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돈을 들여 극장을 찾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모든 관객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영화가 재미있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로맨스, 코믹, 스릴러, 호러, 전쟁, 어드벤처 등을 통틀어 가장 흥미진진한 장르는 아마도 첩보영화(spy film)일 것이다. 정보원(secret agent)의 첩보 활동을 주 내용으로 하는 스파이영화는 정치 상황과 세계정세를 화면에 담는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와 확연히 구별된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39계단’(The 39 Steps·1935)과 ‘사보타주’(Sabotage·1936)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첩보 스릴러는, 1962년 ‘007 살인번호’(Dr. No)를 필두로 ‘007 스펙터’(Spectre·2015)까지 50년 넘게 24개 작품이 이어진 007시리즈를 통해 영화 장르의 하나로서 당당히 자리 잡게 된다. 지난 9월 27일 속편 ‘킹스맨: 골든 서클’이 국내 개봉한 ‘킹스맨’ 시리즈는 007의 ‘영리한’ 21세기적 변용에 해당한다. 2차대전 이후 냉전 상황을 주로 다루던 첩보영화는 옛 소련 붕괴를 계기로 주로 정보기관 내의 갈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주간조선은 전찬일·윤성은 영화평론가와 함께 ‘첩보영화 Top 9’을 선정했다. 일단 보기 시작하면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올 때까지 절대 눈을 떼지 못할 것을 보장하는 수작들이다. ‘Top 9’은 전찬일·윤성은·신용관 3인이 각자 9편씩을 추린 뒤 많이 추천받은 순으로 선정했다. 영화사적 의미를 고려했으나 대중성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

39계단 (The 39 Steps·1935)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연 로버트 도나트, 매들린 캐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1959)는 스파이로 오인되는 것도 모자라 살인 누명까지 쓴 채 쫓기는 신세에 처한 억울한 사나이를 축으로 전개되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걸작 스파이 스릴러다. ‘39계단’은 그 걸작의 대선배 격인 선구적 걸작으로, 비록 주인공이 스파이는 아니어도 오인의 모티브를 히치콕 영화 사상 최초로, 완벽하게 극화한 역사적 첩보 스릴러 영화다. 업무차 캐나다에서 런던을 찾은 한 사내가, ‘39계단’이라는 암호를 남긴 채 의문의 살해를 당하는 묘령의 여스파이와 얽히면서 펼쳐지는 미스터리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2005)도 진단했듯, “히치콕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스릴러들을 만들어내면서 거장의 명성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영화는 단적으로 플롯의 정수를 증거하며, 복선과 반전이란 어때야 하는가를 더할 나위 없이 촘촘하게 보여준다. 히치콕의 히트작들만 아니라 ‘007 시리즈’ ‘본 시리즈’ ‘킹스맨 시리즈’ 등 세상의 거의 모든 첩보영화들은 ‘39계단’에 상당 정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니키타 (La Femme Nikita·1990)

감독 뤽 베송

출연 안느 파릴로드, 체키 카료, 장-위그 앙글라드, 잔 모로, 장 르노

1980년대 한때, 한국 시네필들 사이에서는 일군의 프랑스 영화감독들의 영화 경향을 일컫는 용어 ‘누벨 이마주’가 유행했었다. ‘나쁜 피’(1986)의 레오 카락스, ‘디바’(1981), ‘베티 블루’(1986)의 장 자크 베넥스, 그리고 ‘마지막 전투’(1983), ‘그랑블루’(1988)의 뤽 베송 등이 그 주역들. ‘니키타’는 뤽 베송을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 스타 감독으로 비상시킨 터닝포인트적 범죄·첩보 스릴러다. 범죄에 연루돼 저세상 사람으로 지워진 불량소녀 니키타가 국가 정보기관에 의해 비밀 전문 킬러 조세핀으로 양성되면서, 그 전후로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이야기.

‘니키타’는 김옥빈·신하균 주연 ‘악녀’의 원 모델 격인 문제작. “다양한 여성 킬러 중 단연 No.1”이며 “모든 여성 킬러 영화의 대모이자 근원”이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니다. 니키타·조세핀·마리라는 기념비적 캐릭터와 그 역을 연기한 안느 파릴로드는 이른바 ‘팜므 파탈’의 치명적 매력을 만끽시켜준다. 인간 병기가 된 조세핀을 마리라는 평범한 여성으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이라는 주제의식도 기대 이상의 감동을 안겨준다.

의형제 (2010)

감독 장훈

출연 송강호, 강동원

‘고지전’(2011) 이후 6년 만에 선보인 ‘택시운전사’로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외국 영화 포함 19번째로 1000만 고지를 넘은 장훈 감독의 ‘영화는 영화다’(2008)에 이은 두 번째 연출 나들이. 남한 국정원 요원 한규(송강호)와 남파 공작원 지원(강동원) 간의 한판 대결과, 그 대결을 넘어 ‘브로맨스’로 나아가는 극적 과정을 유려한 수준급 연출 호흡으로 빚어냈다.

‘연기의 달인’ 송강호는 이 진지한 영화에서 첩보원 역을 거뜬히 소화해내며,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강동원도 전 필모그래피 중 가장 안정되고 인상적인 호연을 과시했다.

이 영화의 으뜸 미덕은 두 주인공 간의 휴먼드라마와, 액션으로 대변되는 스펙터클 간의 조화. 대개 그 둘이 따로 놀기 십상인 바, 그 점에서 ‘의형제’는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2004)나 ‘명량’(감독 김한민·2014)의 첩보 스릴러 버전인 셈이다. 인간 존재나 남북관계를 조망하는 시선 등에서도 남다른 바, ‘공동경비구역 JSA’(감독 박찬욱·2000)가 한국 영화의 2000년대를 열었다면 ‘의형제’가 2010년대를 활짝 열어젖혔다고 할 수 있을 듯.

영화평론가 윤성은

007 스카이폴 (Skyfall·2012)

감독 샘 멘데스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하비에르 바르뎀, 주디 덴치

샘 멘데스 감독의 2012년작 ‘007 스카이폴’은 1962년 ‘007 살인번호’가 관객들에게 선보인 지 정확히 50년 만에 탄생한 스물세 번째 007이다. 당대의 감독과 스타들이 합을 맞춰왔지만 샘 멘데스와 다니엘 크레이그의 조합은 이전까지 없던 음울한 빛깔을 만들어내며 매니아들을 양산해왔다. ‘007 스카이폴’은 현란한 액션 이면에 ‘요원으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적인 기조까지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시리즈에서 퇴물 취급을 받게 된 제임스 본드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한 시험대에 선다. 즉 ‘007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는 과거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이제는 새로 쏟아져 나오는 첩보물들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 007 시리즈를 표상하는 캐릭터다. 영광스러웠던 지난날에 대한 무상함, 인생의 쓸쓸함이 묻어나 드물게 여운이 긴 첩보물이 완성됐다. 초반부 숨 막히는 기차 위 액션,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한 아델의 노래와 고급스러운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부터 황량한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마지막 혈전까지 일관된 세련미가 흐른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Mission Impossible: Rogue Nation·2015)

감독 크리스토퍼 맥쿼리

출연 톰 크루즈, 제레미 레너, 레베카 퍼거슨

‘미션 임파서블’은 1996년에 시작되어 어느덧 20년 넘게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 동시대의 대표적인 첩보물 시리즈다. 망작으로 불리는 오우삼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 2’를 제외한다면 모든 작품이 볼 만하지만, 가장 최근에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이 오락성과 완성도 면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전작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바람직한 강박의 결과다. 에단 헌트가 속해 있는 최첨단 첩보기관 IMF가 해체 통보를 받고, 테러조직 ‘신디케이트’까지 IMF 전멸 작전을 펼치자 에단은 의문의 여인 ‘일사’와 함께 테러 조직에 맞서는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한다.

‘로그네이션’의 액션은 비행기 위 스펙터클한 신부터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오페라하우스 내 저격 신까지 정교한 촬영과 리듬이 일품이다. 특히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가 깔리는 동안 여러 명의 요원들이 서로를 노리며 벌이는 난투극의 긴박감은 압도적이다. 일사를 연기한 레베카 퍼거슨은 ‘로그네이션’이 발굴한 보석 같은 존재다. 영화 내내 고난도의 액션을 보여주면서도 후반에서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유약한 분위기까지 소화해내며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해냈다.

모스트 원티드 맨 (A Most Wanted Man·2014)

감독 안톤 코르빈

출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레이첼 맥아덤즈

정보부 소속 첩보원 ‘군터 바흐만’은 인터폴 지명수배자 ‘이사’를 바로 체포하지 않고 그를 미끼로 온건파 무슬림인 ‘닥터 압둘라’가 테러리스트들의 자금줄임을 밝혀내려 한다. 군터의 조직원들이 위장한 채 곳곳에 배치되어 요주의 인물들을 감시, 감청하는 장면들은 ‘감시자들’(감독 조의석, 김병서·2013) 유의 영화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이 영화는 액션보다 심리전의 스릴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첩보물들과 차별화된다. 또한 한 단계씩 일이 풀려나갈 때마다 영화의 긴장감은 오히려 고조되는데, 사실상 확실한 물증 없이 군터의 머릿속에서만 짜맞추어진 이 프로젝트가 성공으로 끝날지 밝혀지는 절정부에 시시각각 다가서기 때문이다.

세계적 포토그래퍼였던 안톤 코르빈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배치 및 그들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카메라에 포착함으로써 치열한 심리전을 묘사했다. 존 르 카레의 원작으로부터 나오는 서사의 안정감, 고인이 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명연기도 영화에 품격을 더한다. 고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항구도시 함부르크 속의 쓸쓸한 군터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오래 맴돌 것이다.

영화기자 신용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Sicario·2015)

감독 드니 빌뇌브

출연 에밀리 블런트, 베니치오 델 토로, 조슈 브롤린

장담컨대, 이 영화를 보기 전과 후의 당신은 같은 사람일 수 없다. 당신이 감독 이름을 줄줄 꿰는 매니아든 어쩌다 주말의 명화나 보는 무관심층이든,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당신의 의식 밑바닥에 깊숙이 자리 잡는 영화가 될 것이다. FBI 요원과 CIA 소속의 총 책임자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역에서 벌이는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은 마치 극화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시카리오’에서 자신의 특장인 예측불허의 스토리, 캐릭터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심층적 심리 묘사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그에 상응해 ‘미친 존재감’의 베니치오 델 토로가 뿜어내는 암울한 아우라가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거악(巨惡)을 제거하기 위한 악행은 용인되어야 하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에서 정작 놀라운 건 영상이다. 분할 없이 촬영된 와이드 앵글과 광대한 영역을 커버하는 부감 숏, 질기게 이어지는 감정선에 꼭 들어맞는 사운드는 영화라는 매체가 도달 가능한 최정점의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한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단번에 바꿔놓을 수 있는 ‘섬뜩한’ 사례다.

본 얼티메이텀 (The Bourne Ultimatum·2007)

감독 폴 그린그래스

출연 맷 데이먼, 줄리아 스타일스, 데이빗 스트라탄

제임스 본드의 007이 영국 작가 이안 플레밍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듯, 제이슨 본은 미국 스릴러 작가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이 바탕이다. ‘본 아이덴티티’(2002) 이후 모두 6편이 제작됐지만, 골수팬들은 제레미 레너를 내세운 ‘본 레거시’(2012)를 이른바 ‘뜬금포’라며 시리즈에서 제외시킨다. 그만큼 본 시리즈는 맷 데이먼과 불가분이다. 본 시리즈는 무기나 화력에 의존하지 않고 육체와 육체의 부딪침으로 만들어지는 ‘근접 액션’의 흐름을 바꾼 영화다. 동선을 크게 하지 않고 정확한 타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제이슨 본의 액션은 깔끔하고 압도적이다.

‘본 얼티메이텀’은 제목 그대로 시리즈의 완결판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스토리와 액션이 최적화된 첩보 액션 영화의 모범 답안이다. 시리즈의 상징처럼 된 핸드헬드와 셰이키캠(shakycam)은 ‘본 슈프리머시’(2004)에서와 달리 과용 없이 구사되고 있다. 불안한 인물의 클로즈업, 군중 속 요원들을 드러내는 원경, 그리고 이를 감시하는 CCTV 화면의 교차편집이 이뤄낸 워털루역 추격 시퀀스는 영화의 최상급 리듬감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과시하는 첩보물의 기념비적 장면이다.

스파이 게임 (Spy Game·2001)

감독 토니 스콧

출연 로버트 레드포드, 브래드 피트

‘007’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본(Bourne)’ 연작이 액션을 강조한 첩보영화라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유는 플롯의 서스펜스로 승부를 보겠다는 영화다. 그 정점에 ‘스파이 게임’이 있다. 1991년 은퇴 날을 맞은 CIA 베테랑 요원 나단 뮈어(로버트 레드포드)는 직속 부하였던 톰 비숍(브래드 피트)이 중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화는 뮈어가 CIA 수뇌부와 회의실에서 벌이는 현재의 두뇌게임이 주는 긴장과,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비숍과의 과거 첩보전이 주는 스릴감이, 톱니가 맞물리듯 교차하며 퍼즐이 하나둘씩 채워져 전체 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TV 광고 감독 출신인 토니 스콧 특유의 감각적 화면, 반(半)박자 빠른 전개와 빈틈없이 깔끔한 편집이 단 24시간 동안 진행되는 사건의 긴박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주인공의 회상 신을 통해 베트남전부터 냉전기의 베를린, 1980년대 중반의 베이루트에 이르기까지, 당시 국제 외교의 뜨거운 감자였던 사건들을 돌아볼 수 있는 정교한 지적 스릴러의 교본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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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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