beacon Hill)’에 원룸을 얻어놓고 식당에 나가곤 했다. 하루에 햄버거를 평균 500개씩 만들었다. 너무나 고되고 정신없이 바빴다. 식당 주인은 마루에 톱밥을 뿌리면서 요리를 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바닥을 청소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바빴기 때문이다.
   
   일을 끝내고 비콘 힐 아파트에 누워 있을 때였다. ‘시대는 바뀌어 가고 있다(The Times They are A-changin’)’라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나는 잠에서 번쩍 깨었다. 그의 노래가 나의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왔다. 나는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야, 대단한 가사다.
   
   “사람들아, 모여라. 당신이 이해를 못 한다고 비평하지 말라. 당신의 딸과 아들을 당신은 조종할 수 없다. 우리의 시대는 벌써 바뀌어 가고 있다.…”
   
   이 노래는 세대 차이와 세대 갈등을 노래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베트남전쟁을 일으키고, 아이들은 죽어가고, 신세대는 프리섹스라고 하여 성적 쾌락을 맛보며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인생의 철학과 ‘사랑과 평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의 세대가 본 것이고 기성세대의 이중적이고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을 깨라는 혁명가였다. 그다운 그의 모든 노래가 내 가슴을 때렸다. ‘Just Like A Woman’ ‘Mr. Tambourine Man’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Blowin’ in the wind’ 등
   
▲ 한대수씨가 이메일로 보내온 육필 원고.

   그 이후 나를 포함한 모든 작곡가들이 그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비틀스도 가사가 시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닐 영도 하모니카를 목에 걸었고, 지미 핸드릭스도 그의 노래를 재해석했다. 밥 딜런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딜런은 누구인가. 1941년 미니어폴리스의 중산층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자가 다수였던 마을에서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삼촌 소유의 극장에서 영화감상을 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반항아 제임스 딘(James Dean·1931~1955)을 사모했다. ‘이유 없는 반항’에서 주연으로 나온 제임스 딘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러다 음악적 재능을 발견해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들기 시작했다. 고독한 유대인 소년에게 탈출구가 생긴 것이다. 음악!
   
   그는 포크음악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를 숭배했다. 그는 우디 거스리가 사는 뉴욕시로 가기로 결심한다. 1961년 딜런은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 도착했다. 스무 살 때였다. 기타와 슬리핑백만 들고 뉴욕에 도착한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니치빌리지는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딜런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한 시간 반 버스를 타고 자신을 음악의 길로 이끈 영웅 우디 거스리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우디 거스리는 늙어서 신경퇴보증에 걸려 뉴저지주립병원의 병상에 누워 있었다. 수십 개의 침상이 나란히 놓여 있는 방에서 거스리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무서운 병마에 항복한 우디 거스리의 육체를 보면서 딜런은 기겁을 했다. 그러나 그는 기타를 치며 자신이 좋아한 우디 거스리의 노래를 부르며 죽어가는 노인을 위로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노인에게 친필 서명을 받았다. 딜런은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죽기 전에 자신의 음악에 큰 영향을 준 영웅을 만났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 한때 연인이었던 존 바에즈와 함께. photo AFP

   이후 딜런은 그리니치빌리지의 수많은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레퍼토리는 주로 흑인 델타 블루스, 우디 거스리, 레드벨리와 같은 고전 포크 계열의 노래였다. 때때로 자작곡도 한두 곡씩 끼워넣었다.
   
   딜런은 금방 알려지기 시작했다. 딜런이 그리니치빌리지의 가수들 세계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청년의 목소리가 꼭 노인 같았고 사포같이 거칠고 메마른 목소리가 매우 특이했다.
   
   클럽과 카페를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던 시절 딜런은 열일곱 살의 이탈리아계 수즈 로토로를 만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수즈 로토로는 미대 지망생이었다. 우연히 딜런의 연주를 보고 그에게 푹 빠진 수즈는 그가 출연하는 날마다 카페에 와 연주를 감상하곤 했다. 스물한 살의 딜런은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귀여운 소녀와 열정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4번가 근처에 원룸을 얻어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작은 방에서 유명한 화가와 유명한 록스타를 꿈꾸며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 아파트에 음악가들이 드나들었다. 피터, 폴 앤 메리, 데이브 반 론크 등이 싸구려 와인을 들고 와 서로 신곡을 보여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딜런은 수즈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수즈 어머니를 찾아갔다. 수즈의 어머니 메리는 결혼을 반대했다. “너희는 너무 어려서 결혼이 주는 무거운 책임감을 질 수 없어. 게다가 딜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네.”
   
   메리는 수즈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난다. 솔메이트라고 생각했던 수즈를 떠나보낸 딜런은 괴로워했다. 딜런은 동물이 자신의 상처를 혀로 핥듯이 사랑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폭음을 하며 괴팍한 행동을 일삼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주변 사람들은 피폐해가는 딜런을 보면서 저러다 딜런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미친 듯 곡을 썼다.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Masters Of War’ ‘Positively 4th street’ ‘Blowin’ In The Wind’ 등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두 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에 이 곡들이 수록되었다. 앨범 재킷에는 눈이 내린 날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수즈와 팔짱을 낀 채 걸어오는 사진을 실었다.
   
   그의 자작곡 ‘Blowin’ In The Wind’를 ‘피터, 폴 앤 메리’가 불러 빌보트 차트 1위에 오른다. 대박이었다. 1962년에 나온 첫 앨범 ‘Bob Dylan’은 아무런 반향도 없이 사라졌지만 두 번째 앨범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프랑스 시인 랭보와 소련 시인 옙투셴코와 비교 평가하는 글을 실었다. 이 노래는 끔찍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히피들의 혁명가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다고 깨달을 것인가? 답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네.…”
   
   이 노래는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를 뛰어넘어 철학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히피들의 기수는 바로 밥 딜런이 되었다.
   
▲ 밥 딜런의 두 번째 앨범 ‘프리윌링’. 밥 딜런이 연인 수즈 로토로와 눈 내린 그리니치빌리지를 걷고 있다.

   딜런은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맨과 합작해 자신만의 이미지 구축을 해나갔다. 그것은 ‘오만과 신비’였다. ‘오만과 신비’를 캐치 프레이즈로 스스로를 전설로 만들어나갔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의 신화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딜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시인은 앨런 긴즈버그, 아르튀르 랭보, 잭 케루악, 그리고 딜런 토머스다. 워낙 딜런 토머스를 좋아해 유대인 본명 로버트 지머맨(Robert Zimmerman)을 밥 딜런으로 바꿔 새로운 자아(ego)를 만들어냈다.
   
   이 무렵 딜런은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다. 딜런은 태평양이 보이는 작은 마을 몬터레이에서 ‘Blowin’ In The Wind’를 불렀고, 청중들은 완전 넋이 나갔다. 그때 딜런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 포크계의 여왕 존 바에즈였다. 존 바에즈는 딜런을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이후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은 서로의 음악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딜런은 1966년 7번째 앨범 ‘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를 발표한다. 나는 ‘블론드 온 블론드’를 최고의 명반으로 꼽는다. 더블 앨범 LP 4면에 수록된 곡은 개성 있고 이색적이면서도 음악적으로 완벽했다. 히트곡 ‘I Want You’부터 ‘Just Like A Woman’과 같은 발라드는 듣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나는 두 곡이 존 레논의 ‘Woman’과 더불어 록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라고 생각한다. ‘Rainy Day Woman’은 특이해서 히트한 곡이다. ‘Rainy Day Woman’은 1960년대 마약문화의 주제곡으로 자리 잡는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이 습관이 된 젊은이들에게 유머러스한 주제곡이 되었다. 그리고 두 장의 앨범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곡 ‘Sad-Eyed Lady Of The Lowlands’는 11분23초로 록 역사상 가장 긴 노래로 기록된다. 이 노래는 아름답고 슬픈, 신비스러운 세계의 심벌리즘으로 가득 찬 걸작이다. 이 곡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종교음악이라고 부르며 극찬하는 사람도 있다.
   
▲ 2012년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는 밥 딜런. photo AP

   이 모든 곡은 딜런에게 사랑을 주고 핵심적 역할을 하는 두 번째 부인 세라를 생각하면서 쓴 곡들이다. 딜런은 1965년 11월, 롱아일랜드 오크나무 밑에서 비밀리에 세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참석자는 매니저 그로스맨과 세라의 친구 한 사람뿐이었다. 딜런은 부모님도 친구도 초대하지 않았다. 딜런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지키겠다는 계산에서 이렇게 한 것이다.
   
   작곡가로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앨범 네 개를 고르라면 나는 비틀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지미 핸드릭스의 ‘Are you Experienced’, 도어스의 ‘Strange Days’, 그리고 딜런의 ‘Blonde On Blonde’를 꼽는다.
   
   딜런은 로커로서 가장 장수하는 가수다. 75세에 아직도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한다. 3인조 보컬 비지스는 두 명이 50~60대에 죽었고, 오직 배리 깁만 남았다. 존 레논은 40살에 피살되었고, 커트 코베인은 27살에 자살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올해 세상을 떠났다.
   
   딜런은 아직 살아 있고, 혼자서 상이란 상은 다 탔다. 그래미상, 아카데미상, 폴라 프라이즈상, 그리고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예술계 최고상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까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주는 민간인 최고상 ‘대통령 자유의 메달’도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 노벨상까지. 대단하다.
   
   1978년에 영국 기자가 딜런에게 물었다.
   
   “당신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내 아이들을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
   
   딜런은 자식을 여섯 명 가졌는데, 모두들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한대수는?
   
   194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68년 포크음악가로 데뷔한 한대수는 ‘한국의 밥 딜런’으로 불리며 1970년대 대중문화사를 바꿔놓았다. 1988년 미국으로 이주한 한대수는 태평양을 오가며 작곡가·시인·사진가로 장르를 넘나드는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곡으로 ‘행복의 나라로’ ‘물 좀 주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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