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대수명 세계 1위,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 90.82세. 지난 2월 영국 의학잡지 ‘랜싯(The Lancet)’에 실린 연구결과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런던이 OECD 35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기대수명에 따르면 2030년에 태어나는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은 90.82세, 한국 남성의 기대수명은 84.07세로 남녀 모두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기대수명 90세는 ‘마의 장벽’으로 불린다. 조사대상국 중 기대수명이 90세를 넘는 집단은 한국 여성이 유일했다.

연구팀은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큰 폭으로 상승한 원인으로 △교육을 포함한 사회적 자본력 증가 △의료기관의 급증과 첨단 의학기술의 급성장 △낮은 신체질량지수(BMI)와 혈압 △여성의 낮은 흡연율 등을 들었다. 장수국가로 손꼽히는 일본, 불가리아, 스위스, 홍콩을 제치고 한국이 불쑥 ‘장수국가 1위’로 급부상한 이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긴 어렵다는 지적은 있다. 기대수명은 수명증가율을 고려해서 산출되므로 6·25전쟁 이후 높아진 생존율, 급격한 경제성장률로 인한 착시효과가 반영됐다는 시각이다. 통계의 맹점을 인정하더라도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분명하다.

한편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 1위다. 2017년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14%에 달하고, 인구의 20%가 노인이 되는 초고령사회가 되는 시점은 2026년이다. 불과 9년 만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는 예측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일본은 초고령사회에 진입까지 11년 걸렸고(1994→2005년), 미국은 18년, 프랑스는 39년, 영국은 53년이 걸렸다.

한국인의 기대수명 세계 1위라는 연구결과를 바라보는 심정은 이중적이다. 한때 한국은 기대수명이 최하위에 가까웠다. 전쟁을 치르면서 비명횡사하는 인구가 많았고, 의료정보가 희박해 영아사망률이 높았고, 의료 수준이 낮아 원인 모르고 죽음을 맞는 이들도 많았다. 이런 비극을 딛고 기대수명 1위에 올랐다는 보고는 희소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무턱대고 환영하기 어려운 사회적 공감대가 꽤 깊다. 수명이 늘어난다는 건 유병장수(有病長壽)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준비되지 않은 채 얼떨결에 맞은 장수는 축복보다 공포에 가깝다. 수명이 늘면서 사망 직전 의료비 또한 천문학적으로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최근 낸 보고서 ‘고령사회를 대비한 노인의료비 효율적 관리방안’에 따르면 사망 직전 1년간 의료비는 10년 전보다 무려 3.4배나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2015년 한 해 동안 40세 이상 성인이 사망 직전 1년간 쓴 평균 의료비는 1595만1000원. 월 평균 132만9000원을 썼다는 통계다. 2005년 한 해 동안 평균 의료비는 470만1000원이었다. 평균연령 증가가 건강수명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노인빈곤율·노인자살률 1위

‘장수국가’와 ‘노인국가’. 의미는 같지만 어감은 딴판이다. ‘장수국가’라는 말에는 ‘축복’의 의미가 함축돼 있지만, ‘노인국가’라는 말에는 ‘재앙’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다시 말해 ‘장수국가’는 지향하고 본받아야 할 긍정적 대상이지만, ‘노인국가’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노후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얼떨결에 맞게 된 장수로 인해 겪어야 하는 불행한 사회구조라는 부정적인 어감이 강하다.

한국은 ‘장수국가’인가, ‘노인국가’인가. 어느 순간부터 일본과 한국은 ‘장수국가’라는 말 대신 ‘노인국가’라는 말을 점점 더 많이 쓰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장수의 비결’을 내세운 책이나 TV프로그램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지금은 서서히 꼬리를 감추고 있다. 준비 없이 맞은 장수를 축복이라기보다 재앙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분위기가 만연하다. 초고령사회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점점 길어져 인류는 지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래를 향해 치닫고 있다.

한국은 유독 심각하다. 한국은 OECD 최고의 노인후진국이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들은 OECD 국가 중 가장 가난하게 살고, 자살률은 가장 높다. ‘장수는 재앙’이라는 인식의 이면에는 ‘노인빈곤율 1위’라는 오명이 자리한다.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노인빈곤율은 49.6%로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의 절반 정도가 중간 소득의 50%보다 낮은 소득으로 산다는 의미다. 한국 다음으로 노인빈곤율이 높은 호주와 멕시코는 30% 초반에 불과해 격차가 컸다. OECD 국가의 평균 노인빈곤율은 12.6%였고, 노인선진국인 유럽 국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네덜란드의 노인빈곤율은 2%, 프랑스는 3.8%였다.

한국은 노인자살률도 세계 1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65세 이상의 자살률은 10만명 가운데 80.1명으로 OECD 평균(20.9명)보다 4배나 높았다.(2010년) 2000년(34.2명)과 비교해 10년 만에 무려 2.3배 높아진 수치다. OECD 국가의 경우 노인자살률은 10년 전보다 오히려 줄었다.(22.5명→20.9명)

한국 노인들은 불쌍하다. 궁핍한 시대에 태어나 전쟁·가난·혼란의 현대사를 겪으며 평생 고단하게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노후를 위해 남겨놓은 재산이 없어 유유자적한 여생을 즐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서울의 4년제 대학을 나와 중소기업과 은행권을 전전하다가 50대 중반에 명예퇴직한 서모씨(70대 초반). 중산층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그는 60대 이후 “살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는 아직 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퇴직하면 아내와 함께 ‘죽기 전에 가고 싶은 여행지’를 하나둘 다니는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버킷리스트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돼 버렸다. 명예퇴직하면서 받은 적지 않은 퇴직금으로 영어학원을 차렸으나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의 공세에 밀려 망했고, 매달 100만원 남짓한 국민연금은 치매에다 위암까지 겹친 노모의 병원비로 쏟아붓다시피 한다. 빈털터리에 가까운 서씨는 다시 생계전선으로 뛰어들었다. 택시기사로 취업해 하루 8시간 넘게 운전대를 잡는다. 스트레스에 당뇨까지 겹친 데다가 무릎이 안 좋아서 매일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가면서 다닌다. 서씨는 “노후에 이렇게 살게 될지 상상도 못 했다”며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서씨의 삶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노후파산은 가난한 일부 계층의 이야기가 아니라 중산층으로 점점 번지고 있다. 2016년 한 해 파산 신청자 4명 중 1명이 60세 이상이었다. 노후준비를 하지 않은 은퇴자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영업을 무리하게 시작했다가 그나마 가진 재산을 날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평범한 중산층의 노후파산

‘노후파산’ ‘노인지옥’ ‘하류노인’. 우리보다 20년 일찍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 쓰이는 표현이다. 일본은 2035년이면 3명 중 1명이 노인이 된다. 일본 역시 장수가 축복보다 재앙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아사히신문 경제부에서 2014년 1월부터 14개월 동안 탐사보도한 연재기사를 보면 ‘노인지옥’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보답받지 못하는 나라’라는 제목의 이 연재기사에서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절름발이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생생히 파헤쳐 노인문제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기사에 따르면 일본에서 돌봄서비스나 치료가 필요하지만 돈이 부족한 노인들은 갈 곳이 없다. 이런 노인들이 워낙 많아 단독주택을 개조한 무허가 유료 노인시설인 ‘데이서비스’가 판을 친다. 13㎡(4평) 남짓한 작은 방에는 남녀가 혼숙하듯 누워 있고, 이동식 변기가 놓여 있는데, 밤에는 오물 처리를 하지 않아 아침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별양호 노인시설에는 대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유료 노인시설은 비용이 높아 들어갈 엄두를 못 낸다.

일본에서도 파산노인은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을 나와 3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해온, 중산층으로까지 점점 번지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노후에 이렇게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독일 함부르크대학 가족사회학과 명예교수인 그레고리어 지퍼는 장수시대의 빛과 그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균수명의 증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서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어도 돈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평균수명 60세의 1960년대를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의 현재는 한국의 머지않은 미래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다는 것이 여러 지표를 통해 드러난다. 한국 노인문제의 가장 큰 문제는 뭐니뭐니 해도 돈이다. 한국 노인들의 소득 중 국민연금 비중이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65세 이상의 노인층 전체소득 중 국민연금의 비율이 회원국 중 칠레(7%) 다음으로 낮은 6%였다.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미국은 37%였고, 노후파산 문제가 심각하다고 연일 보도하는 일본은 47%였다. 노인선진국 북유럽은 말할 것도 없다. 핀란드는 80%, 벨기에는 81%였다.

게다가 한국 노인은 나이가 들어서도 쉬지 못한다. 한국의 65세 이상은 소득의 65%를 노동을 통해 번다. 연금이 적으니 당연한 결과다. 미국의 노동소득은 전체소득의 32%였고, 벨기에 12%, 핀란드는 11%였다.

일은 일대로 많이 하고, 돈은 돈대로 못 버는 한국 노인의 불행한 삶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유엔인구기금(UNFPA)과 국제노인인권단체 헬프에이지인터내셔널에서 조사한 ‘세계노인복지지표 2015’에 따르면 한국은 전 세계 96개국 중 60위였다. 1위는 스위스였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2, 3위를 차지했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8위로 가장 높았다.

노인 선진국은 어떻게 다를까. 노인복지국 세계 1위 스위스에서 노년은 인생의 제2의 황금기다. 그 비결은 탄탄한 연금제도에 있다. 개인연금, 기업연금, 공적연금 제도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은퇴 후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도록 제도화돼 있다. 유럽에서 가장 빨리 고령화를 맞이한 프랑스는 연간 GDP의 11%를 노인복지에 쓸 정도로 힘을 쏟는다. 노인과 청년이 함께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콜로카시옹’ 제도는 한국의 지자체에서도 벤치마킹할 정도로 효과와 호응이 높았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역시 탄탄한 국민연금에서 해법을 찾았다. 세계 10대 산유국인 노르웨이는 석유와 천연가스 수익금으로 조성한 국민연금 규모가 840억달러가 넘는다.

그래도 한국은 골든타임을 아직 놓치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다.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가족 부양의 기능이 남아 있어 꼬박꼬박 용돈을 부치는 자식들도 꽤 되고 지역사회의 온정이 남아 있어 어르신들의 안부를 목적 없이 물어주고 끼니 걱정을 해주는 손길도 꽤 된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왜 인간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가장 무기력한 순간을 향해 점점 쇠락해가고 있는 것일까.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한 구절이다. 소설 속 주인공 벤자민은 70세 인간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다가 갓난아이로 생을 마감한다. 피츠제럴드는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에 있는 글귀에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 ‘80세로 태어나서 18세를 향해 늙어갈 수 있다면 인생은 한없이 행복할 텐데’라는 글귀였다. 소설이 쓰여진 1920년대의 기대수명은 70세 정도였다. 지금 한국의 기대수명은 90세를 바라보고 있다. 문제는 삶의 질이다. 얼마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다. 가난과 질병을 주렁주렁 달고 누려야 하는 장수라면 장수는 축복이 아니다.

김민희 차장대우 / 김민섭 객원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