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4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3차 방중 때 등장한 천하이 중국 외교부 아주사 부사장(왼쪽). 3차 방중을 기획한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 비서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photo 연합
지난 1월 4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3차 방중 때 등장한 천하이 중국 외교부 아주사 부사장(왼쪽). 3차 방중을 기획한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 비서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photo 연합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에 대항해서 되겠느냐.”

지난해 12월 26일, 개인 자격으로 비공식 방한한 천하이(陳海) 중국 외교부 아주사(司·국에 해당) 부(副)사장이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이다. 지난 1월 4일 송영길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3차 방중단이 중국 베이징을 찾아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만날 때도 모습을 드러낸 천하이 부사장은 2014년 11월까지 주한 중국대사관에서 공사참찬으로 정무파트를 담당했다. 주한 중국대사관의 정무파트를 이끄는 정무공사로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에 이은 서울 명동에 자리한 중국대사관의 ‘넘버2’였다. 대외적으로는 ‘대리대사’ 혹은 ‘부(副)대사’란 직급으로 활동해왔다.

하지만 천하이 부사장은 1971년생, 아직 40대 외교관에 불과하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북한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과를 졸업한 뒤 외교부에 입부해 줄곧 한국 담당으로 일해왔다. 1999년 주한 중국대사관에 입성해 3등비서관, 2등비서관을 지내고 잠시 중국으로 복귀했다가 2009년 한국으로 돌아와 참찬(참사관), 공사참찬(정무공사)을 차례로 지냈다. 대외적으로 대리대사(부대사) 직함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추궈훙 대사의 전임자인 장신썬(張鑫森) 전 대사가 있던 2012년부터다. 이후 장신썬 대사가 중국으로 귀임명령을 받은 2013년 12월부터 추궈훙 대사가 한국에 부임한 2014년 2월 12일까지 공백기에 천하이는 사실상 명동 중국대사관의 1인자로 군림했다.

불과 40대 외교관이 주한 중국대사관의 실권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주한 중국대사관의 특수한 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1992년 한·중수교 직후 주한 중국대사는 직급이 부국장급에 불과했다. 그래도 대개 한국말이 유창한 장팅옌(張庭延), 리빈(李濱), 닝푸쿠이(寧賦魁) 같은 인사가 대사로 왔다. 이 중 초대 장팅옌 대사는 마오쩌둥의 통역 출신으로 1970년 김일성과 회담 때 통역을 맡았다.

하지만 청융화 전 대사를 시작으로 장신썬, 추궈훙 등 한국말을 못 하는 외교관이 대사로 오면서 양국 간 긴밀한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특히 한국의 비판에 못 이겨 주한 중국대사의 직급을 부국장에서 국장급으로 높이면서 한국말을 구사하는 국장급 외교관은 더욱 찾기 힘들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사관 ‘넘버2’인 정무공사 자리에 한국말이 유창한 40대 젊은 외교관들을 배치해 대사를 보좌하게 한 것이다.

실제 한국말을 못 하는 추궈훙 대사를 비롯해 장신썬, 청융화 전 대사는 한국말이 유창한 싱하이밍(邢海明), 천하이 같은 북한 유학파 출신의 젊은 외교관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천하이는 김일성대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한국 연세대에서 6개월 한국어 연수도 했다. 한국의 고위 정치인, 관료, 대기업 회장 등을 만날 때마다 이들을 반드시 배석시켰다. 2012년 대통령선거 직후 박근혜 당선자를 예방한 장신썬 중국대사는 천하이를 대동하고 갔다. 당시 장신썬 대사와 천하이 정무공사를 맞이한 사람이 당선자 외교보좌관으로 활동한 윤병세 현 외교부 장관이다. 천하이 공사참찬은 2014년 2월 28일 추궈훙 신임 주한 중국대사가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장을 제정받을 때도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윤병세 외교장관, 주철기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환담을 나눴다.

전임자인 싱하이밍에 이어 2012년부터 정무공사를 맡은 천하이는 졸지에 주한 중국대사관의 숨은 실력자로 부상했다. 천하이는 2014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중·일관계가 악화됐을 때는 국내 한 언론에 ‘아시아, 일본 우경화를 경고한다’라는 제목의 기고를 주한 중국대사관 대리대사 이름으로 게재했다. 이에 발끈한 미치가미 히사시 주한 일본대사관 공사 겸 공보문화원장(‘한국인만 모르는 일본과 중국’ 저자)이 반박기고를 올리자, 천하이는 ‘일본, 누구와 싸우겠다는 건가’라는 재반박 글을 올리며 한국 신문 지면을 빌린 중·일 간 지상전(紙上戰)을 직접 주도하기도 했다.

구한말 황준헌과 마건충 연상

주한 중국대사관 근무를 마친 천하이는 2015년 2월 중국 남부의 소수민족 자치구인 광시(廣西)자치구의 국제박람회사무국 부국장 겸 중국·아세안박람회 부비서장이란 한직으로 잠시 ‘괘직(挂職)’됐다. ‘괘직’은 중국공산당 특유의 인사제도로 될성부른 젊은 당 간부를 지방 한직으로 발령내 1~2년간 단련시킨 뒤 향후 더 큰 직책에 중용하는 제도다. 티베트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주석까지 오른 후진타오(胡錦濤)가 대표적이다.

천하이는 광시자치구에 있을 때도 한국과의 인맥을 총동원해 각종 사업을 성사시켰고, 결국 채 1년이 안 된 2015년 11월 베이징 외교부 본부의 아주사 부사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4명의 아주사 부사장 가운데 한 명이다. 당시 천하이의 직속상관인 아주사장(아주국장)으로 있던 인사가 1월 방중한 한국 야당 의원단에 “제재는 중국 국민들이 가한 것”이란 발언을 한 쿵쉬안여우(孔鉉佑)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다.

전공이나 경력 등을 봤을 때 천하이는 북한 사리원농업대 출신으로 현재 몽골주재 중국대사로 있는 싱하이밍과 함께 주한 대사 또는 주조선(북한) 대사가 사실상 예약된 전도유망한 외교관이다. 경력상 차기 주한 대사로는 천하이가 좀 더 유력하다는 평가다. 제2대 주한 중국대사를 지내고 현재 중국 외교부의 ‘조선반도(한반도)사무특별대표’로 6자 회담 수석대표를 겸하는 우다웨이(武大偉)처럼 중국의 대(對)한반도 외교를 주도할지 모를 일이다. 박지원·김무성 같은 노회한 한국의 거물급 국회의원들이 비공식 방한한 40대 중국 외교관을 앞다퉈 만나주는 것은 결국 미래권력에 줄을 대는 측면이 있다.

구(舊)한말 황준헌(黃遵憲), 마건충(馬建忠) 등 청국의 외교관들은 조선의 위정자들을 쥐락펴락했다. 황준헌은 ‘친청(親淸) 결일(結日) 연미(聯美)’를 핵심으로 하는 ‘조선책략’이란 서적으로 조선 사대주의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마건충은 임오군란(1882년)으로 권력을 빼앗긴 명성황후 측의 파병 요청으로 오장경(呉長慶), 정여창(丁汝昌), 원세개(袁世凱) 같은 군인들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온 외교관이다. 마건충은 임오군란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고종 임금의 아버지 대원군을 필담(筆談)으로 꾀어내 중국 톈진(天津)으로 납치해 친청파에 권력을 돌려준 1등 공신이다. 황준헌의 지위는 당시 초대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 아래 참찬에 그쳤고, 마건충 역시 청 말 외교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이홍장의 외교담당 막료(비서)에 불과했다. 황준헌(1848년생)과 마건충(1845년생)은 둘 다 당시 나이 30대의 젊은 외교관들이었다. 천하이의 등장을 보면서 황준헌과 마건충을 떠올리는 것은 기우(杞憂)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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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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