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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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에 김재철이 있다면, 대서양에는 권영호가 있다. 원양업계에서 한때 회자된 말이다. 권영호(77) 인터불고 회장은 스페인 라스팔마스를 전진기지로 남아프리카 대서양을 개척했다. 라스팔마스는 아프리카 서북부 카나리아제도의 7개 섬 가운데 그란카나리아군도의 수도다. 그는 1966년 국내 최연소 기관장으로 원양어선을 탔다.

그는 1979년 일본 폐선(廢船) 한 척으로 시작해 한때 자산 10조원대의 기업으로 키웠다. ‘스페인 선박왕’으로 불리는 그의 성공 스토리는 2015년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진로와 직업’에도 실렸다. 고철 선박 한 대는 20년 만에 참치연승선 등 50여척의 대선단이 됐다. 동원산업 김재철 회장이 태평양 사모아 기지를 근거지로 신화를 만들 때, 권 회장은 서부 아프리카 대서양을 주름잡았다.

그의 첫 승선지는 프랑스였다. 26세 때였다. 해외여행은 꿈도 꾸기 힘든 시절, 한국수산개발공사가 프랑스에서 인수한 참치연승어선을 타기 위해 프랑스의 한 조선소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었다. 김포공항에서 일본, 스위스를 거쳐 파리에 도착해 다시 기차를 타야 했다. 그곳에서 시작한 그의 항해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경상북도 울진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다가 나의 천직”이라는 선친의 피는 그에게 이어졌다. 평생 바다와 함께 살아온 그는 바다 색깔만 봐도 어떤 고기떼가 얼마나 지나가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한국 원양어업이 최고의 호황을 누렸던 1970~1980년대, 대서양 어업은 라스팔마스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는 1971년 대림수산 주재원으로 라스팔마스에 첫발을 디뎠다. 우리나라 원양어업 60년사를 듣기 위해 주간조선은 권 회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한국과 스페인을 오가는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자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최근 한국 쪽 사업이 어려움을 겪은 뒤라 인터뷰가 어렵지 않을까 했던 우려와는 달리 그는 원양업의 산증인으로 기꺼이 응하겠다고 했다. 여러 차례 이메일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럽의 휴양지로 유명한 스페인 카나리아제도의 라스팔마스 항구.
유럽의 휴양지로 유명한 스페인 카나리아제도의 라스팔마스 항구.

황금의 땅, 라스팔마스

“1966년 라스팔마스로 소형 선박들이 들어오기 시작해 1980년대 최대 호황기 때 원양어선이 225척까지 늘었습니다. 선원이 1만여명, 관련 종사자까지 1만5000명이 스페인 카나리아제도에 살았습니다. 1966년 수출 25만달러에서, 1987년에는 1억1000만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같은 시기 파독 간호사·광부 1만9000여명이 15년간 송금한 돈과 같은 수치입니다.”

그는 원양어업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을 만든 외화벌이의 일등공신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스팔마스에서만 1966년부터 1987년까지 수출이 8억7000만달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당시 대서양에 가면 돈을 엄청나게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선원 채용에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휴학계를 내고 달려온 대학생도 많았다.

“일반 선원의 경우 기본 계약기간이 2년6개월이었습니다. 그들이 귀국할 땐 부산지역 아파트 2채를 살 수 있는 돈을 손에 쥘 수 있다고 했지요. 이곳이 황금의 땅이고 희망의 낙원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권 회장은 라스팔마스의 신화였다. 어느 날 항구에 정박해 있는 낡은 소형 어선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기관장 5년 만에 대림수산 라스팔마스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밤낮 없이 일하던 시절이었다. 일본 회사 소속의 어선으로 폐기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원양어업이 한풀 꺾이면서 중고 어선이 매물로 많이 나왔다. 그는 해당 회사를 찾아가 협상을 했다. “배를 나한테 팔면 잡은 고기 전부를 납품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25만달러가 넘는 배 값을 2만5000달러로 깎았다. 그의 전 재산이었다. 배를 파는 일본 회사에서조차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낡은 배로 고기를 잡을 수 있겠어?”

배를 샀다는 소문을 듣고 한국 교민들도 부러운 마음에 구경 왔다 고개를 흔들고 돌아갔다. “고기는커녕 바다에 배나 띄울 수 있겠어?”

3개월 걸려 수리를 끝내고 첫 출어가 대박을 쳤다. 2개월 조업에서 30만달러의 어획고를 올렸다. 인터불고의 시작이었다. 인터불고(Inter Burgo)는 스페인어로 ‘화목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회사가 출발하고 2년여, 위기가 찾아왔다. 대서양은 황금어장이었다. 그중에서도 사하라사막 연안 어장은 노다지였다. 스페인령이었던 사하라 어장이 1976년 모로코에 귀속되면서 입어 조건이 강화됐다. 최대 어장이 막히자 라스팔마스의 타격이 컸다. 도산하는 선사들도 잇따랐다. 그는 과감히 뱃머리를 북부어장에서 남쪽으로 돌려 내전 중인 앙골라 앞바다를 향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새로운 황금어장이었다.

앙골라 어장은 그가 목숨 걸고 개척한 곳이다. 1982년,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고 내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였다. 다른 어선은 빠져나가느라 바쁠 때 그는 배를 끌고 들어갔다. 총격전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조업을 하던 중 앙골라 정부에서 바다 쪽으로 스피커를 대고 급하게 SOS를 쳤다. ‘반군 때문에 식량이 다 떨어져서 시민과 군인이 굶고 있다. 잡은 고기를 전부 달라’는 것이었다. 반대하는 선원들을 설득해 총탄을 뚫고 고기를 실어 날랐다. 그 덕분에 그는 앙골라에서 ‘고기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내전은 결국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앙골라 정부가 그를 밀어준 덕분에 선단을 늘리면서 승승장구했다. 한국과 수교가 이뤄진 후 앙골라 정부는 그를 한국 주재 앙골라 명예대사로 위촉했다.

그는 서아프리카 바다 덕에 성공했지만 국제 어업환경은 점점 어려워졌다.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 설정 이후 어장이 사라지면서 라스팔마스를 기지로 하던 어선들도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 한국 어선은 한 척도 남아 있지 않다고 전했다.

“원양어업 관련 일을 하는 한인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어장이 죽으면서 안정적으로 정착을 하지 못하고 이주를 했습니다. 라스팔마스에는 현재 약 600여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페인 본토에는 태권도 사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

그는 우리나라 원양어업 침체의 원인에 대해 ‘자원 감소, 연안국의 규제 강화, 3D 업종에 따른 인력난, 석유 파동, 식생활 변화에 따른 소비 감소’ 등을 꼽으면서 무엇보다 정부 정책의 실패를 지적했다.

“2008년 해양수산부를 폐지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상 때문에 전문 인력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국제 어업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결국 원양어업도 패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해양영토 확장을 위해 정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원양어업은 도전이자 새로운 모색이며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바다는 더 특별합니다. 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 바다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원양산업의 부활을 위해서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기만 잡는 어업에서 과감히 탈피해 4차 산업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60년 동안 해왔던 방법으로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누렸던 현장을 다시 돌아보고, 현지인들에게 우리가 가진 기술·경험을 나눠주는 대신 그들이 잡아오는 고기를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만들어 팔면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국가 정책이 뒷받침된다면 제2원양산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60년의 저력으로 새로운 60년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권 회장은 인터불고도 식품산업으로 재도약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 회장에게 여전히 바다는 희망이다. 그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시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열정과 용기로 대양에 도전할 것을 권했다.

그는 인터불고를 호텔(대구 인터불고, 엑스코 등 2곳, 원주 인터불고 호텔), 골프(인터불고 경산CC), 건설(인터불고 건설), 무역유통(인터불고 동영) 등 2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키웠다. 한때 김연아의 소속사인 IB스포츠의 최대주주였다. 현재는 대구 호텔 한 곳을 매각, 한국 사업은 호텔 2곳과 부산 냉동공장, 유통회사로 축소됐다. 무리한 사업 다각화가 화를 불렀다는 비난도 있지만 그는 해외에서 번 돈을 조국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구에 첫 특급호텔인 ‘인터불고’를 만들고 한국 사업을 확장한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했다. 바다에서 숱한 위기를 겪었고 배가 좌초돼 죽음 앞에도 서 봤지만 그가 인생에서 최대 위기로 꼽는 것은 한국 사업의 실패이다.

인터불고의 창업선인 ‘대성호2’.
인터불고의 창업선인 ‘대성호2’.

바다에서 번 돈 조국에 투자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을 묻자 “바다에서 번 돈을 들고 와서 조국에 투자할 때,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할 때”라고 답했다. 그는 1986년 동영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호텔 매각 등으로 정신없었던 올해도 울진 출신 대학생 등 100여명에게 1억원을 지원했다. 31년째 지원규모가 1만5000여명 100억여원이다. 2008년엔 계명대에 임야 243만4500㎡(73만6000평)를 기부하기도 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그는 1995년부터 조선족 선원을 채용하고 선장, 기관장을 양성했다. 선원들의 고향마을에 도로를 내주고 중국 지린대학에 단과대학을 설립했다. 대학 내에 식품공장을 만들어 그 수익금은 전액 장학금에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 마요르카에 있는 작곡가 안익태 선생(1906~1965)의 고택을 사서 정부에 기증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은 단어는 ‘자린고비’이다. 그의 전용차는 직접 운전하는 소형차에다 비행기는 퍼스트클래스를 타본 적이 없다고 한다. 호텔 식당에서 직접 음식을 나르고 접시를 치우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자신의 호텔에서 커피 한 잔도 반드시 돈을 내고 마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다에서 건진 것을 한국에 쏟아부었지만 그는 조국에 보탬이 됐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을 꼽는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을 그는 인생의 큰 실수로 생각한다. 바다에서 꿈을 키우고 위기를 배우고 삶을 이어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다는 언제나 우리 것이고, 우리에게 그 대가를 돌려줄 것으로 확신한다.”

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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