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조(46·한국명 조요한)는 차분하고 의젓해 사람이 무게가 있어 보였다. 연기파로 알려진 그는 필자와는 구면이어서 인터뷰 전에 서로 포옹하면서 “그동안 잘 있었느냐”며 인사를 나누었다. 존 조는 인도계 아니쉬 차간티가 감독한 스릴러영화 ‘서치’(원제 Searching)에서 실종된 10대 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로 나온다. 딸의 컴퓨터를 뒤지면서 딸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그동안 자기가 몰랐던 딸의 삶을 알게 되는 아버지 데이비드 김 역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도 깊이와 무게를 지닌 좋은 연기를 한다. 존 조는 가끔 유머를 섞어가면서 신중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존 조는 일본계 부인과의 사이에 두 남매를 두고 있다.

영화 ‘서치’의 한 장면.
영화 ‘서치’의 한 장면.

- 제작진이 역을 제의했을 때 선뜻 응했는가. “고백하건대 처음에 역을 거절했다. 내가 좋아하는 전형적인 스릴러 얘기와 각본에 마음이 끌리긴 했지만 요즘처럼 블록버스터가 판을 치는 마당에 너무 예술적인 독립영화여서 극장에 나오자마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감독 아니쉬와 전화로 통화하면서 ‘내용이 전부 컴퓨터 안에서 진행되는 얘기인데 왜 영화로 만드느냐’ 하는 의문도 생겼다. 오해였지만 유튜브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런데 아니쉬가 날 놓아주질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이다. 그리고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아니쉬가 내 마음을 돌려놓겠다면서 컴퓨터로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이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의 지식과 열정에 감복해 그를 믿게 되었다. 그는 진정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감독은 당신이 가장 재능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면서도 가장 덜 쓰이는 배우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아시안 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어떤 한계를 느끼는가. “가장 덜 쓰이는 배우 중의 하나라는 말엔 나도 동의한다. 그 말 널리 전해주길 바란다. 스튜디오들이 아시안 배우를 쓰는 데 주저하는 것은 사실이다. 스튜디오의 간부들은 아시안 배우를 쓰면 관객이 영화를 외면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는 것 같은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스튜디오들은 미국 관객들과 세계의 관객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관객들은 성공한 영화의 유형만 고집하는 영화 투자자들과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인도계 배우와 나온 ‘해롤드와 쿠마’ 시리즈가 흥행에서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영화가 아시안 배우를 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언가 다른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존 조의 흥행작 ‘해롤드와 쿠마’ 포스터와 영화의 한 장면.
존 조의 흥행작 ‘해롤드와 쿠마’ 포스터와 영화의 한 장면.

- 감독이 배역을 준 것은 한국 사람이어서인가 아니면 연기를 잘하기 때문이었는가. “내가 아는 한 주인공은 늘 데이비드 김이었고 그 역은 나 아니면 안 된다고 감독이 고집했다. 각본도 쓴 아니쉬는 글을 쓰면서 유색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유색인인 그는 백인들만 나오는 영화에 식상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아니쉬가 자기 가족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나로서도 아시안아메리칸 가족이 스크린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참으로 뜻깊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보통은 나 혼자만이 영화의 아시안인데 사랑으로 뭉친 일가가 아시안이라는 것은 정말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 컴퓨터로 인해 사람들 간에 접촉이 단절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컴퓨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맺어주는 일을 한다고 본다. 어렸을 때 학급에서 아시안이라곤 나 하나였는데 컴퓨터를 통해 나처럼 외톨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반면 컴퓨터로 두렵고 사악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다. 지금 미국은 컴퓨터를 이용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이런 모든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 감독은 영화의 아이디어를 구상한 이유 중 하나가 제작비가 저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촬영 때 실제 모든 것이 검소했는가. “그렇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태도나 의도는 대규모 예산의 영화와 다를 바 없었다. 조직이 잘되고 상호 간 존경하는 태도로 영화를 만든다면 큰 영화나 다를 것이 없다. 웹카메라로 찍었기 때문에 오히려 창조적인 연기를 할 수 있었다.”

- 아버지 역을 하는데 실제로 두 남매를 둔 것에서 영감이라도 얻었는지. “아들은 10세인데 벌써 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다행히 어머니와는 그렇지 않다. 벌써 10대의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데이비드 역에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내 아이들이 나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사실보다는 아직도 그들이 내게는 아기들이라는 점에서였다. 아직도 나의 어머니는 날 다섯 살짜리로 여기면서 영원히 보호하려고 한다. 부모란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그들이 우리 곁을 떠날 것을 준비해야 하면서도 막상 그들이 실제로 우리 곁을 떠나면 당황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아이러니다.”

- 어렸을 때 학교에서 외톨이로 고독을 느꼈다고 말했는데 교육과 배움이 새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잘 모르겠지만 그때 내게 큰 위안이 된 것은 미술과 책이었다. 난 특히 잉갈스 가족의 얘기인 ‘초원의 작은 집’을 좋아해 아이들에게도 읽어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온 내 가족도 잉갈스네처럼 개척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술은 그림으로써 사람들과 연결을 해주기 때문에 고독을 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컴퓨터로 사람들과 쉽게 연결이 된다. 그것이 위험한 것은 그 사람이 진짜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것이 연기에 어떤 영향이라도 미치는지. “책을 많이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로 인해 각본의 뉘앙스와 분위기도 잘 파악할 수 있다. 연기하기 전에 난 늘 혼자서 각본을 읽으면서 준비를 한다. 문을 닫고 전화도 끄고 중단 없이 각본을 읽으면서 내용을 머리로 그리며 그 속으로 깊이 빠져들려고 노력한다.”

- 어떻게 작품을 고르는가. “나의 흥미를 끌면서 정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는 최선을 다하려고 애쓴다.”

- 데이비드는 딸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알고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데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딸의 실종보다도 더 비극적인 사실이다. 영화에서 심리적인 비극은 과연 딸이 누구냐 하는 사실이다. 나도 그 점에 깊이 연관되었다. 실제로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내가 잘 알던 사람 하나가 마약중독자였는데 그가 내게 보여준 자신의 모습이란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말짱 허위였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었다.”

- 아버지로서 기술적인 컴퓨터 용어를 얼마나 잘 아는가. 아이들의 언어와도 같은데. “그 부분에서는 아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어렸을 때는 내가 집의 케이블박스 전문이었다. 부모 대신 내가 VCR 담당이었다. 그러다 나는 집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가지게 됐다. 그러더니 이젠 내 아들이 날 삽시간에 추월하고 있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아이에게 뒤처져 있을 것이다. 아들이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다소 걱정이 된다. 내가 아들의 것을 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결코 아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컴퓨터 용어는 언어일 뿐이고 사랑이나 돌봄은 아니다. 따라서 아이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선 그들의 컴퓨터 능력을 따라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보살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자신을 값어치 있게 느끼게 되면 컴퓨터를 통해 낯선 사람을 만나도 그를 자신 있게 대할 수 있다고 본다.”

- 제작자인 티무르 베캄베토브와의 관계는 어땠는가. “영화 후반에 만났다. 그가 맨 처음 영화의 아이디어를 구상한 것으로 안다. 그가 요즘 온라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영화로 만들자고 말을 꺼낸 것으로 안다. 그는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이런 얘기를 극화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사는 지구인으로서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극화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 영화가 매우 즉흥적이면서 극사실적이다. 각본대로 했는가 아니면 즉흥적인 면이 많은가. “처음에 컴퓨터를 통해 보여준 우리 가족의 과거와 면모가 가장 즉흥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각본을 충실히 따랐다. 영화는 만화영화를 찍는 것처럼 만들었다. 처음에 장면 스케치를 대강 보여줬고 이어서 배우들을 찍어 그 안에 집어넣는 식이었다. 그리고 1년 후에 가서야 진짜로 그림을 완성하는 방법을 썼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