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날씨를 즐기고 있는 런던 시민들. ⓒphoto 뉴시스
공원에서 날씨를 즐기고 있는 런던 시민들. ⓒphoto 뉴시스

평소에 한국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이다. 외국에 살기에 일부러 찾아보는 것도 귀찮고, 한번 보기 시작하면 밤을 새서라도 끝장을 보는 ‘드라마 폐인’이 되기 싫어서다. 그런데 오랜만에 한국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찾아서 봤다. 영국에서도 워낙 화제가 됐기에 얼마나 대단한 내용인가 궁금해서 봤다. 신분상승 또는 유지를 위한 한국 학부모들의 피 튀는 노력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정성을 막상 TV 화면에서 보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긴 영국에도 미국 아이비리그에 해당하는 ‘러셀 그룹’ 소속 명문대를 가기 위한 입시생 부모들의 노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스카이 캐슬’ 부모들의 노력에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이다. 영국에 사는 한국 교민 부모들도 다른 영국 부모들에 비하면 나름대로 극성을 떨긴 하지만 한국 부모들에 비하면 정말 손을 놓고 있다시피 한다. 한국과 같은 지옥을 겪지 않고 대학을 간 우리 아이들이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이 깃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생의 70%가 대학을 가는 한국과 달리 졸업생의 30%가 대학을 가도 유사 이래 최고의 비율이라고 시끌벅적한 영국의 부모가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너무나 대비되는 영국의 현실이 떠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정말 한국에서는 학벌과 신분이 모든 걸 다 걸 만큼 그렇게 중요한 걸까 하는 의문과 함께.

고교 졸업생 70%가 대학 안 가는 이유

단순한 질문과 함께 영국의 현실을 살펴보자.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의 70%는 왜 대학을 가려 하지 않을까? 영국인은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나 의지가 전혀 없나? 여기에 대한 답은 물론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가장 간단하게 대답한다면 ‘욕구나 의지가 없다’가 정답이다. 적어도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가지 않는 70%의 학생들은 신분상승의 욕구가 없다는 말이다. 상당히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영국은 누가 뭐래도 계급사회이다. 영국인이 다른 영국인을 만나면 5분 내로 상대방의 계급을 가늠할 정도이다. 굳이 신상 파악을 하지 않더라도 말과 태도, 복장 같은 외형적인 요소만 봐도 금방 알아챈다.

그렇다고 그 계급 때문에 상대방을 자신보다 높다, 낮다 하는 일차원적인 언행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계급은 예로부터 노력한다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닌, 타고난 것이었다. 지식이나 재산의 유무가 신분을 결정 짓는 요소도 아니었다. 신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고 그 신분을 벗어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봉건제도가 사라진 지 수백 년 된 지금도 그건 결코 변하지 않았다. 한국처럼 족보를 돈 주고 산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영국인들은 자신의 계급에 만족하고 다른 계급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거기다가 신분 구분 요소도 한국과는 다르다. 역사적으로 영국은 한국과는 달리 지식이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필수불가결의 절대 조건이 아니었다. 해서 고급 학벌에 대한 사회적인 욕구가 한국에 비해 훨씬 낮았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 귀족들은 지식인이 아니다. 그나마 근대사회로 들어와 중산층이 형성된 이후에야 지식습득의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부모 덕에 ‘은수저(영국에서는 그냥 ‘silver spoon’이라고 한다)’를 물고 태어나거나 ‘피 색깔이 푸른(blue blood, 즉 귀족이나 왕족)’ 계급은 여전히 명문대학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건 자수성가하는 중산층 출신의 의사, 회계사, 기업 중역, 고급공무원 집안에서나 하는 일로 치부되었다.

사실 명문대 코스도 아무나 밟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재력이 뒷받침되는 전문직업인의 자식만이 명문 사립학교에 갈 수 있다. 대학 교수는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영국의 어떤 대학 교수 월급으로도 일 년 학비가 거의 4000만원에 해당하는 사립학교를 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식인에 대한 영국의 사회적 존경은 약하다. 그리고 위에서 든 전문직업인들은 그냥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자 수준의 지식만 있으면 된다. 조선시대 관아 아전의 지적 수준이 양반을 뺨칠 정도이지만 신분은 중인에 불과한 것과 비슷하다. 결국 이 말은 영국은 결코 가방 끈이 길다고 존경받거나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아니라는 얘기다. 30%의 대학 진학생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중 20% 이상이 명문대학과는 거리가 먼, 그냥 취직을 위한 직업학교를 다닌다고 보면 된다.

영국에서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진학 연령층의 5% 정도만 대학에 갔다. 대학생 비율을 올리려고 영국 정부가 1998년까지 학비를 받지 않는 정책을 취했음에도 대학생 숫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 차라리 일 년에 1만파운드(1500만원) 가까운 학비를 받기 시작한 요즘에 들어서야 그나마 30%대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에 진학한다. 그만큼 영국도 취업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동안 영국 젊은이들이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이유는, 굳이 어려운 공부해서 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좋은 직장을 얻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대학 출신’이라고 더 우대해주는 ‘학력 편견’이 없는 점도 대학 진학을 굳이 하지 않는 이유였다. 영국 사회에서는 오히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전문가가 대학 출신을 부리는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지난해 5월 19일 열린 해리 왕자의 결혼식에 몰린 영국인들. ⓒphoto 뉴시스
지난해 5월 19일 열린 해리 왕자의 결혼식에 몰린 영국인들. ⓒphoto 뉴시스

계급은 있어도 계급 간 갈등은 없다

영국인 사이에서 자신들을 가르는 계급이 있어도 계급 사이에 긴장이나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류층이 다른 계급보다 스스로 더 우월하다고, 하류층 노동계급 스스로 다른 계급에 비해 더 열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도 없고, 신분이동을 꾀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 간에 위화감도 없다. 중세의 신분제도 아래서는 계급 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영국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에 맞는 삶을 불만 없이 살아왔다. 보통 영국인의 이런 삶의 자세를 국외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어서 하는 ‘포기체념’ 혹은 ‘선택체념’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자신도 체념한지 모르는 태생적인 체념이기에 ‘절대체념’이라고 말해야 옳다. 포기라는 말은 자신의 의지가 들어가 있는 능동적인 개념인 데 비해 영국인 의식 속에는 신분상승 의도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원하다가 이루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낀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루지 못한 걸 알면 자신을 학대한다. 그리고는 성취한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미워한다. 반면 자신의 능력 내에서만 살아가면 고통이 없다. 영국인들도 예로부터 자신의 신분과 현실에 만족하면서 살아왔고 신분상승의 욕구가 없기에 편안하고 평온해 보인다. 영국인들을 옆에서 지켜보면 조바심을 내지 않고, 안달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도 없는 듯하다. 현실 개선이나 보다 나은 장래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무뇌충’ 같기도 하다. 그에 비해 한국인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뭔가 발전이 있다고 믿는다. 해서 자기 능력보다 훨씬 큰 목표를 잡고 자신을 혹사하고 안달한다. 결국 사회 상층을 점할 수 있는 비율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학 출신인 70%의 젊은이들 모두가 지금보다 더 나은, 그러나 자신의 능력 밖의 신분을 위해 수년을 허송세월하는 일이 벌어진다.

‘너의 자리를 알아라’

영국인들이 잘 쓰는 말 중에 ‘You know your place’라는 관용어가 있다. ‘너의 자리를 알아라’라고 직역할 수 있지만 원래는 ‘너의 신분을 알아라’ ‘너의 주제를 알아라’ ‘주제넘지 마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너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 능력 밖의 일을 넘보지 말고 살라는 뜻이다. 이렇게 영국인은 자신의 능력 안에서만 뭔가를 얻으려 하고 자신의 것 내에서만 즐기려 한다. 영국 사회에는 신분이동, 신분상승, 신분세탁의 욕구가 없어 사회적으로 침체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한국과 달리 그런 요인으로 인한 사회불안이나 갈등 요인도 없다.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능력하에서 단조롭고 편안하게 사는 보통 영국인의 삶’을 ‘애써 무심하기’ ‘우아하게 가난하기’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살기’ ‘소소한 행복 찾기’ 등으로 정의해보자. 우선 ‘애써 무심하기’부터 보자. 아일랜드 출신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진지함의 중요성)’에서 영국인의 특성을 너무나 잘 풍자해 놓았다. 소설 제목과는 달리 영국인의 삶의 자세는 ‘Importance of Not Being Earnest(진지하지 않기의 중요성)’이 더 적합하다. 그걸 알고 오스카 와일드는 모든 걸 비비 꼬는 성격답게 제목도 비틀어서 지었다. 영국인은 아무때나 진지해지고 심각해지는 인간형을 가장 싫어한다. 일상에서는 진지하지 않고 젠체하지 않고 적당한 유머와 재치와 풍자 속에서 진심을 전해야 멋쟁이라고 여긴다. 해서 영국인의 코미디는 토박이 영국인이 아니면 정말 알아듣기 어렵다. 심지어는 같은 종족인 미국인도 이해가 쉽지 않아 영국 드라마가 미국으로 갈 때는 내용과 대사를 바꿀 정도다.

‘애써 무심하기’는 바로 그런 인생 철학에서 나온 삶의 태도이다. 불만이 있어도, 인생이 고달파도 밖으로 나타내지 않고 누구한테 하소연하지도 않는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라는 식으로 애써 무심하게 살아간다. 영국인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Stiff Upper lip’이라는 너무나 유명한 말이 있다. ‘잘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또 ‘Keep Calm and Carry On’이라는 말도 있다.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 각종 기념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호들갑 떨지 말고 하던 일이나 계속하라’는 뜻이다. 2차대전 중 영국 국민을 훈계하기 위해 영국 정부에서 만든 포스터 문구이기도 하다.

이렇게 영국인은 무슨 일이든 호들갑을 떨지 않아야 영국인답다고 믿는다. 해서 영국 중산층 정원도 언뜻 보면 잡초밭 같다. 화초 종류도 중구난방이라 높낮이도 맞지 않고 색깔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전혀 정원을 가꾸는 이의 의도가 들어가지 않은 듯하다. 아주 오랫동안 손을 안 본 폐허의 정원 같다. 굳이 뭔가 내세우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절제하며 자연스럽게 사는 삶의 태도와 닮았다. 각이 딱딱 맞는 기하학적인 프랑스 정원이나, 구석구석 인공의 손이 간 일본 정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아하게 가난하게 사는 삶

그 다음 ‘우아하게 가난하게 사는 삶’을 보자. 영국인 연 평균임금은 3만파운드(4500만원) 정도이다. 그런데 영국 물가는 한국 평균 물가의 두 배이니 영국인들의 삶은 결코 여유롭지 못하다. 거기다가 영국 소득세율은 20%가 기본이다. 건강보험료 등 각종 세금을 제하고 나면 평균 봉급자 한 달 실질소득은 1500파운드(225만원)에 불과하다. 부부가 번다고 해도 500만원이 채 안 된다. 영국 물가에서 이 월급으로는 정말 외식 한 번 하기 힘들다. 이 돈으로 주택 융자금 내고, 휴가 갈 돈 모으고, 자동차도 유지해야 한다. 영국에 중고물품 가게가 많은 이유는 결코 영국인이 검소해서가 아니다. 궁여지책으로 서로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영국인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산다. 영국인의 핏속에 들어 있는 듯한 봉사와 희생 정신은 오랜 종교국가 국민다운 모습이다. 결코 여유로워서 주변을 돕는 것이 아니다. 그냥 봉사와 희생을 통해 자신의 존엄을 확인하는 것이다. 비록 부자는 아니더라도 주위를 도울 수 있는 힘은 있다는 자존심 같은 것 말이다. 결국 가난해도 우아하게 살아가면 삶이 비루하지 않다는 철학이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자신들이 결코 궁색하고 비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다음은 ‘당당하게 살기’다. 영국인들은 주위의 잘사는 사람들이나 출세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도 쫄지 않고 움츠러들지도 않고 할 말은 다 하고 당당하다. 사람이 권력이나 부를 가진 사람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해지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정당하지 않은 뭔가를 얻으려 하거나 부당하게 노리는 것이 있어서이다. 그들로부터 얻거나 노릴 게 없다면 비굴해 질 이유도, 당당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더욱이 영국의 권력자는 정당하지 않게 뭔가를 누군가에게 줄 힘도 없다. 영국의 부자들도 사회구조상 갑질을 할 수가 없다. 영국 노동계급도 누구에게 무작정 당하고 살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두고 만들어진 국민 권익 보호 제도가 잘 구비돼 있기 때문이다. 영국 공무원들을 대해 보면 무책임하고 근무에 태만할지언정 권한 남용을 하지는 않는다. 영국인은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한도 내에서 살아가려고 하고,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누군가에 의해 부당한 강요를 당하면 강렬하게 반응한다. 부당한 일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영국인들은 이렇다 할 한(恨)도 없고 누구에게나 당당하다.

‘우리 모두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소소한 행복 찾기’를 볼 차례다. 영국인들은 부자를 부러워하기는 해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부가 정당하게 이룬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잘살려면 뭔가를 희생하고 살아야 그런 삶을 얻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돈을 더 벌거나 지위가 올라가면 그만큼 개인 시간이나 가정생활을 희생해야 하는 줄 안다. 해서 영국인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일만 한다. 보통의 영국 평민들은 진급이나 출세에 대한 욕망도 없다. 일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는 편이다. 영국인에게 일은 일일 뿐이다. 일에서 보람을 느끼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지만, 근무 중 지겨운 일을 하더라도 직장동료들과의 친분이라는 재미가 있다. 더욱이 일과 후에는 ‘삶이 있는 저녁’이 있어 인생이 힘들지 않다. 영국인들은 ‘인생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내 삶의 가치는 우주보다 더 무겁기는 해도 우리 모두가 다 대단한 존재는 아니다’라고 믿는다. 자신이 하나의 부속임을 자각하고 일상에 별로 불만을 갖지 않는 자세다. 일 년 중 한 달을 가족들과 휴가 가는 재미로 살고, 다녀와서는 가족들과 나누는 추억과 다음 휴가를 위한 준비로 일상을 견딘다. 그리고는 그 적은 수입으로도 평생을 가는 ‘심각한’ 취미 정도는 하나씩 갖고 산다. 주말이면 정원 가꾸고, 집 고치고, 차 손보면서 소소하게 살아간다. 소위 말하는 ‘소확행’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영국인들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다. 그들에게는 없는 것 투성이다. 신분상승의 욕구도,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성취욕도, 장래에 대한 불안도 없다. ‘맥 놓고 있으면 세상이 나만 놔두고 달려가는 것 아니냐’는 조바심도 없다. 명문대를 나오고 능력이 정말 뛰어나고 집안도 좋고 대인관계도 원만한데 단순 직업에 만족하면서 ‘9시 출근 6시 퇴근’의 삶을 무심한 듯 살아가는 영국인들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주행거리가 20만㎞도 넘는 고물차로 아이 통학시키고, 무료로 학교 운영위원 일 보면서 동네의 정당활동이나 자선단체 활동까지 하면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다. 평범하게 몸 낮추고 단란하게 살아가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이런 영국인은 우리와는 분명 다른 인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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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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