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근씨가 자신이 기획한 연극 ‘주먹쥐고 치삼’ 리허설 무대에 섰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동근씨가 자신이 기획한 연극 ‘주먹쥐고 치삼’ 리허설 무대에 섰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온몸이 붕대로 뒤덮인 채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가 울부짖는다. “안 살아, 못 살아, 이러고 어떻게 살아!”

화상으로 녹아내린 성대를 거쳐 힘겹게 터져 나온 쇳소리는 알아듣기조차 힘들다. 남자가 거친 호흡을 몰아쉰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하다.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세우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연극 ‘주먹쥐고 치삼’(2월 1~28일)의 한 장면이다. 뮤지컬배우가 꿈인 청년 문치삼, 불의의 사고로 전신 50%에 3도 화상을 입는다. 치삼은 불운을 탓하기보다 꿈을 향해 달려간다. 뮤지컬 제작에 도전한 것이다.

연극 ‘주먹쥐고 치삼’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만든 연극이다. 치삼은 불길에 녹아내린 손마디 때문에 주먹을 쥘 수 없다는 진단을 받지만 보란 듯이 주먹을 쥐어낸다. 그래서 ‘주먹쥐고 치삼’이다. 생사의 경계에서 치삼을 일으켜 세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른 화상 환자들처럼 숨지 않고 세상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연극 ‘주먹쥐고 치삼’은 실화(實話)다. 실제 주인공은 시나리오를 쓰고 이 연극을 기획한 이동근(31) 아이디서포터즈 책임PD이다. 2년 전, 화재 폭발 사고가 얼굴을 비롯해 그의 삶을 모두 빼앗아갔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장기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매일 피부의 화상 흉터를 긁어내는 고통으로 기절을 한 것도 수십 번이었다. 패혈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눈꺼풀이 다 타는 바람에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성대 제거 수술이었다. 그에게 목소리를 잃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의사를 설득해 성대 제거 대신 목에 뚫은 인공장치를 통해 말을 하게 된 그는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이 PD가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스토리는 연극보다 더 극적이다.

경남 남해 출신인 이 PD는 웃기기 위해 학교를 다녔다. 오늘은 무슨 말로 아이들을 웃길까, 등굣길 그의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주목받는 것이 좋았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교사의 권유로 학교 연극반에 들었다. 축제 연극무대에서 왕따 역할을 맡은 그의 연기를 보고 선생님도 친구들도 눈물을 흘렸다. 연극배우가 목표가 됐다. 방학 때마다 서울로 연기 공부를 하러 다녔다. 비용 마련을 위해 저녁부터 새벽까지 치킨 배달과 야식 배달, 두 건의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밤일 하느라 정작 수업 시간에는 깨어 있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대학에 실패해 삼수를 하는 동안 아버지가 사고로 쓰러졌다.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소년가장인 그의 몫이었다. 대학도 연극도 접고 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몇 년 투병 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돈을 벌어도 재미가 없었다. 가슴에 묻어둔 연극에 대한 열정이 살아났다. 1년 동안 200편 가까이 연극을 보고 대본 공부를 했다. 연극을 볼수록 연극에 대한 갈증은 더해졌다. 연극판의 스타들을 만나러 다녔다. 대학로에서 ‘연극에 미친 놈’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선배의 심부름차 들렀던 사무실에서 사고를 당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그보다 상태가 나은 환자들도 죽어 나갔다. 수술만 31번을 견뎌야 했다.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보다 두려운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개그 본능은 살아 있었다. 병문안 와서 그를 보고 할 말을 잃은 친구들 웃기느라 병실은 늘 시끌벅적했다. 긍정적인 성격 덕분이기도 했지만 유머는 어린 시절부터 외로운 그에게 도피처였는지 모른다. ‘만일 살아 나간다면 연극을 하고 싶다’. 그가 SNS에 올린 글은 연극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8개월 만에 43㎏의 몸무게로 퇴원을 했다. 8월 13일, 퇴원 날이 그의 새로운 생일이 됐다. ‘병문안 5번 이상 온 사람’을 불러 퇴원 파티를 했다. 100명 가까이 됐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은 연극이었다. 공연기획사인 아이디서포터즈를 만들었다. 회사 이름인 아이디(ID·Impossible Dream)는 불가능한 꿈을 응원한다는 뜻이다. 그 모든 과정이 연극 ‘주먹쥐고 치삼’에 녹아 있다.

지난 1월 24일,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는 한 빌딩에서 그를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에 입사한 보험회사에서 보험설계사 교육을 받고 있었다. 손해사정사가 최종 목표라고 했다. 연극만큼 경제적 독립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할 때마다 목에 뚫린 인공장치를 손으로 눌러야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유쾌하고 유머가 넘쳤다.

“처음엔 제 이야기를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른 시나리오를 썼는데 주변에서 자꾸 제 이야기를 해보라는 겁니다.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하다 보니 결국 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이런 모습으로 누군가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다 진실과 대면하게 됐습니다. 상처는 외부의 시선이나 편견이 아닌 내 스스로 만든 것이더라고요. 문을 나서기 두려워하는 화상 환자들이,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연극을 보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화상 환자 중에서 가장 잘생기지 않았느냐”면서 자신만만이다. 그처럼 거리를 활보하는 화상 환자가 드물다 보니 맞는 말이기도 하다.

“사고 후 딱 1년이 된 날, 안경도 마스크도 벗고 맨 얼굴 사진을 페이스북에 공개했습니다. 좋아요 13만5000개, 댓글 6000개가 쏟아졌습니다. 그 응원이 저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겁니다.”

연극 라인업은 화려하다. 실력파들이 뭉쳤다. 서울연극제 2년 연속 대상을 받은 정범철 연출에 김세한·김성한 작가가 힘을 모았고 장원영·도창선 등이 출연한다. 제작비는 그가 화상사고로 받은 보험금으로 충당했다. 꽤 많은 돈이었지만 무리한 투자로 일부 날리고, 연극 제작에 아낌없이 쏟아붓느라 현재 통장 잔고는 ‘0’이다. 최근에는 살던 집 보증금까지 뺐다. 다음 사이트에서 진행하는 스토리펀딩에 ‘화마를 이겨낸 열혈청년 연극제작기’라는 제목을 내걸고 펀딩에도 나섰다. 아쉽게도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펀딩은 목표액에 못 미치고 있다. 티켓 판매도 저조하다. 그래도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꿈을 무대에 올렸으니. 연극 ‘주먹쥐고 치삼’은 묵직한 이야기이지만 경쾌하게 풀어냈다.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그의 도전이 얼어붙은 대학로를 녹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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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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