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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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 모두가 ‘셰익스피어가 좋다’라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입니다.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 중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아닌 여왕의 숨겨진 연인 윌리엄 드 비어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짜 숨은 작가라고 주장하는 영화 ‘위대한 비밀(Anonymous)’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익명의 작가에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선물받아 기뻐하는 여왕 앞에서, 신하는 경멸의 눈초리로 이렇게 말한다. “희곡은 악마가 만들어낸 더럽고 천박하고 야비한 우상 숭배이자 이단이다.” 그러나 여왕 폐하는 그 말을 무시하며 “그 선물을 기꺼이 받겠다”고 말한다. 청교도나 귀족들이 ‘풍기문란의 주범’이라 경멸해 마지않던 연극이 여왕에게까지 사랑을 받은 것이다. 한쪽에서는 남녀노소는 물론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당시의 극장을 폭발 직전의 화약고처럼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쪽에서는 그 난장판 같은 극장을 목숨처럼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는 후자의 편이었다.

영화 속에서 여왕은 연극에 흠뻑 빠져 그 답답한 코르셋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몰래 휙 던지기도 하고, 셰익스피어는 공연이 끝난 뒤 마치 오늘날의 수퍼스타처럼 관객들의 손에 몸을 맡기고 하늘 높이 헹가래 쳐지기도 한다. 제대로 된 조명도 특수장치도 없어 밤에는 공연을 할 수 없었던 시절, 그저 한낮에 지붕이 뻥 뚫린 낡은 극장에서 공연을 하다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와도 눈을 맞으며 연극에 흠뻑 빠진 옛사람들의 흔적이 지금도 런던에 남아 있다. 17세기에 불에 타 없어졌지만 1997년에 완벽하게 복원된 셰익스피어 글로브는 지금도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전 세계 사람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상연되는 런던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은 도시 전체가 셰익스피어 테마파크처럼 가꿔져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베로나, ‘베니스의 상인’과 ‘오델로’에 등장하는 베니스 또한 ‘셰익스피어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 생가 정원의 즉석 연극 무대. ⓒphoto 이승원
셰익스피어 생가 정원의 즉석 연극 무대. ⓒphoto 이승원

런던 불멸의 셰익스피어가 살아 숨 쉬는 곳

나는 런던의 셰익스피어 글로브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공연을 보며 과연 지금까지도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청교도를 비롯한 엄숙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희곡은 과연 어떤 면에서 그토록 미움을 샀던 것일까. 당시의 연극 비판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다. 연극장은 점점 늘어나는 실업자의 집합소이며, 주일날 교회에 갈 사람들을 유혹하는 악마의 예배당이며, 남녀 간 또는 동성 간의 문란한 만남을 부채질하는 장소라는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뒷골목의 쾌락으로 치부했던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이제는 고상한 예술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에게 주어진 악조건을 최고의 창조를 위한 기회로 탈바꿈시킬 줄 아는 변용의 귀재였다. 그의 시대에는 사설극장이 같은 공연을 10번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관객과 후원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요구하던 시기였기에 셰익스피어의 펜 끝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과연 이것이 모두 셰익스피어 본인의 작품이 맞는가’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길지 않은 작품 활동 기간 동안 가히 폭발적이고도 초인적인 속도로 작품을 써내야 했던 당시의 창작 환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이 악조건을 창조의 계기로 역전시킨다.

지금처럼 무대장치를 정교하게 만들 수 없었으니 모든 것은 배우의 대사로 해결해야 했다. 바로 그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작가와 배우의 상상력뿐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도 최고조로 타오를 수 있었다. ‘헨리 4세’에는 이런 장면도 나온다.

“부족한 것은 여러분의 상상력으로 채워서 생각해주세요. 배우는 각자 천 명의 몫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주십시오. 머릿속으로 천만대군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군마들이 늠름하게 대지를 딛고 서 있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십시오.”

당시엔 제대로 된 무대장치가 없었으니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게 무대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 시대 극장은 관객과 무대가 확연히 분리된 현대의 극장과 달리 현실과 연극의 경계도 애매모호했다. 셰익스피어는 바로 그 모호성을 창조성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지금도 공연 중간중간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방백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그때 객석에서는 폭발적인 활기가 넘쳐흘렀다. 클레오파트라가 관객에게 말을 걸자 3시간 가까이 되는 긴 연극에서 내내 서 있었던 관객 중의 한 명이 그녀에게 뭐라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고, 내 쪽에서는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가 배우에게는 또렷이 들렸는지 클레오파트라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관객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연극이 그토록 사랑받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배우가 스스럼없이 관객에게 손을 내밀어 잡는 모습, 관객이 거리낌 없이 지금 공연 중인 배우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니 바로 그 친밀감과 다정함이야말로 셰익스피어 연극의 진정한 매력이었던 것이다.

“애인을 만나러 갈 땐 학교 파한 학생들처럼 생기가 넘쳤는데, 애인과 헤어질 땐 공부하러 학교 가는 학생처럼 우울하기 그지없구나”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처럼, 연극을 보러 들어가기 전의 관객은 생기가 넘치고, 연극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학교로 가야 하는 학생처럼 풀이 죽어 있지 않았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대목을 보면 관객들에게 미리 대략적인 스토리를 다 알려주고 작가가 관객 또는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족한 점은 앞으로 보완하겠습니다.” 바로 이 다정한 소통이야말로 셰익스피어 연극이 지닌 비장의 무기가 아니었을까. 그의 연극은 이렇게 관객과의 대화 속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고쳐지고 다듬어져 더 나은 모습으로 관객 앞에 나타나곤 했다. 바로 이 상호소통의 역동적 활기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태어난 것이다.

01 셰익스피어에게 보내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편지와 메모.<BR /></div>02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의 길을 걷는 사람들.<BR />03 파리에 있는 셰익스피어 서점.<BR />04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의 식당.<BR />05 에이번강의 보트들. ⓒphoto 이승원
01 셰익스피어에게 보내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편지와 메모.
02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의 길을 걷는 사람들.
03 파리에 있는 셰익스피어 서점.
04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의 식당.
05 에이번강의 보트들. ⓒphoto 이승원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셰익스피어의 생가

셰익스피어의 생가는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60㎞ 정도 떨어진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다. 이곳의 가장 좋은 점은 지금도 그 정원에서 실제 상연 중인 연극 무대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온갖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에서 새하얀 천막을 쳐 간이무대를 만들고 정원 전체를 자유로이 무대로 활용하며 마치 ‘공연 연습’을 하듯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풀밭 위에 앉기도 하고, 벤치에 앉거나 걸어 다니기도 하면서, 셰익스피어의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자니 나는 연극을 ‘본다’기보다 연극 속의 환상적인 시공간 속을 여행하는 느낌이었다.

이 고장에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명소는 셰익스피어 생가나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지만, 여행이 끝난 뒤 마음속에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명소로 남은 곳은 바로 에이번강이었다. 나는 에이번강을 따라 노를 저어가는 보트를 탔는데, 그렇게 천천히 배를 타고 에이번강 위를 떠다닌 시간이 어쩌면 셰익스피어 시대의 느낌을 가장 비슷하게 재현하는 느낌이었다. 셰익스피어 생가나 그의 아내 앤 해서웨이의 집, 그리고 매주 빠짐없이 공연이 펼쳐지는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는 인공적으로 많이 가꾸어지고 다듬어진 장소지만, 에이번강은 셰익스피어 시대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이번강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나룻배 위에서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생생한 흔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룻배 이름이 각각 로미오, 줄리엣, 햄릿, 오셀로처럼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인공들이었다. 그 배들 중 하나를 잡아 타면 로미오와 함께, 줄리엣과 함께 항해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나는 스무 명 남짓 되는 여행자들과 함께 커다란 나룻배를 타고서 에이번강의 물결을 따라 몸을 맡긴 채 실로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눈부신 평화로움’을 맛볼 수가 있었다.

에이번 강변에는 수많은 보트하우스가 집결해 있는데 그 또한 장관이다. 그냥 별장처럼 잠깐씩 쓰는 보트하우스가 아니라 누군가 매일 숙식을 해결하고, 여러 가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물 위의 집’이었다. 그 깨끗한 강물에 매일 자기 얼굴을 비추며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달콤한 평화가 찾아왔다. 에이번 어디에서든 쉽게 찾을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흔적들을 매일 바라보면서, 햄릿 동상이나 맥베스 부인의 동상을 향해 가끔 나직이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애정을 듬뿍 품고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여행자들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악의 끝까지 걸어가 본 맥베스 부부나, 질투의 끝에서 아내를 죽여 버린 오셀로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적어도 그와 비슷한 과오는 저지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희로애락애오욕을 그 아슬아슬한 극한까지 밀어붙인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공기처럼 흡입하며 산다는 것은, 작품 속 주인공들보다 조금은 더 지혜롭게, 조금은 더 용감하게 오늘 우리 삶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는 비법이 아닐까 싶다.

01 발코니에서 줄리엣 동상을 내려다보는 여행자.<BR></div>02 베로나 줄리엣 하우스에 있는 사랑의 자물쇠들.<BR>03 베로나에서 판매되는 기념엽서들. ⓒphoto 이승원
01 발코니에서 줄리엣 동상을 내려다보는 여행자.
02 베로나 줄리엣 하우스에 있는 사랑의 자물쇠들.
03 베로나에서 판매되는 기념엽서들. ⓒphoto 이승원

베로나 줄리엣과 로미오의 흔적을 찾아서

이탈리아 베로나는 로마의 콜로세움 못지않게 거대한 원형극장으로도 유명하지만, 나는 ‘줄리엣의 집’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베로나에 갔다. 그런데 줄리엣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베로나의 광장과 골목길에 반하고 말았다. 그 전날까지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묵고 있던 나는 살짝 쌀쌀한 날씨 속에서 알프스를 바라보다가 다음 날 아침 기차를 타고 베로나에 갔다.

그곳엔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초겨울에서 한여름으로 건너뛴 것 같은 날씨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베로나 거리 곳곳의 엄청난 활기였다. 특히 줄리엣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사랑 이루어지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하나하나 담은 새빨간 자물쇠들이 보였고, 줄리엣 동상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고 소원을 빌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줄리엣의 집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줄리엣의 발코니에는 로미오와 대화를 나누는 듯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줄리엣에게 편지를 쓰는 코너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이토록 사랑을 받고 있었다. 우울한 햄릿이나 분노한 리어왕이나 질투로 눈이 먼 오셀로, 회한으로 가득한 맥베스에 대한 독자들의 사랑이 ‘연민’으로 수렴된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대한 대중의 감정은 ‘동경’으로 수렴된다. 살아 있는 동안 이만큼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아닐까. 햄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는 하나같이 실패한 영웅들이자 비극의 주인공이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설령 그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을지라도 그 마지막은 찬란한 사랑과 위대한 용서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줄리엣의 발코니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커플들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줄리엣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의 우체통에는 전 세계에서 지금도 수만 통의 러브레터가 쌓여간다고 한다. 다만 이 러브레터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내용이 아니라 ‘내 사랑은 왜 이렇게 힘들까요’라는 내용의 고민 상담 편지다. 자원봉사자들이 그 연애상담 편지에 정성 들여 답장을 해준다고 하니, 줄리엣은 이제 사랑에 빠진 모든 젊은이들의 멘토로 되살아나 21세기에도 여전히 눈부신 셰익스피어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영화 ‘위대한 비밀’에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아름다움을 관객이 모두 함께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햄릿이 저 유명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를 시작할 때,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여왕은 휘몰아치는 격정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청년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물이 사람들의 온몸을 적신다. 멈출 수 없는 격정의 회오리가 극장 전체에 휘몰아치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을 ‘내 일도 아닌, 머나먼 딴 나라 왕자의 슬픔’에 공감하여 꺼이꺼이 울게 만드는 힘. 쏟아지는 빗물은 온갖 경계를 지우는 힘을 가졌다. 신분의 경계도, 남녀의 경계도, 나이의 경계도, 마침내 현실과 연극 사이의 경계조차도. 빗물은 거지의 이마에도 여왕의 레이스에도 똑같은 무늬의 얼룩을 만들어낸다.

햄릿의 고뇌와 슬픔에 전염되어 마치 내 사랑하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것처럼 서럽게 울고 있는 관객들을 보니 감동의 정체란, 카타르시스의 정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일까. 참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참아야 하는가,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죽는다는 것은 그저 잠드는 것일 뿐. 잠들어서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 숙명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생의 극치이니.” 대사 하나하나가 마치 심장을 찌르는 화살처럼 날카롭게 사람들의 영혼을 찌르고, 그들은 그 숨가쁜 고통 속에서 햄릿이 그저 먼 나라의 심약한 왕자가 아니라 바로 한 치 앞의 미래를 모르는 채 매 순간 불확실성의 화염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나 자신일 수도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누가 진짜 셰익스피어인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한날한시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햄릿’이라는 걸작을 관람하며 온몸을 휘감는 전율을 통해 마침내 하나 됨을 느꼈다는 점이다. 연극이 풍기문란의 주범으로 인식될 때조차도, 왕은 물론 가난한 농부, 상인, 걸인, 창부, 하녀, 귀족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인 그 사람들은 연극이라 불리는 거대한 영혼의 카니발 속에서 잠시 자신의 처지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희열을 느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을 극한까지 몰아가는 셰익스피어의 격정과 광기 속에 빠져 있는 순간만큼은, 오늘의 슬픔과 어제의 고통, 내일의 불안을 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죽음의 공포마저 이겨내는 사랑의 힘을 느끼고, 햄릿을 통해 치욕 속에서도 끝내 ‘자기다움’을 지켜내는 삶의 고귀함을 확인하는 것.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이 세상 수많은 타인과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는 더 커다란 ‘우리’의 가능성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고, 공감의 힘이며, 예술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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