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은 황금빛 억새가 바다를 이룬다. 11월, 사람의 물결이 빠져나가t고 나면 사색의 길이 나타난다. ⓒphoto 조선일보
울산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은 황금빛 억새가 바다를 이룬다. 11월, 사람의 물결이 빠져나가t고 나면 사색의 길이 나타난다. ⓒphoto 조선일보

입동(立冬)이 가을에게 말했다. 자리를 내어주라고. 맞다. 이젠 그래야 할 때다. 우리의 부모가 그런 것처럼 가을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붉게 불태워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그 모든 것을 땅에 떨구고 있다. 하지만 화려함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땅에 떨어진 그 낙엽들마저도 푹신한 길을 만들어 내어주니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복잡한 것은 내려놓고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은 길들을 만들어주었다. 화려한 단풍은 지났지만 사부작 걸을 수 있는 고즈넉한 가을 걷기길 3곳을 소개한다.

■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

‘영남알프스’는 가을 등산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산군(山群)이다. 설악산과 지리산, 내장산 등 내로라하는 가을 산들이 있지만 영남알프스는 간월산(1083m), 신불산(1209m), 영축산(1059m), 재약산(1108m), 천황산(1189m), 가지산(1240m), 고헌산(1032m) 등 해발 1000m 이상의 7개 산군이 ‘산해전술’로 유럽 알프스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영남알프스는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으로, 여름에는 폭포와 계곡으로, 가을에는 억새와 단풍으로 산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특히 해발 1000m 내외에서 드넓게 펼쳐진 신불평원과 사자평원, 간월재, 고헌산 정상 등의 가을 억새는 그 규모에서 전국 최대를 자랑한다.

9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억새의 절정 시기는 11월 말 늦가을까지 즐길 수 있다. 조금만 더 서두른다면 늦단풍과 어우러진 억새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하늘억새길’은 영남알프스의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억새가 어우러진 걷기길이다. 총 5개 구간 29.7㎞로 능선 구간이 많다. 영남알프스의 억새를 즐기는 데 초점을 맞춘 코스이며, 비교적 능선이 부드러워 바위산에 비해 산행이 수월하다. 영남알프스의 주요 지점을 구경하고 다시 출발지로 되돌아올 수 있어 더욱 인기가 좋다.

5개 구간을 살펴보면, △1구간 간월재~신불산~신불재~영축산(4.5㎞) △2구간 영축산~청수좌골~죽전마을(6.6㎞) △3구간 죽전마을~향로산갈림길~재약산~천황재~천황산(6.8㎞) △4구간 천황산~능동산~배내고개(7㎞) △5구간 배내고개~배내봉~간월산~간월재(4.8㎞)이다.

1구간은 간월재에서 출발해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신불산으로 간다. 간월산은 전형적인 육산이지만 살짝 악산의 모습도 보여준다. 동쪽으로는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인 간월공룡능선이 뻗어 있어 화려한 경치가 매력적이다. 이곳에서는 억새만 주인공이 아니다. 길 주변으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뒤를 따르며 주연 못지않은 조연 역할을 한다.

숨이 조금 차기 시작하면 능선 전망대와 만난다. 이 전망대는 옛날 공비토벌을 위한 빨치산 지휘소가 있던 자리에 조성한 것이다. 이런 전망대가 많으니 영남알프스도 그만큼 깊은 산이라는 얘기다.

신불산(1209m)은 영남알프스 산군 중에 가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정상에서 동쪽으로는 신불공룡능선이 쭉 뻗어 있다. 공룡능선의 끝자락 즈음에 지금은 폐광된 자수정 광산이 있다. 이젠 영축산으로 길이 연결된다. 1000m 능선을 오르내리며 하늘과 억새가 연결된 듯한 억새 군락을 만끽할 수 있다. 능선을 따라 억새 사이로 걷는 길은 최고의 운치를 자랑한다. 이젠 다시 죽전마을로 하산하면 된다.

재약산~천황산~능동산~배내고개로 연결되는 3~4코스 역시 하늘과 맞닿은 능선과 억새를 실컷 즐길 수 있다. 죽전마을에서 재약산 정상까지 오르막길이 이어지지만 능선에 올라서면 열린 시야와 완만한 산길 덕분에 걷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간월산 정상은 너덜지대라 시야가 파노라마로 트인다.

발 빠른 산꾼들은 30㎞를 하루에 완주하기도 하지만 하늘억새길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불산과 재약산 사이 이천리의 신불산자연휴양림이나 펜션 같은 곳에서 하루를 묵고 이틀에 걸쳐 경관을 조망하면서 천천히 걷는 것이 정석이다.

교통

승용차로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우측으로 빠져나와 언양교차로를 타고 가다가 덕현교차로로 갈아탄다. 여기서 69번 도로로 계속 가면 배내고개가 나온다. 대중교통으로는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가 20분 간격(첫차 06:00, 막차 24:30)으로 서울~울산 간을 운행한다. 요금은 일반 2만2000원, 우등 3만2000원, 심야 3만5200원. 약 4시간10분 소요.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13번을 타면 석남사까지 간다. KTX도 서울에서 울산역까지 바로 운행한다. 동대구를 경유하는 노선도 있어 소요시간은 4시간 내외 걸린다. 요금 5만3500원.

옛 강화도의 보부상들이 걷던 고비고개를 넘는 길은 이제 고즈넉하게 걸을 수 있는 ‘힐링의 길’로 바뀌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옛 강화도의 보부상들이 걷던 고비고개를 넘는 길은 이제 고즈넉하게 걸을 수 있는 ‘힐링의 길’로 바뀌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 강화도 고비고개길

옛 보부상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고개를 넘어 물건을 팔러 다녔다. 그런 그들에게 외로움과 쓸쓸함은 인생의 친구이자 길벗이었을 것이다. 강화도의 보부상들이 걷던 길이 바로 고비고개길이다.

강화나들길 5코스이기도 한 고비고개길은 강화읍에서 출발해 아름다운 저수지 길을 따라가다가 고려산(436m)과 혈구산(466m) 사이의 낮은 고갯길인 고비고개를 넘어 서쪽 끝에 있는 바닷가에 이른다. 강화나들길은 ‘나들이 하는 길’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길’이라는 뜻도 있지만 ‘나를 낮추고 들어서는 길’이라는 의미도 있다. 고비고개길을 걸으며 만나는 낙엽과 억새들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나만 혼자’라는 고독이 어느새 길벗이 되어 끊임없는 사색의 길로 인도해준다.

출발지는 강화버스터미널이다. 터미널에서 출발해 처음으로 만나는 곳은 강화산성 남문(안파루)이다. 남문 앞에는 15코스인 ‘고려궁 성곽길’ 안내판이 서 있다. 5코스는 남문을 지나 국화저수지로 이어지고, 15코스는 남장대로 간다.

강화문화센터와 강화고등학교를 지나 찻길 옆으로 나 있는 나무 난간길을 걷다 보면 이내 서문을 지나 국화저수지에 닿는다. 억새가 멋지게 자라는 수변데크는 데이트 명소로 안성맞춤이다. 저수지를 지나 논과 민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고비고개길을 걷는다. ‘고비’는 강화의 옛 행정관서가 있던 ‘고읍(古邑)’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고비고개길 북쪽엔 고려산이, 남쪽엔 혈구산이 있다.

해발 200m 정도 되는 고비고개의 고갯길을 넘어서면 연촌마을이다. 이곳에서 오른쪽 적석사 방면으로 조금 오르면 우리나라 3대 낙조 조망대로 꼽히는 적석사 낙조대로 갈 수 있다. 전망대에 서면 발 아래로는 여덟 개 산(마니·진강·혈구·고려·봉천·별입·화개·해명산)의 능선이 이어져 있고, 오른쪽 멀리 서해바다가 일렁인다. 다만 낙조를 보고 밤에 나머지 길을 걷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걷기를 마친 후 승용차로 적석사까지 올라 낙조를 보는 편이 낫다.

고천4리 마을회관에서 마을길과 숲길을 지나면 고천리고인돌군 이정표가 나온다. 조금 더 가면 더 크고 보기 좋은 오상리고인돌군이 있으니 일부러 갈 필요는 없다. 강화도의 고인돌군은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00년)되었다. 고려저수지를 지나 내가면에서 덕산산림욕장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곳은 낙엽송지구와 잣나무지구 등으로 나뉘어 있어 다양한 풍광과 함께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종착지인 외포리선착장도 빼어난 낙조 조망터다.

교통

서울에서는 신촌역, 염창역 등에서 3000번 버스(강화운수)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강화터미널 하차, 요금 2250원. 승용차로는 올림픽대로→한강신도시IC에서 김포한강신도시 방면 우측 방향→김포대로→강화대교→알미골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강화버스터미널에 닿는다.

‘내연삼용추’는 정선의 진경산수화 속의 무대였다. 관음폭포에서 연산폭포로 가는 구름다리 뒤로는 신선이 내려왔다는 비하대가 있다. ⓒphoto 정정현 영상미디어 국장
‘내연삼용추’는 정선의 진경산수화 속의 무대였다. 관음폭포에서 연산폭포로 가는 구름다리 뒤로는 신선이 내려왔다는 비하대가 있다. ⓒphoto 정정현 영상미디어 국장

■ 포항 내연산숲길

포항을 대표하는 산인 내연산에는 아름다운 계곡과 폭포가 숨어 있는 걷기 좋은 숲길이 있다. 11월 초순까지는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이후로는 푹신한 낙엽이 깔려 서정적인 가을의 낭만을 만끽하며 걸을 수 있다.

내연산은 겸재 정선이 사랑한 산이기도 하다. 그는 청하 현감으로 있으면서 내연산을 진경산수화에 담았다. 연산폭포가 바로 겸재 정선이 2년여 동안 청하 현감으로 있으면서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곳이다. 내연산 계곡을 이루는 12폭포는 금강산에 빗대 ‘소금강’이라고 불렀을 만큼 여느 산의 풍광과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다.

내연산 숲길은 보경사 입구에서 12폭포를 거쳐 경북수목원까지 13㎞쯤 된다. 들머리인 보경사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계곡 옆으로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간다. 폭포 8개는 길을 걸으면서 바로 볼 수 있고, 나머지 4개는 길에서 200~300m 떨어져 있다.

능선 사이로 깊게 나 있는 계곡이 길게 뻗어 있다. 처음 만나는 폭포는 두 개의 폭포가 나란히 흐르는 ‘상생폭포’다. 상생폭의 남쪽 바위더미를 ‘기화대’라 하고, 폭포수가 이룬 못을 ‘기화담’이라 한다. 이곳은 옛날 시인묵객들이 기생과 더불어 가무음곡을 즐기다가 취한 기녀가 춤을 추다 실족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후로 명명됐다고 전한다.

상생폭에서 불과 100m쯤 떨어진 곳에 보현폭포가 있다. 원래는 세 줄기로 낙하하던 폭포였기에 삼보폭이라 전한다. 폭포 옆으로 주상절리 같은 기암절벽이 계속된다. 네 번째 폭포인 잠룡폭포는 암벽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우렁차게 쏟아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잠룡폭포 아래는 거대한 암봉인 선일대(仙逸臺)를 낀 협곡이다.

잠룡폭포 다음으로는 바람을 맞지 않은 폭포란 의미의 ‘무풍폭포’, 경치가 너무 빼어나 관세음보살이 금방이라도 나타나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은 ‘관음폭포’ 등이 잇달아 나타난다. 관음폭포는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비하대 아래 있다.

관음폭포에서 구름다리를 건너면 내연산의 하이라이트인 연산폭포와 만난다. 연산폭포는 내연산 12폭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바로 옆 바위에 ‘鄭善(정선)’이라고 새긴 각자(刻字)가 있다.

잠룡폭포와 관음폭포, 연산폭포를 ‘내연삼용추’라고 한다.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그린 명승 5점 중 하나가 바로 ‘내연삼용추도 1, 2’다. 내연삼용추도는 조선시대 회화로서 보기 드문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관음폭포에서 급경사의 계단을 오르면 학소대와 비하대가 바로 옆에 있다. 그 사이로 길은 계속된다. 앞에는 은폭포가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원래는 여성의 음부(陰部)를 닮았다 해서 ‘음폭포’였으나 후에는 숨을 은(隱) 자를 써 은폭(隱瀑)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은폭 위로는 옛날 화전민이 살던 깊은 숲이 계속되고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대개는 여기까지 걷고 되돌아간다. 어쩌면 늦은 단풍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내연산숲길은 단풍이 다 졌더라도 낙엽과 어우러진 진경산수가 있어 더욱 걷기 좋은 길이다.

교통

승용차로는 포항시내에서 7번 국도 송라면 소재지에서 4㎞ 정도 들어가면 보경사 주차장에 이른다. 주차요금 소형 4000원. 주차장에서 500m쯤 올라가면 보경사 매표소가 나온다. 입장료 어른 3500원, 청소년 2000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포항까지 간 후 포항시내에서 죽도시장을 1일 9회(07:20~19:10) 운행하는 보경사행 시내버스(510번)를 타면 된다. 보경사에서 포항시내행 막차는 21:00. 문의 신안여객 (054)256-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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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원 월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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