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할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된 지난 7월 24일 이종훈 전 한국전력공사(이하 한 전) 사장을 만났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한전 사장을 지낸 그는 한국 원자력 발전의 산증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76년 고리 원전 1호기 건설 부소장을 시작으로 20여년간 원전 건설 현장을 누비면서 국산 원전 개발을 이끌었다. 한전 부사장 시절 한국 최초의 표준형 원전인 영광 3·4호기(OPR-1000) 개발 책임자로 뛰면서 원전 기술 자립 기반을 닦았고, 한전 사장 재임 5년간 3세대 국산 원전인 APR-1400 개발에 과감한 투자를 했다. 그가 한전 사장을 그만둘 때 기본 설계만 마쳤던 ARP-1400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4기가 47조원에 수출되는 쾌거를 이뤘다.

서울 선릉역 인근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이 전 사장은 80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세도 꼿꼿했고 마주 잡은 두툼한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특히 그는 전력, 원자력 산업과 관련해서는 각종 수치와 연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35년 경북 안동 태생인 그는 서울대 공대를 나온 뒤 1961년 한전의 전신인 조선전업주식회사에 공채 5기로 입사해 평생 한 우물을 팠다. 그는 한전 근무 시절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던 메모를 바탕으로 2012년 ‘한국은 어떻게 원자력 강국이 되었나’라는 ‘CEO 경영수기’를 펴내기도 했다.

세계가 주목한 한국의 원전 신화를 이끌어온 장본인으로서 그는 인터뷰 내내 우려와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새로운 블루오션과 기술에 다가서고 있는 한국의 원자력계가 현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으로 한순간에 무너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그는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요즘 골치가 아프다”며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여러 정보를 심도 있게 검토한 후 판단해야 하는데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운동권 시각으로 원전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했다. “프랑스 사회당 좌파 정부를 이끈 미테랑 대통령도 탈원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집권 후에는 오히려 원전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는 지금 70% 이상의 전력을 원전에서 공급받는다. 이웃 독일도 급할 때는 프랑스로부터 전기를 갖다 쓸 수 있기 때문에 탈원전을 하는 것이다.”

- 문 대통령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오늘 구성된 공론화위원회에 맡기겠다고 했는데. “대통령 스스로는 중립이라고 하면서도 월성1호기도 중단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계속 탈원전 메시지를 주고 있지 않나. 대통령이 그러는데 밑에서 거부할 수 있겠나.”

“국산 3세대 원전 내년 9월 미국 인증”

- 왜 탈원전에 반대하나. “가장 큰 이유는 안보다. 탈원전하면서 액화천연가스(LNG) 발전 비중을 70%로 늘린다고 하는데 가스는 석유랑 똑같다. 가스 발전을 그 정도 비율로 유지하려면 외국에서 배로 계속 가스를 수입해야 한다. 지금 가스는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오는데 그 루트가 국제정세가 복잡한 남중국해 아닌가. 무슨 일이 터져 일주일만 배가 안 들어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파이프로 가스를 끌어오겠다고도 하는데 유럽의 경우 우크라이나에서 문제가 생겨 러시아가 가스관을 잠근다고 위협하니까 전부 벌벌 떨었다. 에너지 문제는 국가 안보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 우리가 탈원전을 추구하면 원전 수출에도 지장을 받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신고리 5·6기 건설을 중단하면 이미 쏟아부은 1조6000억원을 날린다고 걱정들 하는데 사실 1조~2조원은 문제가 아니다. 향후 30년간 600조원으로 예상되는 원전 시장을 놓치는 게 더 큰 문제다. 우리 원전을 수입한 UAE부터 걱정이다. 원전은 건설 후에도 계속 부품을 공급받아야 한다. 우리는 부품을 국산화해 지금 600여개 중소기업이 부품을 생산한다. 그런데 우리가 원전 건설을 중단하면 다품종 소량생산하는 부품업체들이 버틸 수 있겠나. 당연히 UAE도 부품 공급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할 테고 그 틈을 다른 나라 경쟁업체들이 파고들 게 뻔하다. UAE는 자체 부품 생산 능력이 없다.”

그는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인 APR -1400의 경쟁력이 사장(死藏)될 수 있다는 우려도 했다. “특히 안타까운 건 내년 9월이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APR-1400에 대해 설계인증서(Design Certificat)를 발부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NRC가 얼마나 꼼꼼한 기관이냐. 여기서 인증한다는 건 세계적으로 안전성을 인증받는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 APR-1400은 이미 예비검사를 통과했다. 일본 미쓰비시랑 프랑스 업체도 3세대 원전을 개발했는데 NRC 예비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3세대 원전 중 NRC가 안전성을 인정한 건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1000이랑 우리밖에 없다. 그런데 AP1000은 미국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리고 중국에

4기가 건설 중이지만 계속 문제가 생기면서 잘 안 되고 있다. 반면 APR-1400은 UAE에서 순조롭게 건설 중이어서 연말이면 첫 가동을 시작할 전망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APR-1400 모델인 신고리 3호기가 작년 연말 세계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우리가 세계 원전시장을 석권할 유리한 위치에 있는 셈이다.”

- APR-1400과는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 “내가 한전 자회사인 한국전력기술(KOPEC) 사장으로 있을 때 정부에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한다면서 G7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그중 하나로 차세대 원전을 개발하자고 했는데 연구비 조달이 힘들었다. 윗선에서 ‘한 프로젝트에 어떻게 2000억원씩 들이느냐’며 난감해했다. 그래서 내가 담당하던 영광 3·4호기 프로젝트의 예산 일부를 떼어내 일단 쓰겠다고 해서 시작했다. 한전 사장으로 가서는 APR-1400에 집중 투자했는데 5년간 2300억원을 썼다. 1998년 3월 기본설계 안전분석보고서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퇴임했다.”

1987년 4월 영광원전 3·4호기 원자로 공급 및 기술도입 계약에 서명하는 이종훈 한전 부사장(오른쪽 두번째).
1987년 4월 영광원전 3·4호기 원자로 공급 및 기술도입 계약에 서명하는 이종훈 한전 부사장(오른쪽 두번째).

“원전산업은 한번 중단되면 시스템이 깨진다”

- 국내에서는 탈원전을 하더라도 원전 수출은 지속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최근 한국수력원자력 임원을 만나니까 정부에서도 원전 수출은 계속하라는 시그널이 온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원전산업은 한번 멎어버리면 시스템이 깨져버린다. 왜 원전 후진국이던 우리가 세계 1등이 된 줄 아나?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Three Mile) 아일랜드 원전사고와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면서 전 세계 원전 엔지니어들은 다 직장을 잃었고 네트워크가 깨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공백기를 파고들어 기술 전수를 받았다.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던 해 우리가 영광 3·4호기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미국 CE사와 기술전수 협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체르노빌 사고로 협상이 유리해졌다. 회사가 망할까봐 몸이 단 미국 회사로부터 많이 받아냈다. 지금 우리가 몇 년간 원전 건설을 중단하면 설계회사인 KOPEC부터 할 일이 없어진다. 이 회사에 원전 설계 인력이 2000명이나 있는데 현재 2세대 원전에 머물러 있는 중국에서 아마 이들 인력을 빼갈 것이다.”

- 탈원전을 찬성하는 전문가들은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전력 수요도 줄어들어 원전을 더 이상 짓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얼마 전 8차 전력수급계획 초안에서 2030년 전력수요를 2년 전보다 10%나 줄여서 전망했는데. “나도 전력수요가 앞으로는 그렇게 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전력수요는 무작정 늘어나는 게 아니다. 전문 용어로 ‘피크 경신’이 더 이상 없는 포화상태가 온다. 지금 우리의 전력 씀씀이를 보면 오히려 줄이는 게 맞다. 자원이 풍부해 본래 전기를 많이 쓰는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유럽 선진국은 우리보다 전기를 적게 쓴다. 프랑스, 독일 등은

1인당 6000~8000㎾h 정도 쓰는데 우리는 1만㎾h가 넘는다. GDP를 비교하면 우리가 과소비를 하는 셈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원전 덕분 아닌가. 원전 덕분에 전기요금이 싸니까 많이 쓰는 것이다. 전기료가 싸서 많이 쓰니까 지금 원전을 없애도 된다? 논리가 거꾸로 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원전을 없애면 기본이 무너진다.”

- 기본이 무너진다니? “전력 과소비를 줄이는 건 맞지만 원전은 전력 공급의 베이스가 되어야 한다. 원전은 고정비에 대한 감가상각비가 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생산 단가가 저렴하다. 원전을 가스발전으로 대치하면 연료비 3원 들이면 될 것을 130원 들여서 생산해야 한다. 나는 원전으로 생산하는 전기를 전체의 30~40% 선에서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파리협약으로 이산화탄소를 줄이려면 원전을 없애서는 안 된다. 왜 원전만 짓지 않겠다는 건가.”

그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전력수급의 예측 불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한전 사장에 취임했을 때 전체 전기 생산 설비용량이 3000만㎾ 정도였다. 그때 예상하기를 설비용량 7000만㎾, 1인당 소비량 7000㎾h 정도가 되면 피크 경신이 더 이상 없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그후 의외로 전기 수요가 계속 늘었다. 작년 최대 수요가 8520만㎾였다. 지금 설비용량이 1억㎾가 넘고 전력예비율이 20%대이지만 우리 산업이 위축돼 전력수요가 많이 줄었다고 본다. 내가 저서 ‘한국은 어떻게 원자력 강국이 되었나’에서도 강조했지만 에너지를 풍부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야 경제발전 기회가 그만큼 많아지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잊고 살았지만 풍부한 전기의 혜택 없이는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이건 북한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나.”

- 저서를 보니까 한전 사장 취임 후 겪었던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 위기 얘기도 있던데. “1994년 전력예비율이 2%대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었는데 그때도 변수가 있었다. 그해 이상고온에 더해 월드컵 축구경기 중계방송까지 피크 시간과 겹쳤다. 나는 영월 화력발전소에서부터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2%대 예비율에도 발전소가 전부 멈춰서는 큰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당시 동력자원부는 제한송전을 권하기까지 했었다.”

- 블랙아웃은 쉽게 발생하지 않나. “무제한 송전을 시작한 1968년 이전에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사정이 열악했지만 그 이후에는 1972년 딱 한 번 블랙아웃이 있었다. 블랙아웃은 예비율이 바닥까지 떨어지면서 발전소들이 전부 허덕허덕하다 전 계통이 무너지는 것인데 잘 일어나지는 않는다. 2%대 예비율도 발전소 두세 개는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특히 변전소에는 저주파계전기라는 게 있는데 발전소가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이것이 작동해 변전소로부터 전기가 인출되는 ‘피더’를 알아서 끈다.”

- 탈원전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무엇보다 원전의 안전성을 문제 삼는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재난 영화 ‘판도라’를 혹시 봤나. “안 봤다. 내가 고리 3·4호기 건설 당시 본부장을 지내면서 원자로 구석구석을 다 살폈는데 영화의 설정은 거짓이다. 원자로 뚜껑은 1m20㎝ 두께의 콘크리트다. 비행기가 와서 들이받아도 안 깨진다. 그런데 이게 뻥 터진다니 말이 되나.”

- 후쿠시마 원자로 건물은 폭발했는데. “후쿠시마 사고는 쓰나미로 전력 계통이 망가지면서 냉각수 공급이 안 된 것이 문제였다. 보통 원전은 하나의 송전선이 망가져도 전기 공급에 문제가 없도록 두 개의 독립적인 송전선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도록 돼 있는데 평지에 건설된 후쿠시마 원전은 쓰나미가 오면서 두 개의 송전탑이 다 무너졌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은 도쿄전력 관할이라 도쿄와 직접 송전선이 연결돼 있었다. 관내의 도호쿠 전력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았으면 빨리 전력 공급을 재개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원전은 대부분 산을 끼고 있고 산 위의 송전탑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다. 전기가 끊길 일이 없다.”

- 탈핵 찬성 측은 고리 원전이 지진에 취약한 단층대에 밀집해 있어 지진이 나면 대재앙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베이브리지가 무너질 정도로 큰 지진이 난 적이 있었다. 이때 미국은 인근 디아블로 캐니언 원전을 일단 셧다운시켰지만 지진이 멈춘 후 다시 가동을 재개했다. 원전의 안전성은 사실 지진과 큰 상관이 없다. 특히 우리 원전들은 미국 스리마일 사고 이후 강화된 NRC 기준에 맞춰 건설돼 트랜스뮤테이션 강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후쿠시마 원전보다 훨씬 안전하다. 더욱이 원전의 안전성 논란을 원천적으로 불식할 기술도 지금 개발되고 있다.”

- 그런 기술이 뭔가. “서울대에서 4세대 원전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3세대까지는 노심(爐心)이 녹아내리지 않도록 기계적으로 전기를 돌려서 계속 냉각수를 공급해줘야 하고 여기서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하지만 스몰모듈러리액터(SMR)라는 10만~30만㎾급 소형 원전인 4세대는 원자로 안에서 모든 것이 자체순환돼 외부 냉각수가 공급될 필요가 없다. 이런 원전이 상용화되면 안전성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에 도시 가까이에 원전을 짓는 이른바 어번 리액터(Urban Reactor)가 가능해진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탈원전으로 가면 4세대 원전 연구진들이 제일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 반핵론자들은 사용후핵연료 보관시설 등 처리비용도 문제 삼고 있다. 사실 우리는 사용후핵연료가 쌓여가고 있지만 고준위방폐장은 지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실정인데. “그것도 새로운 기술로 해결될 전망이다. 트랜스뮤테이션이라는 기술인데, 핵분열 때 생기는 동위원소들의 반감기(半減期)를 줄이는 기술이다. 트랜스뮤테이션 기술로 핵종(核種)을 변환하면 수십만 년인 반감기를 100년 이하로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중준위 폐기물 보관시설만 있으면 된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런 신기술들이 개발 중에 있는데 우리는 원자력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선입견만 갖고 지레 무서워하고 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원전인 고리 1호기 건설 부소장으로 원전과 인연을 맺었는데 지난 6월 고리 1호기가 영구 정지됐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가 한 인터뷰에서 ‘자식 일찍 보낸 기분’이라고 했던데 사실 섭섭했다. 다른 나라는 고리 1호기랑 똑같은 모델의 원전 설계 수명이 다한 후 20년 연장 허가를 내줬다. 그런데 우리는 10년 연장 끝에 영구 정지했다. 전에는 10년 연장받으면 추가로 10년 연장받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반핵 여론이 커질 줄 몰랐다.”

그는 “작년 연말 신고리 3호기가 가동을 시작했을 때도 우리가 어렵게 만들어낸 APR-1400 모델의 세계 최초 상업운전이라는 의미가 컸지만 촛불시위 때문인지 신문에 우표 딱지만 한 기사도 나지 않았다”며 “우리 스스로 세계를 상대로 한 절호의 홍보 기회를 걷어찬 셈이다. 그때 주변에 화를 많이 냈다”고 했다.

- 왜 우리 사회에 반핵 여론이 커졌다고 보나. “1980년대 중반 내가 고리 3·4호기 건설 본부장을 맡았을 때만 해도 원전은 최고의 국가기밀이었다. 안기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와 보안 통제를 할 정도로 국민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1984년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문태갑 당시 신문협회 회장이 이사들을 이끌고 견학을 온 것을 계기로 내가 위에다가 건의를 했다. 우리도 이제 원전을 제대로 알리자, 이러다가 원전 다 지었는데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퍼블릭 억셉턴스(public acceptance)’, 이른바 원전에 대한 국민 수용을 우려했다. 그래서인지 그해 4월 안기부에서 ‘잘 홍보해 보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이후 한전이 전국 지점을 동원해 지역유지, 여론주도층을 초청해 원전 견학을 시키고 교육을 했다. 1984년 후반기부터 1986년까지 한 번에 40명씩 매주 두 팀씩 초청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때도 물론 반핵단체들은 있었다. 이 사람들은 견학 후 토론회 때는 우리 말이 맞다고 하다가 돌아갈 때는 다시 반핵 노래를 부르곤 했다. 반핵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니 그려러니 했다. 어쨌든 어렵게 쌓아올린 원전에 대한 국민 수용이 무너져내린 게 가장 안타깝다.”

“한국 원자력 발전에 끼친 DJ의 공로”

- 원전마피아로 상징되는 원자력 업계의 내부 비리도 반핵 여론을 키운 것 아닌가. “사실 1980년대 원전 업계에 위기가 있었다. 당시 영광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했다. 특히 한전 실무진들이 뒷돈을 받았다는 혐의가 일면서 대대적으로 조사를 받았다. 당시 내가 사실상 최고책임자였는데 나는 조사를 받지 않았지만 내 부하직원들 150명이 샅샅이 조사를 받았다. 그때 조사 책임자가 나중에 검찰총장이 된 정상명씨였다. 당시 정 검사가 조사 후 무혐의 처리를 한 후 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지금부터 원자력에 대해서는 이 부사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 비리가 나오면 자기도 끝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그러면서 정 검사가 ‘이렇게 깨끗한 조직인지 몰랐다’는 말도 했다.”

- 그런 조직이 왜 비리의 온상이 됐다고 보나. “한전이 쪼개져 한국수력원자력으로 분리돼 나가기 전만 해도 직원들이 엘리트의식이 있었다. 조금만 허튼짓을 해도 원전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 당시 한전은 여러 분야 사람들이 모인 조직인 만큼 인적 네트워크도 대단했고 감사 기능도 강했다. 아마 한전 조직이 그대로 유지됐으면 후쿠시마 사고 때도 발벗고 나서서 원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한전이 쪼개지면서 문제가 생겼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계를 상대하는 기술자들끼리 모여 일하다 보니 사명감도 약해졌고 감사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나는 지금도 쪼개진 한전 조직을 다시 합쳐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이 대목에서 1987년 민주화 바람과 함께 일기 시작한 원전 반대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원전의 지속적인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당초 DJ와 평민당은 탈원전 입장이었다. 특히 원전 소관 상임위 소속이었던 조희철 의원이 원전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내가 조 의원과 친해지려고 연탄불 때는 조 의원의 잠실 아파트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조 의원의 입장이 달라지는 반전이 있었다.”

- 어떤 반전이었나. “조 의원이 우리가 기술전수를 받던 미국 CE사 현장 실태 조사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는데 워싱턴에서 야당 당수를 지냈던 유진오 박사의 아들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당시 재미 물리학자였던 이분이 조 의원에게 원자력의 긍정적인 면을 얘기해준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기술 전수를 받던 우리 기술진도 만나면서 조 의원의 생각이 달라졌다. 조 의원은 귀국길에 일본에서 오히려 찬핵(贊核) 전문서적들을 잔뜩 사왔는데 그중 하나가 ‘원자력은 악마의 앞잡이인가’라는 책이었다. 일본 사회당 소속 참의원이었던 후쿠마 도모유키 21세기종합연구소장이 쓴 책인데 이 사람도 반핵에서 찬핵으로 입장이 바뀐 사람이었다. 조 의원은 ‘한국에 원전을 이해시키겠다’며 이 책을 번역까지 했다.”

- 조 의원 때문에 DJ 입장이 달라졌나. “DJ는 조 의원 말만 듣지 않았다. 홍기훈 의원에게 다시 원자력에 대한 조사를 시켜 홍 의원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입장이 달라졌다. DJ가 1989년 목포대학 종합대학 승격 축하연에서 ‘원자력에너지의 개발은 불가피하다’고 이른바 ‘목포선언’을 한 것이 우리나라 원자력 정책의 국민수용에 중요한 분기점을 이뤘다. 배신자라며 조 의원을 공격하던 반핵론자들이 DJ의 목포선언 후 잠잠해졌다. 만약 그때 DJ가 반원전 입장을 유지했으면 YS도 비슷하게 따라갔을 것으로 본다. DJ 덕분에 영광 프로젝트도 계속됐고 1998년 정권 교체 이후에도 원자력 정책이 지속될 수 있었다. 야당을 하면서도 국가 대사는 신중하게 결정하고 정부에 협조할 건 협조한 걸 보면 DJ는 역시 거물이었다. 그런데 DJ 정신을 계승한다는 지금 민주당은 그런 덕목이 별로 안 보인다.”

원전과 평생을 같이한 80대 엔지니어의 말은 경험과 사실에 기반해 있었고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앞으로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이 담긴 ‘공론’을 받아들 문재인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 만나 보면 좋을 사람으로 보였다.

키워드

#통 큰 인터뷰
정장열 부장대우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