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종’을 만든 김메리 선생(앞줄 가운데).
‘학교종’을 만든 김메리 선생(앞줄 가운데).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노래다. 동요 ‘학교종’. 김메리 선생이 작사·작곡했다. ‘학교종이 땡땡땡’이란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8년 탄생했고, 요즘도 동요로 널리 불린다. 음악스트리밍 서비스 지니에서 ‘학교종’을 검색해 봤다. 210여곡이 나온다. 비슷한 제목의 다른 노래는 제외한 숫자다. 합창단이 부른 ‘학교종’, 자장가처럼 편곡한 ‘학교종’, 아이가 부른 ‘학교종’ 등 다양하다.

69년간 한국인의 애창동요였지만 저작권료는 단 1원도 받지 못했다. 김메리 선생과 그 후손이 저작권협회에 가입하지 않아서다. 이 사실은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의 추적으로 밝혀졌다.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이하 함저협)는 음악인(작사·작곡·편곡자)들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신탁단체다. 2014년에 문을 열었다. 그전까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독점 체제였다.

함저협의 백순진 이사장은 김메리 선생이 어느 저작권협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후손을 찾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얘기다. 자녀들이 뉴욕에 살고 있다는 게 유일한 단서였다. 딸의 이름은 그윈 친(Gwen Chin). 백 이사장은 한대수씨에게 수소문을 부탁했다. 한씨는 지난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씨는 어렵게 그윈씨를 찾아냈다. 지난 11월 초다. 한씨의 설명이다. “따님이 동포사회와 연고가 없어 연락처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이달 초 그윈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윈씨는 어머니의 노래 ‘학교종’이 한국에서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음원 저작권을 살펴보자. 음원 저작권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1. 저작자로서의 지적재산권 2. 실연자로서의 저작 인접권, 3. 음반제작자로서의 저작인접권이다. 1번의 권리는 음악저작권협회에 신탁한다. 2번은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에 신탁한다. 3번의 권리는 한국음반산업협회에 등록한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고인이 된 김광석의 경우로 보자.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김광석이 작사·작곡한 곡이다. 이 곡이 상업적인 용도로 쓰이면 김광석은 음악저작권협회를 통해 작사·작곡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는다. ‘서른 즈음에’ 같은 경우엔 작사·작곡자가 따로 있다. 이 경우 김광석은 실연, 즉 직접 연주하고 노래한 부분에 대해선 음악실연자연합회를 통해 저작인접권료와 보상금을 받는다. 직접 음반을 제작한 경우 음반산업협회를 통해 보상금을 받는다. 김광석의 경우 이 세 가지 경로를 통해 1998년부터 올해 8월까지 10여년간 총 11억8400여만원의 저작권 수입을 지급받았다. 현 상속인인 서해순씨가 수령했다. 저작재산권, 즉 작사·작곡에 대한 보호기간은 생존 시와 사망 후 70년간이다.

예전엔 음반을 내면 음반 판매 수입 정도가 주된 수입이었지만, 요즘엔 수익 플랫폼이 다양해졌다. 멜론, 지니, 벅스뮤직 등 디지털 음원 제공 서비스업체 등장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징수액을 보면 음원(전송·31%), 노래방 등 공연(29%), 방송 사용(19%) 등이다.

김광석씨 음원 수입이 예상보다 많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음원 스트리밍 수익 분배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2012년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자료를 보면 음악 한 곡을 다운로드받으려면 한국의 경우 최저 700원을 낸다. 일본은 2237원, 미국은 791원이다. 음원 스트리밍의 경우 정액제를 통하면 회당 7원까지 내려간다. 이제 이 7원을 관련자들이 나눠가진다. 문화체육관광부 규정을 보자. 스트리밍 기준(1회 7원)으로 일단 음원사용료의 40%는 서비스사업자가 가져간다. 44%는 음반제작사(3.08원)가 가져간다. 나머지 16%를 작사·작곡가와 가수가 나눠갖는다. 작사·작곡가가 음원 매출의 10%(0.7원)를, 가수나 연주자는 저작인접권으로 6%(0.42원)를 가져가는 식이다.

소액이라도 시간이 흐른 후엔 생각지 못한 액수로 쌓여 있는 경우가 있다. 작사가 이철수씨의 경우다. ‘명동부르스’ ‘0시의 이별’ 등을 작사했다. 이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작권협회에 가입했다고 한다. 유족들은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 자식 중 한 명이 일이 있어 한국에 들어왔다가 아버지 지인에게 이런 얘길 들었다. ‘저작권 수입을 확인해 보라.’ 협회에 확인해 보니 수천만원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김메리 선생의 ‘학교종’의 경우엔 저작권 수입을 행사할 수 있는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된다. ‘교과서’다. ‘학교종’은 악보의 형태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었다. 한국복제전송저작권협회(이하 복전협)를 통해 보상금을 받는다. 협회에 가입을 해야 받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무조건 받을 수 있다. 출판사에서 특정 음악의 악보를 실으면 이에 대한 보상금을 복전협에 전달한다. 건당 보상금은 판매부수에 따라 다르다. ‘학교종’의 경우는 어떨까. 복전협의 김준희 분배관리부장의 얘기다. “김메리 선생과 후손의 소재를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음악의 경우 작사·작곡자가 명확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 소재 파악을 하는 과정에서 연락이 된다. 최근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다. ‘보상금을 찾아가라’ 전화해서 얘기하면 ‘너네가 뭔데 돈을 준다는 거냐, 보이스피싱 아니냐’ 이런 답을 듣기도 한다.”

좀 다른 얘기지만, 교과서뿐 아니라 대학교 강의자료도 보상금을 내고 써야 한다. 수험목적보상금이다. 수업시간에 파워포인트를 통해 논문이나 영상, 사진의 일부를 보여주는 경우에도 사후에 보상금을 내야 한단 얘기다. 제도 실시 초기엔 ‘수업시간에 들어와 확인할 거냐 어쩔 거냐’는 식으로 버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실태조사업체를 선정해 정기적으로 교수를 면담해 목록을 작성하는 식으로밖엔 파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 최근엔 ‘지불하고 자유롭게 쓰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김준희 부장은 “김메리 선생의 상속인과 연락이 닿으면 그동안 쌓인 보상금을 전달한다”고 말했다.

함저협의 백순진 이사장은 “김메리 선생이 저작권협회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받지 못한 금액이, 적어도 5억원은 되지 않을까 예상된다”고 말했다. 복전협을 통한 교과서 보상금과 달리 음원 저작권료는 소급 적용이 안 된다. 다만 현재 유통 중인 앨범에 대해선 저작권료 지불을 요구할 수 있다. 김메리 선생의 딸 그윈씨는 곧 함저협에 가입할 예정이다.

생전의 김메리 여사 ⓒphoto 조선일보
생전의 김메리 여사 ⓒphoto 조선일보

3대로 이어진 여성의 힘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메리 선생은 상당히 진취적인 삶을 살았다. 21세기 사람의 눈으로 봐도 놀라울 정도다. 간단히 기술하면 이렇다. 1904년생, 대한제국 외무대신을 지낸 김익승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청풍 김씨이고 호적상 이름은 김삼식이다. 메리란 이름은 어머니로부터 받았다. 당시 선생의 집앞에 승동교회가 있었다. 선생의 어머니는 여성 전도사를 집으로 초대해 성경 공부를 했다. 양반집 며느리라 자신은 드러내놓고 개종하지 못했지만, 딸 삼식은 두 살 때부터 교회에 들여보냈다. ‘성경에서 제일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의 어머니의 이름 마리아(메리)’라며 그 때부터 딸을 메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생의 어머니는 ‘도둑질 빼고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워라’고 딸을 독려했다. 이화여전에 들어가 영어를 배웠다.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학교종’을 울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침기상, 식사, 기도, 수업, 취침시간을 알리는 종이었다. 1928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선생에게 외국행 기회가 왔다. ‘바버 장학생’에 뽑혔다. 미국인 바버 부부가 ‘아시아 여성 교육에 이바지하겠다’며 출연한 장학기금이었다. 미시간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여비와 학비, 기숙사비 일체에 한 달에 100달러씩 용돈까지 받았다.

선생은 곧 벽에 부딪혔다. 아무리 여전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어도, 셰익스피어 원문을 통째로 읽어나가는 수업엔 따라갈 수 없었다. 선생은 학과장을 찾아갔다. “영문학 전공을 못 하겠어요.” “한국에서 부전공은 뭘 했나.” 부전공이 있을 리 없었지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요.” 다행히 선생은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그후의 학과생활은 무탈했다. 방학 때도 수업을 들어 4년 만에 석사학위까지 땄다. 졸업 후 이화여대로 돌아와 음악교수가 됐다. 결혼도 했다. 상대는 동포 1.5세였던 오웬 조(조오흥)씨. 하와이에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이민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경우다. 어릴 때 이민을 떠나 한국어를 거의 못 했다고 한다.

‘학교종’이 탄생한 건 광복 직후다. 어느 날 외솔 최현배 선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만들고 있다. 음악 교과서를 맡아달라.” 선생은 “1학년 노래 15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 자리에서 ‘학교종’을 만들었다.

광복 후 정국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좌우익 대결에 폭력사태까지. 선생의 사촌오빠인 김규식의 권유로 1947년 선생의 가족은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선생의 진취성은 이제부터다. 1949년, 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마흔다섯이었다. 미시간주의 웨인주립대 화학과에 입학해 생화학 학사와 미생물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엔 종합병원에서 임상검사실 책임자로 일했다. 요즘으로 치면 임상병리실이다. 73세에 퇴임했다. 남편 오웬과는 71세에 사별했다. 선생의 도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연방정부의 제의를 받아 아프리카로 떠났다. 평화봉사단이다. 라이베리아에서 2년 반을 보냈다. 현지의 위생을 개선하기 위해 ‘숟가락 보내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76세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뉴욕주립대에 입학해 영문학에 다시 도전했다. 졸업 후엔 한인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선생은 딸과 아들을 각각 1명씩 뒀다. 딸 그윈씨는 한인 최초로 뉴욕타임스 기자가 됐다. 1962년 타이피스트로 입사해 능력을 인정받아 매거진 편집장까지 지냈다. 한국으로 치면 주말판이다. 미국은 신문 주말판에 상당히 공을 들인다. 현재도 뉴욕에 살고 있다.

조선 한양에서 시작된 선생의 여정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막을 내렸다. 2005년 눈을 감았다. 101세였다. 선생은 작고하기 10여년 전 뇌졸중으로 잠시 쓰러진 적이 있다. 깨어난 후 한동안 한국어밖에 못 했다고 한다. 선생의 몸은 전 세계를 쏘다녔지만 마음 한 갈피는 학교종을 울리던 여전(女專) 시절을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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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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