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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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물리학과 정성훈 교수의 연구실 내 책장에는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지난 1월 31일 서울대 자연과학대 56동 509호실.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지 아직 수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런가라고 생각했다. 책장 속의 영어로 된 물리학 책들 속에서 낯익은 한글 책이 보였다. ‘코스모스’. 미국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1980년에 쓴 책이다. 정성훈 교수는 “중학교 때 친구 집에서 ‘코스모스’를 보았다. 재밌게 읽었다. 이 책 때문에 물리학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정성훈 교수가 꺼내어 보여주는데, 학원사가 낸 1997년판이었다. 요즘 나오는 ‘코스모스’와는 출판사도 번역자도 달랐다.

그는 입자물리학자이다. ‘코스모스’를 읽으면 천문학자가 되었을 것 같았다. 그에게 물으니 “경남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2002년 포스텍에 진학했다. 포스텍에 천문학과가 없어서 물리학과로 갔다”며 웃음을 지었다. 경남 거창 출신.

정 교수는 입자물리현상론을 연구한다. 우주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아주 초기 우주의 모습이 어땠는지가 관심 분야다. 입자물리학자가 즐겨 사용하는 연구 도구는 입자가속기. 과거에는 미국 시카고 외곽의 페르미연구소가 운영하던 테바트론이 유명했고, 지금은 스위스 제네바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LHC(대형강입자충돌기)가 절대지존이다.

정성훈 교수는 가속기라는 실험장치 외에, 중력파(gravitational wave)라는 천문학의 새 연구 결과를 입자물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한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는 중력파를 상대성이론을 확립하고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의 특성을 이해하는 천문학 도구로 생각했다. 나는 이 중력파의 특성을 이용해, 입자물리학의 프런티어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3가지 중력파. 맨 위는 천체 간 충돌로 만들어진 중력파의 원형이다. 두 번째 파형은 첫 번째 파형이 거대한 암흑물질 천체 인근을 지나면서 휘어져, 첫 번째 파형보다 뒤늦게 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세 번째 파형은 LIGO가 검출한 것으로, 중력렌즈 효과로 휘어진 두 개의 파형이 서로 간섭효과를 일으킨 흔적이 뚜렷하다. 보강·상쇄효과로 중력파의 높이가 들쭉날쭉하다.
3가지 중력파. 맨 위는 천체 간 충돌로 만들어진 중력파의 원형이다. 두 번째 파형은 첫 번째 파형이 거대한 암흑물질 천체 인근을 지나면서 휘어져, 첫 번째 파형보다 뒤늦게 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세 번째 파형은 LIGO가 검출한 것으로, 중력렌즈 효과로 휘어진 두 개의 파형이 서로 간섭효과를 일으킨 흔적이 뚜렷하다. 보강·상쇄효과로 중력파의 높이가 들쭉날쭉하다.

아인슈타인의 예언

그에 따르면, 물리학은 자연을 관측함으로써 알아나가는 것인데, 초기 우주는 그 잔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실험실에서 재현하기도 힘들다. 이로 인해 초기 우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은 단서도 소중하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런 단서를 찾고자 한다. LHC는 더 높은 입자와 입자 간 충돌에너지로 초기 우주를 재현하고 있으나, 2012년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입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최근에 발견된 중력파는 초기 우주나 아주 먼 우주에서 발생하여 광활한 우주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 초기 우주 모습을 담고 우리에게 도달하기에 초기 우주를 볼 수 있는 소중한 ‘눈’이 될 수 있다. 정 교수는 “중력파로 초기 우주를 엿볼 수 있어 이를 갖고 입자현상론과 우주론 분야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개척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력파는 천체와 천체가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의 중력파 검출기 라이고(LIGO·Laser Interferometer Gravitational-Wave Observatory·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는 2015년 9월 14일 태양계에서 13억광년 떨어진 지점에서 블랙홀 두 개가 충돌하고 하나로 합쳐지면서 생겨난 중력파를 검출한 바 있다. 미국 워싱턴주의 핸포드와 루이지애나주의 리빙스턴에 있는 중력파 검출기가 각각 미세하게 독특한 패턴으로 흔들렸는데 이를 기다리고 있던 실험 물리학자의 손에 바로 포획되었다. 중력파 검출은 물리학사에서 큰 이벤트였고, LIGO를 기획한 물리학자 킵 손, 라이너 와이스, 배리 배리시는 201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중력파 소리

블랙홀과 블랙홀 충돌에서 발생한 중력파는 지축을 10-19m 정도 흔들었다. 이 진동은 지극히 약하다. 사람이 땅을 발로 쾅하고 디딜 때보다 작은 흔들림이라고 정 교수는 말했다. 그럼에도 LIGO의 물리학자가 검출기에 잡힌 신호를 즉각 알아본 건 중력파의 독특한 패턴 때문이다. 중력파는 영어로는 ‘chirping’이라고 한다. 한국어로 ‘짹짹거리기’라고 옮길 수 있다. 충돌 초기에는 세기가 약한 저주파인데 충돌이 진행되고 두 별의 회전속도가 빨라지면서 강한 고주파로 변한다. LIGO가 중력파를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은 1초에서 1분 정도이다. 충돌이 완성되는 마지막 짧은 순간의 소리다.

정성훈 교수는 LIGO가 듣는 중력파 소리를 흉내 내 들려주었다. “우~~윗” “우~~윗”.(LIGO 홈페이지에 중력파 소리가 올라와 있다. www.ligo.caltech.edu/video/ligo20160211v2) 나는 정 교수가 내는 소리에 감탄했다. 시공간의 출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인류가 들을 수 있다니. 중력파는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즉 가청주파수 대역이다.

정 교수는 중력파 검출이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옳았다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또 천문학적 측면에서는 가벼운 블랙홀을 처음 확인했다는 의미가 있다. LIGO가 최초로 확인한 중력파를 만들어낸 두 개의 블랙홀은 질량이 태양의 29배, 36배밖에 되지 않는다.

LIGO는 2015년 이후 지금까지 천체충돌로 발생한 중력파를 10번 관측했다. 그중 가장 최근에 관측한 게 중성자별과 중성자별 충돌에서 나온 중력파였다. 두 개의 중성자별이 만들어낸 중력파 관측은 처음이었다. 중성자별은 천체가 온통 중성자로 만들어졌다. 중성자별은 자연의 기괴함을 드러낸다. 지름은 수십㎞ 크기인데, 질량은 태양과 같다. 코끼리 5000만마리를 바느질 골무 한 개 크기 안에 몽땅 우그려 넣은 것으로 비유된다.

중성자별들의 충돌이 특별한 건, 여기서는 중력파 말고도 ‘빛’이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정성훈 교수는 “우주의 역사 관련 정보를 두 가지로부터 각각 얻을 수 있다”면서 “중력파로부터는 우주가 137억년 동안 어떤 팽창의 역사를 겪었는지를, 빛으로부터는 우주의 전체 팽창량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성훈 교수는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단장 이형목 한국천문연구원 원장)에 지난해 말 합류했다.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은 천문학자가 이끄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그룹 내에 천문학자가 많다. 입자물리학자인 정성훈 교수가 한국중력파그룹에 들어간 건 “천문학 분야에 입자물리학의 아이디어를 접목시켜 입자물리학에 새로운 연구 방향과 아이디어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정 교수는 연구실로 내가 찾아간 날 바로 전주에 3일간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 워크숍에 참여했다고 했다.

“중력파는 우주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다. 중력파를 입자물리학의 도구로 사용하면 암흑물질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암흑물질은 입자물리학자가 그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부심하고 있는 미지의 존재다. 또 다른 미스터리인 암흑에너지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으나, 암흑물질 연구의 사정은 그보다 좀 낫다. 입자물리학계는 암흑물질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암흑물질은 빛과 아주 약하게 상호작용을 하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정성훈 교수의 중력파 관련 연구는 크게 두 가지인데 이를 지난 2~3년 새에 수행했다. 중력파로 암흑물질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와, 중력파가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연구와 관련해 그는 암흑물질에 의한 ‘중력파 간섭무늬(gravitational-wave fringe)’라고 스스로 명명한 중력파의 특징에 주목한다. 정성훈 교수와 만난 날 그가 쓴 논문이 ‘피지컬 리뷰 레터(Physical Review Letter)’에 실렸다. 정 교수에 따르면 이 저널에 논문이 실리는 건 입자물리 이론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광이다. 정 교수 논문 출판 이후 아르스 테크니카와 같은 몇몇 대중 과학잡지가 정 교수의 중력파 간섭무늬를 소개하는 글을 게재했다.

중성자별 충돌 중력파로 알아낼 수 있는 것

정 교수가 인터뷰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 벽면의 칠판에 다가갔다. 중력파를 만들어내는 천체를 그리고, 다른 쪽에는 관측자(지구)가 있다고 표시했다. 중력파는 두 개의 블랙홀이 충돌하면서 생겨나 관측자를 향해서 온다. 중력파의 출발지와 지구의 관측자 사이에서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암흑별(dark star·암흑물질로 만들어진 별), 혹은 우주끈(cosmic string), 혹은 블랙홀일 수 있다. 우주끈은 우주가 처음 만들어지고 이후 식으며 ‘상(相·phase)전이’가 일어나는데 그 상전이의 잔재라고 했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되듯이 우주가 차가워지면서 생긴 독특한 구조물이라는 것.

이 암흑물질 후보들이 몰려 있어 질량이 어마어마하면 중력파는 지구를 향해 오다가 ‘중력렌즈’ 현상에 의해 휘게 된다. 질량은 시공간을 뒤트는데 이로 인해 이 시공간을 지나는 빛을 휘게 하고, 이때 나타나는 현상이 ‘중력렌즈’ 효과이다. 중력렌즈 효과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내놓았을 때 예상한 바 있다. 빛의 중력렌즈 효과는, 한 개의 빛으로 출발했는데, 멀리 떨어진 지구에서 보면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보이는 현상이다. 중력파의 경우 휘어지고 갈라지다 보니 지구 도달 시간에 차이가 난다. 두 개의 파가 시간 차를 두고 도달할 것이라는 게 정 교수의 ‘중력파 간섭무늬’ 착안점이다.

두 중력파는 시차를 두고 지구의 검출기에 도달하나, LIGO는 두 중력파가 중첩되어 하나가 된 파형만을 감지한다. “도착시간 차이는 0.0001~0.1초 정도이고, 이것이 복잡한 간섭무늬를 일으킨다. 중력파도 파형이기에 상호 보강하거나 상쇄하는 간섭현상을 일으킨다. 하나로 합쳐진 두 파형을 분리하면 중력파가 우주를 지나오면서 보았던 암흑물질의 존재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정성훈 교수의 중력파 관련 두 번째 연구는, 중력파가 어디에서 오는지 그 방향을 찾는 것이다. 이 연구는 2018년 1월에 논문으로 나왔다. 중력파가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알아야 암흑물질의 위치도, 중력파를 만들어내는 천체들의 위치도 알 수 있다. 이 연구는 그가 서울대 부임 전에 일했던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했다. 스탠퍼드의 뛰어난 입자현상론 연구가 피터 그래험(Peter W. Graham) 교수와 같이했다. 논문은 서울대로 옮겨온 뒤에 완성했다.

정 교수는 중력파의 근원을 찾는 작업은 지진의 진앙을 찾는 것이나 GPS 작동원리와 같다고 했다. 진앙은 지진파 세 개를 추적하면 알 수 있다. 정 교수의 아이디어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공전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약 1억5000만㎞이니, 공전 위치가 다른 지점들에서 중력파를 관측해 보자는 것이다. 이 결과를 조합하면 중력파가 검출기에 도착한 시간 차이와 파장 변화를 바탕으로, 중력파가 어디서 오는지 확인 가능하다. 지구상의 몇 곳에 서로 수천㎞ 떨어진 지점에서 지금은 중력파 검출기를 운용하고, 이들 간의 데이터만 비교하는데 이보다 정확도가 훨씬 더 올라간다.

이 실험이 가능해지려면 중력파 검출기가 검출해낼 수 있는 주파수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 LIGO는 현재 10~1000㎐(헤르츠) 주파수에서 검출 능력을 갖고 있으나 이보다 더 낮은 주파수, 즉 0.01~10㎐의 중력파도 검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청주파수대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보다 중력파를 검출할 수 있는 시간이 크게 확장된다.

차세대 저주파 중력파 검출기 개발

지금은 블랙홀 두 개가 1초에 10바퀴 이상 빠르게 서로 회전하는 시간대에서만 중력파를 들을 수 있다면, 차세대 저주파 중력파 검출기는 블랙홀들이 서로 한 바퀴 도는 데 100초가 걸릴 때부터, 즉 천천히 회전할 때부터 중력파를 검출할 수 있다. 충돌하는 두 별은 처음에는 서로 천천히 회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빨리 회전한다. 즉 저주파 검출기는 두 천체가 충돌해서 하나로 합쳐지기 한참 이전부터 중력파를 검출할 수 있는 것이다.

정 교수는 지구의 공전 위치가 다른 지점에서 검출한 중력파를 비교하려면 중력파를 지속해서 검출할 수 있는 기간이 몇 달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삼각측정법(Triangulation) 혹은 도플러 효과라고도 불리는 이런 간단한 물리학이 여러 기술적이고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중력파 위치 추적을 위한 수단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래서 0.01~10㎐대의 관측도 다른 주파수 영역보다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정 교수를 비롯한 몇몇 연구들을 계기로 이런 주파수대역의 관측도 힘을 받는 분위기다.

정성훈 교수는 차세대 저주파 중력파 검출기로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하고, 또 그 검출기 개발에 참여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이 원자광학을 이용해 개발한 ‘원자간섭기(atom interferometer)’가 그것이다. 원자간섭기는 서로 다른 에너지를 가진 두 개의 원자를 자유낙하(free fall)시킨다. 두 원자는 에너지 크기가 다르기에 낙하할 때 상대성이론에 의해 시간 차가 발생한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지구상의 중력가속도 값 g(9.8m/sec2)을 정확히 측정해낸다. 중력가속도를 정확히 느끼는 이 장치에 중력파가 지나가면 이 원자간섭기가 측정하는 중력가속도가 살짝 변한다. 지구 중력가속도의 10-22만큼 바뀐다. 10-22가 지금까지 관측된 가장 센 중력파의 세기 정도이며, 더 약한 것도 많다. 원자간섭기는 스탠퍼드대학이 개발해 미국 고에너지연구소인 페르미연구소에 설치 중이다. 기술 테스트를 위한 프로토 타입이다.

정 교수는 “입자물리학을 하기 위해 고체물리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접목해 상상력을 발휘해 보고 있다”며 웃음을 지었다.

정성훈 교수의 설명은 비교적 알아듣기 쉬웠다. 그는 흥이 나는 느낌으로 자신의 물리학 연구를 설명했다. “물리학 이야기를 하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나는 취재를 마치고 일어나기 전에 ‘물리학자로서 모르는 게 무엇인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물었다. 2시간 가까이 취재하고서 이런 질문을 다시 하는 건 엉뚱하기도 하고, 어리석을 수도 있었다. 그는 구체적인 특정 데이터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철학적일 수도 있다”면서 “자연은 왜 이리 복잡한가? 하나의 방정식으로부터 이렇게 복잡한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라고만 말했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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