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호장룡’에서 날렵한 솜씨로 칼을 휘두르고 쿵푸 실력을 과시하고, 007 시리즈 ‘투모로 네버 다이즈’에서도 액션 솜씨를 자랑하던 말레이시아 태생의 중국계 베테랑 여배우 량쯔충(楊紫瓊·양자경·56)과의 인터뷰가 최근에 있었다. 미국에서 미셀 여로 불리는 그는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또 깊이가 있고 매우 지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는데 질문에 제스처를 써가며 기운차게 대답했다. 인터뷰 후 사진을 찍을 때 필자가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하자 량쯔충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깍듯이 숙여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는 아시안 감독이 연출하고 아시안 배우들이 나오는 코미디드라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에서 자기 아들과 출신과 계급이 다른 아들의 애인을 못마땅해 하는 중국계 싱가포르인 재벌의 아내 엘리노어로 나와 차분하고 품위 있는 연기를 한다. 이 영화의 원작은 케빈 콴의 동명소설.

- 영화에서 아시안들은 다른 미국 영화에서처럼 틀에 박힌 모습이 아니고 개성이 뚜렷하게 묘사됐는데. “존 추 감독이 아시안에 대한 고정관념을 야구방망이로 날려버렸다. 그럴 때가 왔다고 본다. 미국계 아시안을 포함해 자신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시안은 이제 아시안 배우들이 주연하는 요즘 얘기를 통해 전통을 널리 알려야 할 책무가 있다. 이 영화가 앞으로 그런 작품들이 더 나오게 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 영화에서 의상이 매우 화려하다. 당신이 치장한 보석 장신구들은 본인의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 엘리노어는 우아하고 빼어난 패션 감각을 지닌 여자로 늘 단정하게 차려입고 치장을 한다. 그는 완벽한 어머니일 뿐 아니라 아내이기도 하다. 아시안은 얼굴 치장을 중요시하는 데다가 엘리노어는 중요한 가족을 가진 재벌 부인이어서 누가 봐도 그런 배경에 맞는 옷을 입어야 했다. 그래서 우린 옷을 고를 때 아르마니 등 최고의 브랜드만 골랐다. 보석도 마찬가지다. 전부 진짜로 내 것에다가 진짜 보석상들이 가져온 장신구들을 썼다. 그래서 영화 세트장을 경호원들이 지켰다.”

- 아시안 부자들과 다른 나라 부자들의 돈 쓰는 방법이 다르다고 보는가.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어떤 신흥부자들은 부를 과시하면 특대를 받을 줄 알고 뽐을 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더군다나 요즘은 범죄가 많아 사람들이 조심을 한다. 지나치게 부를 자랑했다간 화를 당하기 십상이다. 요즘에 진짜 중요한 것은 물질적 부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부다.”

- 영화에서 마작을 하는데 마작이 지닌 매력은 무엇인가. “마작은 포커와 비슷하다. 홍콩에 살 때 마작을 많이 했다.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요 ‘척하는 것’이다. 마작은 머리를 굴려야 해 두뇌활동에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상대와의 힘의 대결이기도 하다.”

- 왜 이 역을 맡았는가. “책을 읽고 온 세상에 아시아 여러 나라에 사는 중국 가족의 전통과 유래를 널리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이란 무엇인가도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엘리노어가 매우 강한 여자라는 점이 좋았다. 어머니의 힘이란 중국 가족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 당신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는가. “내 어머니는 유유자적 스타일이었다. 재미있는 분이었다. 아버지가 더 엄격했다. 어머니는 내가 배우라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다른 중국 가족처럼 내가 의사나 회계사 그리고 변호사나 교사가 되라고 독촉하지 않았다.”

- ‘레이디’에서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역을 맡았었는데, 여사가 연금상태에서 풀려나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족 탄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미얀마에서 정치와 군의 관계란 매우 복잡하다. 수치 여사가 풀려나 권력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은 그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하고 있다. 혁신적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희망이나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미얀마 사람들은 자신들을 미얀마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로힝야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마법의 봉은 없다. 로힝야족에 대한 만행에 대해 수치가 더 강력한 발언을 해주길 원하긴 하지만 그가 만약에 군부와 절연을 한다면 수치와 당의 앞날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너무 빨리 수치를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간이 필요하다.”

- 수치 여사와 아직도 교류하는가. “우린 함께 교육과 조각과 공예 및 도로안전 등 여러 문제에서 협력하고 있다. 미얀마 수도인 네피도 외곽에 예술인촌을 만들어 재능 있는 사람들을 훈련해 자립자족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 이제 56세인데 나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단지 숫자일 뿐이다. 머리와 가슴에 있는 것을 느끼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할 일과 가볼 곳이 너무 많아 마음이 급하다. 때론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 지금은 국제적 배우이지만 과거엔 아시안 배우로서 역을 얻기가 힘들지 않았나. “내가 ‘투모로 네버 다이즈’의 역을 얻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 영화에 나오면 앞으로 배역이 많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뒤로 주어지는 역이란 전부 틀에 박힌 아시안 역이었다. 그래서 난 다 거절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출연한 것이 ‘와호장룡’이다. 난 아이도 없고 부모가 부유해 돈 걱정 안 해도 됐지만 그렇지 않은 젊은 신인들은 경우가 다르다. 내가 한 가지 배운 것은 가만히 앉아 역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나가서 스스로 찾으라는 것이다. ‘레이디’가 바로 그런 영화다. 이젠 모든 색깔의 아시안 배우들이 함께 나와 색의 조화를 추구해야 할 때라고 본다.”

- 틀에 박힌 아시안 역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차이나타운의 웨이트리스나 중국 식당이 있기 때문에 중국 배우를 쓰는 것, 중국 갱 같은 케케묵은 역들이다.”

- 돈이란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돈이 우리를 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젊었을 때만 해도 물질적인 것이 매우 중요했다. 이제 나이를 먹으면서 드는 생각은 내게 있어 돈의 중요한 역할은 돈을 써서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갈 수가 있다는 정도이다.”

- 어디를 그렇게 가고 싶은가. “파타고니아와 남극, 그리고 아마존 등 남미를 샅샅이 다니고 싶다. 아시아 지역은 잘 안다. 유럽으로는 아이슬란드를 못 가봤다.”

- 배우로서 절정기와 침체기는 언제였나. “여전히 절정기가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침체기는 잊어버렸다. 슬픔 속에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잊었다. 단지 그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좋은 교훈을 배웠기를 희망한다.”

- 과거 결혼했을 때 연예 활동을 중단했는데 다시 결혼해도 그럴 것인가. “그땐 아내로서 가정을 이루려 했기에 활동을 중단한 것이다. 이혼 후 지난 14년간 동거해온 남자는 내 직업을 존중한다. 서로 보고 싶으면 누구 하나가 여행을 해서라도 함께 있으면 된다. 서로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고 또 서로를 존경한다면 일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관계란 서로가 서로를 도와줄 때 가능하다. 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는 한 그것을 결코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 무술영화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인가. “절대 아니다. 난 무술영화와 드라마에 골고루 나올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이다. ‘와호장룡’에 나온 것이 좋은 예다. 난 앞으로 개봉될 무술영화에서 마피아 보스로 나온다. 무술영화는 홍콩에서 가장 잘 만들지만, 한국 감독과 일본 감독들도 잘 만든다.”

- 이번 영화가 아시아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이 영화는 아름다운 데다가 가족과 사랑에 관한 얘기로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누가 만들었고 누가 나오는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어디서나 보면서 웃고 울고 할 것이다. 보고 나면 정말 재미있다고들 느끼고 흐뭇해할 것이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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