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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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19대 국회에 입성했던 이자스민 전 의원이 털어놓은 이야기다.

“제 아들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살면서 군대도 다녀왔습니다. 20년 넘게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생겨난 ‘다문화’라는 말이 저를 다른 사람과 구분 짓게 만들었습니다.’ 읽고 나서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들은 다른 모든 한국 사람이 그렇듯이 자신을 ‘그냥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문화라는 말이 생기면서 아들은 그냥 한국인이 아니라 ‘다문화인’이 됐습니다. 여러 이주자를 포용하자는 의미에서 생겨난 다문화라는 단어가 오히려 이주자를 구별 짓기 해버린 것입니다.”

‘다문화’는 영어단어 ‘multicutural’을 번역한 단어다. 하나의 국가나 민족은 하나의 문화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하던 단문화주의(monoculturalism)에 대비돼 나온 말이다. 다민족·다언어 국가에서는 종종 다문화주의를 아예 헌법으로 명시하기도 한다. 1950년 제정된 인도 헌법이 그렇고, 1971년 제정된 캐나다 헌법이 그렇다. 인도 헌법을 보면 다문화주의는 마땅히 법률상으로 명시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문화주의란 소수민의 언어, 음악, 축제 같은 문화적 전통을 정부가 지원하고 존중해주는 것을 말한다. 국가 내의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다문화주의는 마치 ‘진리’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초반부터 ‘다문화’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국내 거주 외국인 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19.9%로 OECD 가입국의 평균(5.9%)보다 세 배나 높았다. 체류 외국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소수자로서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이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자는 주장, 언어와 문화가 달라 적응하기 어려운 이주민에게 도움을 주자는 주장 등이 얽히면서 다문화는 지켜져야 하고 추구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되짚어보면 한국 사회의 다문화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올해 여성가족부와 교육부에서 집행 예정인 다문화 관련 예산 규모는 678억원이 넘는다. IOM이민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집행한 다문화 관련 예산만 1771억원이 넘었다. 곳곳에서 다문화와 관련해 쓰이는 예산과 각종 사업 규모는 매년 헤아리기도 어렵다. 대개의 다문화 정책은 크게 두 갈래, 즉 다문화가정이나 이주민을 지원해주는 복지정책과 국민의 다문화 수용성을 높이는 교육정책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그만큼의 효과를 얻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성가족부가 2015년에 실시한 ‘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 보고서를 보면 ‘외국인 근로자가 늘어나면 경제적 기여보다 손실이 크다’는 문장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33.1%나 됐다. 외국인 근로자가 많아지면 범죄율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46.7%, 거의 절반에 달한다.

외국과 비교해봐도 한국의 다문화 수용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서 일자리 문제로 이주해온 외국인을 이웃으로 두고 싶다고 대답한 한국인은 68.2%였다. 이주민이 많은 미국에서 86.3%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한 것과는 큰 차이가 난다. 다른 인종을 이웃으로 삼고 싶다는 사람의 비중은 국제적으로도 한참 적은 편이다. 한국에서는 74.3%의 사람이 긍정적으로 봤는데 이는 터키를 제외한 조사대상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치다. 이주민에게 배타적으로 알려진 일본마저도 한국보다는 다른 인종의 이웃에 수용적이다.

왜 모두가 목표로 삼고 추구하는 ‘다문화’는 쳇바퀴 돌듯 실패하고 있는 것일까. 이화다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장한업 이화여대 불어교육학과 교수는 ‘다문화’라는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단일민족이라는 환상

“외국에서 ‘multicultural’이 쓰이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실제로 그 사회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인정하지 않던 선입견을 깨자는 데서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지금 다문화를 ‘추구’하고 ‘목표’로 삼고 있죠. 그렇다면 원래 한국은 단일문화였나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단일민족’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 일이다. 단일민족이라는 단어는 1933년 일제강점기에 이광수가 쓴 논문 ‘조선민족론’에서 처음 등장한다. ‘조선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라는 문장에서다.

한반도에 세워진 국가가 단일민족으로 이뤄졌다는 ‘신화’는 일제강점기에는 국권을 되찾기 위해, 광복 이후에는 통일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좀처럼 깨지지 않는 논리로 사용됐다. 불과 100년 사이에 마치 진실인 것처럼 자리 잡았다.

“한국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가 아닙니다.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성씨(姓氏)입니다. 한국의 성씨는 300개가 안 되고 본관은 4000개가 넘는데 그중 완전 토착 한국인 성씨보다 외국인이 귀화하며 만들어진 성씨가 1.5배나 많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입증됩니다. 유적지 인골의 DNA를 조사해보면 현대 영국인이나 북유럽인, 남태평양 토착민에게서 나오는 유전형질이 다량 검출됩니다. 실제로 한국인에게는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알 수 없는 다양한 민족의 유전형질이 고루 섞여 있습니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에서 유래된 게 아닙니다.”

당장 현대 한국 사회를 살펴보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순도 100% ‘고유한 전통의 것’은 사라진 지 오래다. 2019년의 한국에는 일본과 미국의 문화가 고루 섞여 있다. 애초에 단일문화라고 할 수 없는 사회이지만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고 200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외국 국적의 이주민이 증가하는 것을 두고 ‘다문화’ 사회로 진행한다고 생각했고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당했다.

“‘다문화’ 사회에서 다문화 교육은 적응훈련의 일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다문화 교육이 다른 사회의 언어와 풍습, 문화를 배우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한 번씩 체험을 해보게 하죠. 이주민에게는 한복을 입히고 제사상을 차리게 하고 한국인에게는 이주민의 언어를 배우게 하는 것들요.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문화 낯설게 보기

한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다. DNA 차원에서든 문화 요소를 따져보든 한국 사회가 단일문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다문화 사회에서 다시 ‘다문화’를 얘기하다 보면 자연히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임선일 경기교육연구원 연구위원은 다문화주의가 가져오는 몇 가지 부작용을 지적했다. 임 연구위원에 따르면 다문화는 모든 문화를 존중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지배집단이 앞장서 다문화주의를 이끌 때에는 개인의 자율성이 무시되곤 한다. 이자스민 전 의원의 아들이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문화인’으로 분류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수자로 분류된 것과 마찬가지다.

더구나 한국식의 ‘다문화’는 모든 문화를 존중하라는 기존의 다문화주의와는 또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소수자에게 배려와 시혜를 베푸는 것이 다문화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문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개 떠오르는 이미지란 이주민의 빈곤한 삶, 적응하기 어려운 현실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다.

20~30대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반다문화’ 경향은 다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에 반발해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왜 다문화가 필요한지, 왜 모든 문화를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그런 와중에 ‘다문화’는 이미 충분히 다양한 사회에 혼란을 끼얹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반다문화에 대해 연구해온 강진구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는 “젊은 세대에게 다문화는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적 문제를 일방적으로 떠넘기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적·사회적 문제로 이주민 인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이해하라’고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제는 의미도 모호한 한국식 ‘다문화’가 아니라 ‘상호문화(intercultural)’가 필요한 때라는 주장이 나온다. 상호문화란 문화집단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다문화주의가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를 모두 존중하자는 주의라면 상호문화주의는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먼저 논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하되 보편적 가치를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장한업 교수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 문화권의 명예살인 같은 것은 여성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서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상호문화주의에서는 그런 문화가 왜 존재하는지를 배우면서 동시에 그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결국 상호문화주의에서는 상대방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문화주의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마저도 무작정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함으로써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일이 있다. 자기 문화를 ‘낯설게 보기’이다. 장한업 교수는 “내 문화를 비판적으로 보게 될 때 다른 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쌀국수’와 ‘스파게티’의 차이

‘혼혈’이라는 말은 많은 전문가들이 ‘낯설게 바라보기’를 해야 할 말로 꼽는 단어다. 차별적인 언어에 대해 연구해온 이정복 대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혼혈’은 ‘순혈’에 대비되는 말이라는 점을 짚었다. ‘순혈’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그러나 혼혈과 대비되면서 저절로 순혈은 긍정적인 것, 혼혈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혼혈이 무조건 긍정적인 의미로 작용할 때도 있다. ‘혼혈아는 다 예쁘다’는 인식이 그렇다. 이 역시 지양해야 하는 말이다. 모든 ‘혼혈’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더러 ‘혼혈아’가 아닌 한국인도 드물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장한업 교수의 말처럼 “한국인은 이미 다양한 핏줄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을 이해한다면 저절로 혼혈이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될 것이다. 필리핀계 한국인, 프랑스계 한국인 같은 외국계 한국인에 대한 거리감도 줄어들 수 있다. 순혈인 ‘우리’와 다른 혼혈이 아니라 같은 ‘한국인’이다.

때때로 온라인에서는 ‘프로불편러’라는 신조어가 쓰일 때도 있다. ‘프로불편러’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일일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상호문화주의에서는 평소에 쓰던 언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즐겨한다.

“차이는 어느 사회에서든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리핀계 한국인과 조부모부터 한국에 살았던 한국인은 생김새가 달라요. 그러나 이것이 차별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쓰고 있던 언어, 언어가 만들어내는 사고방식, 사고방식이 이끌어내는 행동을 되짚어봐야 합니다.”

장한업 교수가 자주 드는 예시 중 하나는 베트남 쌀국수와 스파게티다. 둘 다 똑같이 다른 문화의 면 요리라는 점에서 한국인에게는 낯선 음식이다. 그런데 베트남의 포(pho)는 한국식으로 ‘쌀국수’라고 번역해 쓰는 반면, 이탈리아의 ‘밀국수’는 스파게티라는 원어를 그대로 쓴다.

“음식만 받아들여서 쌀국수라고 할 수도 있고 언어까지 받아들여 스파게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상대방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언어는 임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로불편러’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한국인이 쓰는 차별적인 언어를 되짚어보는 일은 중요하다. 그간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지 깨닫고 비판적으로 고쳐나가는 과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은 한국이 이미 다문화 사회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만들어낸 언어다. 상호문화주의에서는 다문화가정 대신 이주배경가정이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 결혼이든 경제적 이유든 다른 국가에서 이주해왔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은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양한 이주배경가정이 존재하는 유럽에서는 이미 다문화주의 대신 상호문화주의를 채택한 지 오래다. 유럽연합의 유럽의회는 2008년에 ‘상호문화 대화 백서’를 발행하고 상호문화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독일에서도 예전에는 한국에서처럼 독일어를 가르치고 독일 문화를 익히게 하는 ‘다문화교육’이 이뤄졌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상호문화 교육으로 발전시켰다. 영국에서는 시민성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적 차이와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수는 2017년을 기준으로 218만명이 넘었다. 결혼이주자나 다른 이주배경가정에서 태어난 한국인 청소년은 10만명이 넘어서 전체 청소년 인구의 2%에 달하고 있다. 장한업 교수는 “이미 늦었다”고 말한다.

“헛바퀴를 10년 넘게 돌리는 사이에 이미 한국 사회는 그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개방적으로 변했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이주민이 한국을 찾을 것이고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하나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소극적이고 단순한 자세에서 나아가 이주민의 문화를 이해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올해부터는 서울시 교육청에서도 ‘다문화 교육’ 대신 ‘상호문화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지금껏 다문화 교육이 그때그때 제기됐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환부만 제거하는 수술 방식이었다면, 상호문화 교육이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함께 주목해야 할 때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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