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현 이마리 오카와치야마 마을. 골목마다 도요가 자리해 있다. ⓒphoto 사가현 관광연맹
사가현 이마리 오카와치야마 마을. 골목마다 도요가 자리해 있다. ⓒphoto 사가현 관광연맹

예상외였다. 비행기는 반 넘게 차 있었다. 보잉 737-800, 189명이 탈 수 있는 기종이다. 8월 25일 일본 사가행 비행기 안이었다. 태풍 솔릭과 시마론을 동시에 맞으며 한국과 일본 모두 술렁대는 참이었다. 오랜만의 태풍 탓에 일부 비행편엔 결항과 지연이 이어졌다. 일본 여행 정보를 나누는 인터넷 카페 ‘네일동’ 게시판은 태풍으로 초토화됐다. 일본 여행을 미뤄야 하나, 취소한다면 어떻게 환불을 받을 수 있나 걱정글이 가득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일본 기상청 예보를 확인하면서 주말 일본행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명 ‘쌍태풍’ 사태를 겪으며 세 가지를 알게 됐다. 첫째, 같은 구간이라도 조종사에 따라 결항 여부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똑같이 폭풍이 몰아치는 저녁 9시에 인천에서 나리타를 가는 노선이라도 A항공은 비행기를 띄우는데 B항공은 결항할 수 있단 얘기다. 조종사와 항공기의 등급 때문이다. 잘 모르고 비행기를 타러 가지만, 사실 모든 공항과 비행기, 조종사에겐 등급이 매겨져 있다. 전천후착륙카테고리(CAT)란 이름으로 나눈다. CAT-1, CAT-2, CAT-3 하는 식이다. 셋 중 CAT-3이 제일 높다. 등급을 매기는 기준은 ‘날씨’에 대한 대처능력이다. 활주로에는 가시거리, 즉 RVR(Runway Visual Range)을 측정하는 장비가 설치되어 있다.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면 시정이 안 좋다. 즉 가시거리가 짧아진다. 이러면 착륙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활주로 가시거리가 550m일 때 착륙 가능하면 CAT-1 등급이다. 300m만 돼도 착륙 가능하면 CAT-2, 175m에도 착륙 가능하면 CAT-3이다. 등급 안에서도 다시 세분화된다. 예를 들면, CAT-3c라면 안개가 자욱해 앞이 거의 안 보여도 착륙할 수 있다. 시설에 따라 공항에도 등급을 매긴다. 인천공항은 CAT-3b 등급이다. 아시아 공항 중 최고 등급이다. 김포공항은 CAT-3a, 제주공항은 CAT-2 등급이다. 조종사도 같은 식으로 등급이 나뉜다. 둘째, 여행자보험 중 항공기 지연, 결항을 보상하는 보험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삼성화재와 에이스손해보험 정도다. 셋째, ‘일본 기상청은 허풍이 심하다’는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다. 걱정이 짙어지자 네일동 카페 게시판엔 일본 여행 구력이 쌓인 몇몇 여행자들의 글들이 올라왔다. ‘일본 기상청이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 적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맞는 평가였다. 일본 여행 기간 내내 태풍은커녕 빗방울도 만나지 못했다.

비행시간은 1시간10분. 사가공항은 매우 작았다. 김해공항이나 대구공항보다도 작았다. 입국 수속은 재빨랐다. 지문을 스캔하는 기계 옆에 서 있는 일본인들은 익숙한 듯 간단한 한국어를 써가며 수속을 도왔다. 수속을 마치고 곧장 렌터카 카운터로 향했다. 공항이 워낙 작으니 입국장을 나서자 화장실부터 렌터카 안내소까지 모든 게 한눈에 보인다. 도요타렌터카로 가 차량을 빌렸다. 사가현은 사실 규슈의 7개 현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현이다. 일본인들 중에도 사가현과 시가현을 헛갈리는 이가 있을 정도다. 규슈라고 하면 후쿠오카현, 나가사키현, 오이타현, 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 사가현을 가리킨다. 사가현의 전체 인구는 82만여명, 위치로 보면 후쿠오카와 나가사키 사이에 있다.

신이 된 도공 이삼평

사가공항에서 택할 수 있는 교통은 네 가지다. 셔틀버스와 리무진, 택시, 렌터카다. 셔틀버스는 사가공항과 우레시노·다케오 사이를 오간다. 왕복 8000원. 일본의 대중교통으론 꽤 저렴한 가격이다. 사가현에서 순전히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만든 일종의 특별 교통편이다. 인천~사가를 오가는 유일한 항공사인 티웨이의 도착시간에 맞춰 셔틀 버스를 운행한다. 렌터카를 빌릴 때도 혜택이 있다. 2명 이상이 함께 차를 빌리면 첫 24시간은 1000엔, 우리돈으로 약 1만원에 이용할 수 있다. 사가현 관광청이 진행하는 일종의 이벤트다. 차종에 따라 할인 금액엔 차이가 있다. 렌터카는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도 되지만 도착해 예약해도 상관없다.

경차에 몸을 싣고 곧장 우레시노(嬉野)로 향했다. 인구 3만명이 안 되는 소도시다. 온천과 녹차가 유명하다. 특히 온천으로선 13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원천, 즉 온천물이 나오는 곳이 17곳이나 된다. 우레시노강 주변에 60여개의 숙소가 있다. 우레시노라는 지명의 유래는 이렇다.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가 이 지역의 온천에서 건강해지는 걸 오진 천황의 어머니인 진구(神功) 황후가 봤다. “아라, 우레시노(어머, 기쁘네)”라고 말한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첫날 예약한 우레시노칸은 리조트 료칸이다. 한국으로 치면 콘도에 온천이 딸려 있는 식이다. 노래방, 게임룸, 탁구대처럼 가족 여행객들이 즐길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아침·저녁 식사도 뷔페식이다. 일본 료칸의 경우 숙박요금의 상당 부분이 식사비다. 료칸마다 개성을 담은 식사를 내놓는다. 저녁은 가이세키 정찬 코스다. 우레시노칸처럼 뷔페식인 곳은 숙박요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성수기 기준으로 하룻밤에 1인당 10만원대에 묵을 수 있다. 객실이 많아 이번처럼 급하게 잡은 여행에 제격이다. 역시 들은 대로 온천물이 좋았다. 료칸의 온천물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는 미네랄 함유량이다. 신선한 온천물일수록 물속에 미네랄, 유노하나 성분이 풍부하다. 욕조에 불순물처럼 붙어 있는 게 바로 미네랄이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마치고 곧장 아리타로 향했다. 사가현의 명물은 도자기, 온천, 녹차, 소고기 이 네 가지다. 태풍을 뚫고 찾은 이유는 바로 도자기였다. 사가현 아리타와 이마리는 일본 백자의 고향 같은 곳이다. 그 중심엔 조선인 ‘이삼평’이 있다. 충청도 금강(충남 공주) 출신인 도공 이삼평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다. 좀 다른 얘기지만, 이삼평을 끌고간 일본군은 나베시마 나오시게 휘하의 부대였다. 나베시마 가문은 대대로 사가번의 다이묘, 즉 영주였다. 영친왕과 결혼한 이방자 여사의 외가가 바로 나베시마 가문이다. 나베시마 가문은 메이지유신에 참여한 후 일본 황실과 사돈을 맺었다. 이방자 여사의 어머니가 황족과 결혼을 했다. 이삼평은 일본에선 가네가에 산베에라는 이름을 썼다. ‘삼평’으로 본명을 추측하는 것도 ‘산베에’의 발음 때문이다. 일본 도자기사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보면, 이삼평은 자기의 원료인 고령토를 찾기 위해 사가번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1616년 아리타 이즈미야마에서 좋은 고령토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가마를 지어 백자를 굽기 시작했다. ‘아리타 자기’의 시작이었다.

첫 목적지는 규슈도자기문화관. 일본 도자기가 어떻게 변천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다. 아리타 곳곳엔 무료이거나 저렴한 입장료로 둘러볼 수 있는 시설이 많다. 소장품 수준은 높다. 포세린파크나 아리타도자기미술관도 둘러보면 좋다.

아리타까지 갔으니 도잔 신사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삼평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아리타에서 이삼평은 신이다. 도자기의 시조라는 뜻의 도조(陶祖)가 되어 도잔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 오진 천황과,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다. 매년 5월 4일엔 그를 기리는 도조 축제가 열린다. 신사는 조용했다. 이색적인 건 도리이(鳥居)였다. 도리이는 신사 입구에 세우는 문을 뜻한다. 한국의 홍살문과 유사하다. 대개 나무로 만들어 다홍색으로 칠해놨다. 교토의 후시미 이나리 신사엔 1000개가 넘는 다홍색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등장하는 다홍색 터널이 바로 이 도리이였다. 일본의 신사를 여러 군데 다녀봤지만 도자기로 된 도리이는 처음이었다. 흰색 바탕에 연한 청색으로 당초무늬를 그려놨다. 1888년 지역 도공들이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은 도잔 신사의 상징이다.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신사 입구엔 한국어 안내판이 붙어 있다.

‘도자기 헌팅’을 할 수 있는 창고. ⓒphoto 사가현 관광연맹
‘도자기 헌팅’을 할 수 있는 창고. ⓒphoto 사가현 관광연맹

도조 이삼평에게 인사를 한 후 사냥을 떠났다. 바로 ‘도자기 헌팅’이다. 정식 명칭은 ‘고우라쿠 도쿠나가 도자기 헌팅’. 전화번호를 찾아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내비게이션은 한국어로 안내하는데, 목적지를 입력할 땐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르다. 닿은 곳은 창고였다. 안에 들어서니 말 그대로 도자기의 산이다. 식사할 때 쓰는 그릇이다. 도자기가 가득 담긴 나무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쌓여 있다. 헌팅 방법은 이렇다. 각각 5000엔이나 1만엔을 내면 바구니 하나에 가득 도자기를 담을 수 있다. 슈퍼마켓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바구니다. 시간 제한은 없다. 창고 안이 더운 데다 도자기 종류가 워낙 많아 어차피 보다가 지친다. 5000엔 구역엔 무늬가 적고 단순한 디자인이 많고 1만엔 쪽엔 화려한 자기가 많다. 팔리지 않은 오래된 재고나 작은 흠이 있어 판매하지 못한 자기들이 주종이다. 눈이 밝고 안목이 있으면 ‘보물’을 골라갈 수 있다고 해 ‘헌팅’이다. 미리 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입장할 수 있었다. 한국어를 꽤 잘 구사하는 남자 직원은 “다음엔 꼭 인터넷으로 예약해 달라”고 당부했다.

도자기 산을 헤매다 한국인 여성 두 명과 마주쳤다. 결사적인 기세로 도자기를 고르고 있었다. 미리 입장을 예약했는지 물었다. “웹사이트 자란넷(jalan.net)에서 예약했고 심지어 1000엔 할인까지 받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갑자기 일본인 두 가족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창고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몇 바구니를 채우며 꽤 즐거워 보였다. 사실 창고를 나와 인근 매장만 가도 아리타 자기의 가격대를 알 수 있다. 대접 하나가 수십만원, 수백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대체 이 도자기를 한국에 어떻게 들고 갈 것이며 무엇에 쓸 것인가. 슬슬 올라오는 의문을 애써 누르며 열심히 일본인들 사이에서 도자기 산을 뒤졌다. 고른 후엔 포장이 문제였다. 스스로 포장해야 했다. 창고에서 제공하는 신문지 더미를 이용해 어찌어찌 포장까지 마쳤다.

터만 남은 임진왜란 출병지

다음 행선지는 이마리 오카와치야마 마을. 곳곳에 도요가 있는 도자기 마을이다. 7월과 8월에는 풍령(風鈴)축제를 한다. 도자기로 만든 풍경을 생각하면 된다. 축제라고 별건 아니고 마을 입구에 전통음악을 틀어놓고 진열대를 설치해 여러 가지 풍령을 걸어놓는 정도다. 요란하지 않아 더 정이 간다. 야트막한 오르막 골목 곳곳에 도요가 숨어 있다. 여기에서 만든 자기를 직접 판매하는 매장이 있다. 비슷해 보이지만 유심히 보면 매장마다 특색이 있다. 마을을 산책하며 자기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마리 오카와치야마 마을 입구의 다리.
이마리 오카와치야마 마을 입구의 다리.

이마리를 떠나 가라츠로 향했다. 가라츠시(唐津市)는 사가현의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인구는 약 13만명. 가라츠의 가라(唐)는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국 ‘가야(伽耶) 혹은 가라(加羅)’를 뜻한다. 츠(津)는 ‘항구’이다. 가야항이란 뜻이다. 가야왕국과 인연이 깊은 곳이라 추측할 수 있다. 도시 풍경이었던 것이 갑자기 숲으로 바뀌었다. 니지노마쓰바라(虹の松原·무지개 소나무들판)였다. 소나무 숲이다. 해안을 따라 무지개 모양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17세기에 조성한 인공 방풍림이다. 규모가 꽤 크다. 폭이 1㎞, 길이가 5㎞가량이다. 100만그루의 소나무가 빽빽이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를 자동차로 지난다. 양옆에 펼쳐진 소나무 벌판이 장관이다. 일본의 3대 소나무밭으로 NHK에서 선정한 ‘21세기에 전하고 싶은 일본의 풍경’ 5위로 뽑혔다.

가라츠는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키려 한반도로 떠나는 일본군이 모여 있다 출병한 곳이 가라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무르며 전쟁을 지휘하기도 한 나고야(名護屋)성은 현재 터만 남아 있다. 복원도 힘든 것이,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아예 부숴버리고 그 자재로 가라츠성을 지었다. 성터를 둘러보다 ‘규슈 올레’ 표시와 마주쳤다. 제주 올레 브랜드가 처음으로 해외 진출한 곳이 바로 규슈다. 2012년 첫 트레킹 코스를 개장했다. 현재 규슈에만 21개 올레 코스가 있다. 사가현엔 3개가 있다. 가라츠 올레와 다케오 올레, 우레시노 올레다.

이날 숙박은 우레시노의 온야도 다카사고 료칸이었다. 객실 수 10개의 그리 크지 않은 료칸이다. 료칸의 오카미상(여성 주인)과 그 딸은 한국어를 상당히 잘 구사했다. 웬만한 의사소통은 다 통할 정도였다. 오카미상에게 한국인들이 언제부터 찾아오기 시작했는지 물었다. “10년 전부터 찾아오기 시작했다. 역시 직항이 취항하고부터 늘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전통 방식의 료칸에 숙박하고 싶어 몇 군데 료칸에 문의 메일을 보냈다. 놀랍게도 한국어로 답장을 주는 료칸도 있었다. 그곳의 오카미상 역시 한국인 숙박객을 위해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레시노를 비롯해 사가현 곳곳엔 어딜 가나 한국어 표시판이 보였다. 사가현 관광 안내 홈페이지는 한국어로 여행 상담을 해준다. 티웨이는 2013년 인천~사가 노선을 취항한 후 주 3회에서 주 9회로 운행을 늘렸다. 올해 8월 기준 누적 탑승객은 29만명을 넘어섰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저가항공(LCC)의 법칙이 여기에도 통한 셈이다. 29만명의 한국인들은 사가현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료칸의 오카미상들은 한국어를 공부했다. 현재 LCC 면허를 받기 위해 신청했거나 신청을 준비 중인 곳은 플라이강원, 에어로케이항공 등 일곱 군데다. 국토교통부는 뚜렷한 이유 없이 면허 발급 심사를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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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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