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월가 증권거래소 ⓒphoto 뉴시스
뉴욕 월가 증권거래소 ⓒphoto 뉴시스

‘2020년 1조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연방정부 연간 재정적자, 2028년 33조달러를 넘어설 국가부채(국내 총생산의 96% 수준), 2017년 기준 10억달러의 적자에 허덕이는 대중국 무역, 잊을 만하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연방정부 셧다운….’

전 세계 매체들이 심심하면 강조하는 미국 경제의 어두운 면이다. ‘황혼의 대제국’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거시경제 차원에서 본 미국의 내일이다. 사실, 조 단위의 달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쉽게 체감하기 어렵다. 5000만명의 한국인이 만들어내는 2017년 국내총생산액(GDP)이 1조4110억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33조달러라는 미국의 국가부채 전망치가 얼마나 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수치들은 지금 미국의 분위기나 경기 체감도와는 거리가 꽤 있다.

2018년 5월, 미국 현지에서 느끼는 경제 현실은 ‘순풍의 돛’ 그 자체다. 어디를 가도 호황의 열기가 느껴진다. 최근 외국에서 돌아와 집 주변 대형 쇼핑몰인 코스트코(Costco)에 6개월 만에 갔다. 아예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주차난이다. 평일 오후에 갔는데도 주차와 빈 카트를 찾아 헤매느라 1시간을 썼다. 미국 생활을 통틀어 가장 긴 쇼핑 대기 시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까 더하다. 꼼짝할 수도 없을 만큼 매장 전체가 인산인해다. 1000달러대로 내려간 65인치 한국산 HD TV 코너는 아예 품절 상태다. 손님의 대부분은 가족 단위로 온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이다. 미국사회 중하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마이너리티들이다. 이들이 싼값에 왕창 구매해서 오랫동안 먹고, 입고, 즐기는 품목들이 코스트코의 주력 상품들이다. 식료품의 경우 ‘유기농’ ‘그린’ ‘환경보호’ 같은 문구가 새겨진 상류층 기호품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경기에 가장 민감한, 미국 중하류층의 구매욕은 지금 한창 불타오르는 중이다.

불타오르는 중하류층의 구매욕

조금 수준을 높여 뉴욕 소호(SOHO)거리 웨스트 13번가에 위치한 테슬라 자동차 전시관을 찾아가 봤다. 저조한 판매 실적과 자율주행 중 사고라는 이중고로 최근 주가 대추락을 경험한 미국을 대표하는 전기차 업계의 선두주자다. 엄청난 크기의 매장과 번쩍거리는 고가 자동차들에 눈이 돌아간다. 예상과 달리 테슬라 매장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국에도 곧 출시될 예정이라는 3만달러대의 보급형 ‘모델 3’ 주변에는 시승 손님 행렬이 죽 늘어서 있다. 코스트코의 손님들과 달리 백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옷차림과 행동을 보면 평범한 중산층들이다. IT의 역사가 그러하듯, 미국에서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대한 관심은 백인들로부터 출발한다. 매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동안, 매체에서 자주 접하는 미국 경제의 어두운 수치와는 다른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진다.

“테슬라는 미래산업의 대안 중 하나다. 자동차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발전문 4차산업의 선두주자다. 주가 향방에 따라 미래가 좌우될 만한 기업이 아니다. 전기자동차 관련 소프트웨어 특허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다.” 테슬라 매장 판매원에게 회사 분위기를 묻자 바로 이런 답이 돌아왔다. 4년 만에 주가가 10배 오른 것을 감안하면, 주가가 잠시 하락한 것이 너무도 정상적이라는 얘기다. 사실 테슬라 매장을 찾는 손님들 대부분은 자동차 성능과 가격에 주목할 뿐이다. 미디어가 염려하는, 테슬라란 기업의 어두운 미래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도 없다. 현대자동차 구입자가 현대자동차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가 현장에서 느낀 미국 경제의 순풍이 미국 내 일부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CNN,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에서 내보내는 뉴스에만 의존한다면, 필자의 경기 체감을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정도로 비판할 듯하다. 어떤 정보에 의존하는가는 미디어 소비자에 달려 있겠지만, 현재 미국의 대도시와 동서 해안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미디어들은 ‘트럼프 때리기’로 날과 밤을 보내고 있다. 트럼프에 관한 모든 것이 부정적이다.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에 관해서도 일거수일투족에 시비를 건다.

필자는 트럼프 지지자도 반대자도 아니지만, 실업률은 ‘트럼프 경제’의 현황을 보여주는 가장 객관적인 증거일 것이다. 올해 4월 말 기준 미국 내 실업률은 3.9%다. 트럼프 집권 이후 꾸준히 낮아지다가 마침내 3%대 실업률에 진입한 것이다. 18년 전인 2000년 12월 이래 가장 낮은 실업률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필자는 2000년 당시 미국 경제 상황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른바 ‘닷컴혁명’과 더불어 버블의 정점에 서 있던 시기다. 21세기 신시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인 대부분이 ‘글로벌’이란 종교를 맹신하던 때이기도 하다.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밀어붙이던 희망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1년 뒤인 2001년 9·11 동시테러를 겪으면서 미국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당시 거품이 꺼지기 전까지 누리던 경제적 풍요함은 지금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대의 실업률도 가능하다는 전망

2018년 현재 미국의 실업률은 당시 버블 호황에 비견될 만큼 순풍의 돛이다. 한국 정부가 내세우는 슬로건 중 하나가 ‘일자리 정부’지만, 트럼프는 그 같은 역할에 가장 어울리는 지도자 반열에 이미 올라서 있다. 대부분의 미국 경제학자들은 현재의 실업률이 앞으로 한층 더 좋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2차대전 이후 미국 역사상 최저실업률은 2.5%다. 한국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5월의 대기록이다. ‘아메리카 퍼스트’와 보호주의 무역 정책에 힘입어 트럼프가 재임 중 2%대의 실업률을 다시 창조해낼 수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현재 불어닥친 순풍의 돛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구축해놓은 경제구도의 수혜물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다르게 본다. 오바마의 경우 재임 1기 때인 2010년 3월, 무려 9.9%의 실업률에 허덕였다. 실업률 3%대는커녕 4%대가 최고 성적이다.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로 본다면 오바마의 경제정책은 평균점 이하다. 미국 밖에서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수구 보호주의자’로 폄하되지만 미국 내 경기에 비춰보면 미국 경제의 순풍은 트럼프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트럼프의 공적 중 가장 큰 것으로는 친기업 환경 구축이 꼽힌다. 취임과 더불어 실시한 감세 정책이 대표적이다. 실제 미국의 연방법인세율은 올해부터 대폭 삭감됐다. 종전의 35%에서 21%로 확 줄어들면서 올 한 해만도 170조달러의 감세(減稅)가 예상된다. 세금이 줄어들면서 기업들이 수익의 상당 부분을 재투자, 사업확대에 쓰면서 완전고용 수준의 실업률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주목할 대상은 글로벌 경제의 최첨단에 서 있는 미국의 거대 IT기업들이다. 기억에도 새롭지만, 2011년 2월 오바마가 캘리포니아 IT기업 ‘수장’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뤄진 깜짝 이벤트로, 당시 오바마의 오른쪽에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시자가, 왼쪽에는 스티브 잡스가 앉았다. 당시 미팅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해외에 생산기지를 갖고 있는 애플과 같은 기업들의 행보였다. 미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 고용창출에 나서달라는 것이 당시 오바마의 부탁이자 생각이었다. 당시 IT기업의 근거지인 캘리포니아는 오바마 지지기반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당시 스티브 잡스는 “생산기지의 미국 이전이 어렵다”는 말만 했다. 애플은 오바마 재임기간 중 매장 직원수 증가와 복지 향상 정도로만 미국에 투자했다. 그런데 IT기업과 캘리포니아가 ‘미워하는’ 트럼프는 이들 IT 강자들과 어떤 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미국으로 밀려드는 IT기업들의 수익금

트럼프는 IT기업이 갖는 경영의 스피드에 주목한다. 에너지·건설·유통 관련 아날로그 기업들과 달리 발 빠르게 경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곳이 IT기업들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인지 트럼프는 감세의 최대 수혜자로 IT기업을 특별히 지목했다. 해외 자회사로부터 들어오는 수익에 대해 특별감세 혜택을 줬다. 최근 애플 등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이 폭등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도 해외수익에 대한 감세 덕분이다. 수익금이 미국으로 들어올 때 지불하던 법인세가 대폭 감소되면서 중국과 해외에서 떠돌던 현금이 미국 안으로 쏟아지듯 밀려들고 있다. 작년만 해도 애플 3600억달러, 마이크로소프트 1700억달러, 알파벳(구글) 850억달러 등 엄청난 해외 수익금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트럼프는 이들 글로벌 IT기업에 대한 법인세를 한시적으로 15.5%로 내린 상태다. 35%에서 21%로 내린 것도 엄청난데, 다시 15.5%로 특혜를 준 것이다. 15.5% 특혜가 끝나기 전에, 해외진출 IT기업의 미국 내 인바운드(inbound)도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이들 돈이 한순간에 밀려들면서 주식 배당에 대한 기대도 덩달어 올라가는 중이다. 물론 이들 IT기업들이 자사주식을 대량매입하면서 주가를 밀어올리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해외 수익금의 인바운드는 중국 등 해외 IT기업 아웃바운드에도 제동을 거는 중이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외국에 투자되던 돈들이 미국 안으로 밀려들면서 상대적으로 중국이나 신흥공업국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와 같은 명분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기업의 생명줄인 ‘법인세’를 미끼로 한 세금정책이 갖가지 정책 효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비즈니스맨 출신 대통령의 판단과 결단이 낳은 효과인 셈이다.

감세와 더불어 주목할 부분은 아날로그 산업에 대한 지지와 지원이다. 트럼프의 지지기반은 두 개의 벨트에서 출발한다. 미국 중서부의 ‘러스트 벨트(Rust Belt)’와 남부 복음주의자로 유명한 ‘바이블 벨트(Bible Belt)’다. 대통령 선거기간 동안 자주 언급됐던 저학력 블루칼라, 백인 중심의 인종차별주의자, 총기 소유 지지자들이 몰려사는 지역들이다. 대도시 미국에 익숙한 한국인이 보면 관심 밖 영역이겠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들 지역은 ‘정책 영순위’ 대상이다. 마치 흑백필름처럼 느껴지는, 반세기 전 맹위를 떨쳤던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산업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지역은 미국 경제가 글로벌화되면서 미국 경제의 문제아로 전락했다. 중국 경제가 맹위를 떨칠수록 러스트 벨트와 바이블 벨트는 황폐하게 변해갔다. 남부의 주력상품 중 하나였던 의류·신발 산업은 아예 씨가 마른 채 ‘메이드 인 차이나’로 대체된 지 오래다.

텍사스주 미들랜드의 석유 시추 시설. ⓒphoto 뉴시스
텍사스주 미들랜드의 석유 시추 시설. ⓒphoto 뉴시스

부활하는 러스트·바이블 벨트

트럼프는 바로 이들 지역의 상황과 목소리에 주목하는 인물이다. 이들 지역의 실업률을 줄이고,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아주는 정책 발굴에 나섰는데 핵심이 바로 에너지산업 진흥이었다. 아날로그 산업 가운데 고용창출 효과가 가장 빠르고 대규모로 나타나는 분야가 에너지산업이다. 자원 그 자체가 아니라 관련 시설 건설, 원유 가공과 수송, 유통에 따른 부가가치가 빠르게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백인의 전통적인 사업 영역이기도 하다. 제임스 딘 주연의 1956년 영화 ‘자이언트’가 좋은 예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재 미국 곳곳에서는 대규모 석유 파이프라인이 다시 건설되는 중이다. 그린(Green)은 21세기 서방세계를 지배해온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였지만 트럼프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는 대통령 직권인 행정명령(Executive Order)을 통해 에너지 관련 정책을 바로바로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예산이 투입되면서 러스트 벨트, 바이블 벨트 내 유권자들에게는 일자리가 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트럼프는 35%대의 부동의 지지자들을 갖고 있다. 한때 미국이 자랑하던 아날로그 산업의 기수들이 주된 지지세력이다. 최근 트럼프는 차기 대통령 당선 안정권인 40%대의 지지율에 올라섰다. 여러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러스트 벨트, 바이블 벨트에 대한 아날로그 산업 진흥책이 40%대 지지율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실업률이 낮아지고 각종 경제지표가 개선되면서 미국의 임금상승도 가속화되고 있다. 시간당 급료를 기준으로 할 때 4월 말 임금은 1년 전 같은 기간에 비해 2.6% 상승했다. 트럼프 집권과 함께 시간당 임금상승률은 대략 2.5%대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기간 인플레는 2% 정도로 비교적 낮다. 오바마 집권 당시의 평균 임금상승률 3.5%에 비해 낮지만, 인플레와 체감경기를 감안할 때 견실한 구조다. 오바마 집권기처럼 10% 가까운 실업률과 불황 속에서는 소비자들이 주머니를 잘 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경기가 살아난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미국 국민 대부분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2008년 이후 미국 경제의 암초로 작용해온 부동산 시장은 그같은 심리를 반영하는 증거다. 리먼브라더스(Lehman Brothers) 파산에서 시작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는 서브프라임모기지론(비우량주택담보대출)이었다. 버블이 터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자 이자는커녕 원금도 갚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금융기관 파산이 도미노식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수년간 후유증에 시달리던 미국의 부동산 경기도 트럼프 집권과 함께 극적으로 기사회생하는 중이다.

지난해 미국의 총 GDP 성장률은 당초 기대보다 높은 2.6%에 달했다. 올해는 0.2%포인트 높은 2.8%로 전망된다. 성장의 견인차 역할이 바로 건설 분야였다. 지난해 4분기를 기준으로 1년 전에 비해 무려 8.5% 성장했다. 같은 기간 IT정보 분야는 -0.2%에 그쳤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이 건설, 민주당이 IT에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낙관적 경제심리를 반영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운이 좋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트럼프는 요즘 “리먼브라더스 악몽을 끝낸 대통령”으로 불린다. 부동산 건설붐과 함께 부동산 가격도 가파르게 오르는 중이다. 워싱턴 의회 주변 투룸 아파트 월 임대료도 1년 전에 비해 무려 400달러나 오른 3800달러 선이다. 도시 주변의 집값도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다. 2월 기준 미국 20개 도시의 집값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8%나 상승했다. 건설에 눌려 찬밥처럼 느껴지지만, IT정보 분야의 성장률도 수직상승할 전망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올 들어 본격화된 글로벌 IT기업의 리바운드가 주된 이유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상반된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지금 미국 경제가 2000년의 ‘닷컴버블’에 준할 만큼 불안정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득이 오르고 실업률이 계속 떨어지면서 지금 미국인들은 행복하다. 미국 밖에서는 싫어할지 모르지만 지금 미국인들은 트럼프가 외쳐온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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