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과 기관투자사의 기업 경영 관여’를 골자로 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둘러싸고 정부와 재계의 입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국내 연기금 중 가장 덩치가 큰 국민연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미 상당량의 대기업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하면 기업의 이사회 의결권 행사 등 경영 전반에 보다 적극적으로 간여할 수 있게 된다. 국민연금으로부터 자산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들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 여부에 따라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국민연금이 공시한 30대 그룹 상장사에 대한 보유 주식가치(6월 30일 종가 기준)를 조사한 결과, 국민연금이 주식을 보유한 기업은 100개사로 이들 주식가치 총합은 85조4787억원이었다.<표 참조> 국민연금은 삼성그룹의 상장계열사에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중 삼성전자 주식 비율은 9.71%(9월 30일 금감위 공시사이트 기준)였다. 국민연금이 주식을 보유한 상장사에 의결권을 행사한 안건 수는 2010년 2153건에서 2015년 2836건으로 683건이나 증가했다.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의 비중도 2010년 8.1%에서 2015년 10.12%로 늘었다.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이사 및 감사의 선임 건’이었다. 재계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도, 국민연금과 자산운용사들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했을 때 이사 및 사외이사 선임에 어느 정도 의결권을 행사하느냐다. 이들이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의결권 행사에 나설 경우 자칫 정부 입맛에 맞는 사내외 이사가 선임돼 경영권을 침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5개 경제단체가 내놓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관련 보고서도 국민연금의 과도한 역할에 우려를 나타냈다. 보고서는 “금융위·복지부 등이 국민연금 등 연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을 권고하고 이행 여부도 공시할 예정이므로 정부 영향력이 커질 전망”이라고 적시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국민연금은 ‘공공기관’인 동시에 공적연금이기 때문에 주주권 행사가 정치적 영향력에 노출될 수 있어 가입자 이익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가 활용될 수도 있다”며 “국민연금이 민간 기업경영에 관여하도록 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도 “국민들이 (국민연금에) 바라는 것은 재벌개혁이나 지배구조 개혁이 아니라 돈을 벌어서 노후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며 “국민연금을 기업의 압박수단으로 활용하기 전에 수익성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이른바 ‘5%룰(주식 대량 보유 보고 제도)’도 논란의 대상이다. 기존에는 현행 자본시장법을 근거로 “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주식 등을 5% 이상 신규 취득하거나, 5% 이상 보유자가 보유목적을 ‘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변경한 경우 이후 1%포인트 이상 변동 시 그날로부터 5일 이내에 그 보유상황·보유목적 등을 상세히 보고”한다고 규정해두었다. 이 규정 때문에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사들은 ‘경영권에 영향을 줄’ 주식 거래를 할 때마다 매매 종목을 거의 수시로 공개해야 했다. 자산운용 전략이 노출되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어 경영권에 영향을 줄 주식 거래를 제한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는 이런 부담을 줄여주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지난 6월 8일 배포한 스튜어드십 코드 관련 ‘법령 해석집’과 ‘해설서’는 주식을 대량 보유한 기관투자사의 공시부담을 줄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령 해석집에는 상기 규정을 ‘약식보고’ 형식으로 바꿔 “보유목적이 ‘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 경우 보유상황 변동월의 다음 달 10일까지 간소하게 보고하는 등 특례 적용”할 수 있도록 경감해주었다. 국내 대기업 상장 계열사 지분을 5% 이상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뿐 아니라 자산운용사도 (5%룰의 완화로) 공시의무 부담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주식 거래를 통해 기업의 지분구조를 바꿀 수 있게 된다.

지난 2월 13일 금융위원회 주관으로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스튜어드십 코드 참여예정기관 간담회’ 모습. ⓒphoto 금융위원회
지난 2월 13일 금융위원회 주관으로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스튜어드십 코드 참여예정기관 간담회’ 모습. ⓒphoto 금융위원회

자율 어려운 ‘자율규범’

스튜어드십 코드가 강제규범(hard law)인지 자율규범(soft law)인지도 쟁점이다. 그동안 정부는 기관투자사들의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이 강제규범이 아니므로 ‘대기업 길들이기’와 거리가 있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자율규범’이라 해도 정부가 국민연금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 이를 기업에 대한 규제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미 국민연금은 지난 7월 24일 ‘국민연금 책임투자와 스튜어드십 코드에 관한 연구 용역’에 관한 입찰공고를 냈다. 김성주 신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취임사를 통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의지를 강하게 시사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 역할을 하는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최종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12월까지 연구 용역에서 도출된 결론을 바탕으로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한다는 뜻이다. 5%룰을 비롯한 몇 가지 우려되는 쟁점에 대해 이 관계자는 “연구 용역에서 다뤄질 부분이라 그 결과가 나와야 알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연구 용역에서 스튜어드십 코드의 장단점, 국민연금의 도입 가능 수준이 다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M자산운용사의 트레이딩 부문 매니저 A씨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하면 다른 자산운용사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며 “자칫 자율규범 규정이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A씨의 설명이다. “정부가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을 강제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한 자산운용사에 가점(加點)을 준다는 식으로 운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자산운용사는 연기금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국민연금으로부터 자산을 위탁받아 운용하며 수수료를 챙긴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되지 않은 자산운용사에 자산을 맡기지 않겠다고 하면 자산운용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인데, 이걸 자율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스튜어드십 코드 무용론이 제기된 바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최초로 도입한 영국의 경우 스튜어드십 코드 준수 기관투자사는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2015년 하버드 로스쿨 논문) 영국 재무보고위원회(FRC) 보고서에 따르면, 기관투자사의 경영 관여와 기업 공시의 질 향상에 스튜어드십 코드가 끼친 영향이 거의 없는 것으로도 조사됐다. 일본도 상황이 비슷했다. 일본 다이와(大和)연구소도 “기관투자사들이 스튜어드십 코드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신탁고객들이 이 보고서를 보고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

2016년 12월 19일 스튜어드십 코드 운영을 맡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위원장 조명현)은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 최종안을 발표했다. 최종안은 총 7개의 원칙과 그 원칙에 따른 ‘안내 지침’으로 구성돼 있으며 기관투자사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7가지 원칙은 △수탁자 책임 정책 제정·공개 △이해 상충 해소 △투자 대상 회사 점검 △수탁자 책임 활동 이행 △의결권 정책, 행사 내역·사유 공개 △주주활동의 주기적 보고 △역량·전문성 강화로 요약된다. 11월 16일 현재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 전체 가입기관은 한국투자신탁운용, 메리츠운용을 비롯해 모두 12개사이다. 국민연금의 최종 가입 여부는 기금운용위원회를 거쳐야 하지만, 조명현 위원장은 지난 7월 한 일간지 기고문에서 “스튜어드십 코드의 성공적 정착과 확산에 국민연금의 적극적 참여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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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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