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감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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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홍릉 고등과학원(KIAS)은 처음이다. 지난 3월 8일 물리학부 고병원 교수를 만나러 찾아갔다. 봄볕이 따뜻했다. 고병원 교수는 입자물리학(현상론) 이론가이다. 서울대 물리학과 1979학번인 시니어 연구자다. 그에게서 입자물리학의 전체 풍경에 관한 얘기를 듣기를 기대했다.

고병원 교수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보여줬다. 그는 “입자물리학은 고(高)에너지, 고(高)집속(intensity), 그리고 우주라는 세 개의 개척해야 할 최전선(frontier)을 갖고 있다”고 했다. ‘고에너지’ 분야는 입자가속기를 통한 연구를 말한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대형강입자충돌기(LHC)가 ‘고에너지’ 분야 연구의 최전선이다. ‘고집속’ 분야는 반응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작은 입자를 연구한다. 고 교수는 “(중성미자와 같은) 매우 드물게 검출되는 입자는 아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입자를 검출해낼 수 있다”고 했다. 일본 도쿄대 가미오칸데 실험이 ‘고집속’이라는 변경지대를 개척하는 대표적인 시설이다. 가미오칸데는 중성미자 검출 관련 연구에서는 세계 최고다. 노벨상이 이곳에서 2개가 나왔다.

입자물리학의 3가지 최전선

입자물리학이 개척해야 할 세 번째 분야는 ‘우주’ 최전선이다. ‘우주’는 천문학자, 천체물리학자가 연구하는 대상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입자물리학과 우주론은 20세기 후반에 이미 만났다. 천문학과 물리학의 경계가 이제는 뚜렷하지 않다. “초기 우주를 이해하려면 초기 우주의 입자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이 분야는 입자물리학, 천체물리, 우주론이 만나는 영역”이라고 고 교수는 설명했다.

고병원 교수에 따르면, 물리학에는 두 가지 표준모형이 있다.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과 우주론 표준모형이다. 입자물리학 표준모형은 우주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기술하고, 우주론 표준모형은 우주 시공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기술한다.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은 지난 세기에 완성됐다. 자연을 구성하는 물질과 힘을 설명한다. 12가지의 기본물질입자(6가지 쿼크와 6가지 경입자)와 4가지의 힘입자(광자, 글루온, W·Z 보존, 그리고 중력자), 그리고 힉스입자가 표준모형에는 들어가 있다.(중력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입자물리학자들은 표준모형을 완성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표준모형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이 많다. 고병원 교수가 든 사례는 다음과 같다. ‘중성미자가 질량을 왜 갖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주에 물질이 왜 반물질(antimatter)보다 많은지 모른다. 우주에 있는 걸로 추정되는 차가운 암흑물질의 정체를 규명하지 못했다. 우주가 시간이 지날수록 팽창속도가 늘어나는 원인으로 추정되는 암흑에너지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나하나가 21세기 입자물리학계가 설명해야 할 굵직굵직한 주제들이다.

물리학의 두 번째 표준모형인 우주론 표준모형, 그것의 이름은 ‘람다 차가운 암흑물질(ΛCDM)’ 모형이다.(ΛCDM의 Λ는 그리스문자 ‘람다’이다. 람다는 우주상수를 가리킨다. 우주상수는 우리 우주가 왜 시간이 지날수록 빨리 팽창하는지를 설명한다. 물리학자는 진공에너지, 즉 암흑에너지가 있어 그 힘으로 인해 우주가 현재 가속팽창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암흑에너지를 ‘우주상수’ 람다로 표현한다. ΛCDM의 ‘CDM’은 차가운 암흑물질(Cold Dark Matter)을 말한다. 암흑물질 역시 인류가 정체를 모르는 물질이며, 우주 전체 물질-에너지양의 27%를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고병원 교수는 “이 두 개의 표준모형을 기반으로 물리학은 새로운 프런티어를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입자물리학에서는 표준모형 너머 새로운 물리학의 단서인 새로운 입자를 찾아야 하고, 우주론에서는 새로운 관측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물리학에서는 처음에는 별 상관없어 보이던 두 개의 영역이 서로 통합되면서 큰 그림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며 우주론과 입자물리학에서의 연구가 쌓이고 만나면, 자연을 좀 더 이해하는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국 입자물리학계의 연구 동향에 대해 물었다. 그는 암흑물질 얘기를 맨 먼저 꺼냈다. “한국은 암흑물질을 많이 연구한다. 서울대에 계셨던 김진의 교수가 암흑물질 후보의 하나인 액시온 연구를 한 영향이 크다.” 고병원 교수 본인도 지난 10년 새 암흑물질 연구에 매진해왔다.

한국은 저에너지 가속기 분야 키워야

고 교수에 따르면, 1990년대 학계는 초대칭(Supersymmetry)이론을 많이 연구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초대칭이론에 입자물리학계가 매달렸다. 초대칭이론은 ‘표준모형’이 설명하지 못하는 물리현상 설명을 위해 도입된 모델이다. 초대칭이론은 초대칭입자를 예측했다. 그러나 초대칭입자가 지상 최대의 입자가속기인 LHC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고 교수는 “초대칭이론이 사그라들고 있다”고 말했다.

고병원 교수는 입자물리학의 또 하나 중요 분야인 QCD(Quantum Chromodynamics·양자색역학) 연구는 국내의 경우 고려대를 중심으로 많이 한다고 말했다. 고려대의 최준곤·이정일 교수 그리고 고려대에서 공부한 김철 서울과기대 교수가 QCD 연구자다. QCD는 강한 상호작용, 즉 강력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강력은 양성자나 중성자 안에 들어있는 쿼크와 쿼크 간에 글루온을 주고받으면서 생기는 힘이다. 쿼크는 기본물질입자이고, 글루온은 힘입자이다. 강력은 우주에 있는 네 가지 힘 중의 하나다. 인류는 네 가지 힘 중에서 전자기력을 가장 먼저 이해했고, 그 다음에 약력을, 그리고 강력을 이해했다. 또 다른 힘인 중력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양자 세계에서 작동하는 중력의 법칙, 즉 양자중력의 법칙을 인류는 찾아내지 못했다. 고병원 교수는 “QCD는 지금까지 발견된 이론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한다”라며 “쿼크와 글루온의 상호작용이 약할 때는 체계적인 근사를 통해 기술이 가능하다. 하지만 쿼크와 글루온의 상호작용이 강할 때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라고 말했다.

쿼크와 글루온의 강한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격자 게이지장론(Lattice gauge theory)이다. 1974년 케네스 G. 윌슨(198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 제창한 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왔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이 분야 연구자가 선진국에 비해서 매우 적다. 이원종 서울대 교수와 김세용 세종대 교수가 격자 QCD 연구자다. 끈이론(string theory)에서도 상호작용이 강한 게이지이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끈이론은 자연이 진동하는 아주 작은 끈으로 이뤄졌다고 본다. 국내에서도 일부 끈이론학자가 이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는 “실험과 이론이 경쟁하면서 입자물리학은 발전해왔다”면서 한국의 실험 시설이 부족함을 아쉬워했다. 과거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쉽다는 얘기였다. 그는 “미국 시카고 인근의 페르미연구소와 같은 시설이 한국에 만들어지면, 물리학 연구가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저에너지 가속기’ 시설 건립을 말했다. 저에너지 가속기는 입자물리학이 개척해야 할 3대 최전선 중 ‘고집속’ 영역에 속한다. ‘고에너지’ 영역에 속하는 고에너지 가속기는 미국과 유럽, 일본이 잘하고 있어 한국이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다고 했다.

중성미자 한·일 프로젝트의 필요성

“일본의 중성미자 실험은 (도쿄에서 북쪽으로 100㎞쯤 떨어진) J-PARC(Japan Proton Accelerator Research Complex)에서 한다. 이곳에서 중성미자를 만들고, 300㎞ 떨어진 가미오카로 쏜다. 가미오카에 있는 지하실험실에서 중성미자를 검출한다. 그런데 이 중성미자들이 한국을 통과하기 때문에 한국에 중성미자검출기를 하나 더 설치하자는 얘기가 양국 간에 오가고 있다. 한국에 설치하면 자연조건상 일본의 검출기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 특히 양성자 붕괴 실험은 대구 인근의 산이 높아 유리하다.”

하지만 이 한·일 협력프로젝트는 진행 여부가 불확실하다. 과학자 커뮤니티에서는 문제가 없으나, 양국 관계가 악화하면서 정부 돈으로 하는 이 사업이 잘 진행될지 양국 물리학자들이 우려하고 있다.

고병원 교수는 대학원 석사까지는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했고, 1986년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했다. 쿼크라는 입자와, 쿼크의 반물질인 반쿼크로 만들어진 K중간자라는 입자를 연구했다. ‘K중간자의 희귀 붕괴에서의 CP 대칭성 깨짐 연구’가 박사논문 내용이다. 그는 “강한 상호작용을 하는 입자들을 많이 공부했다”고 말했다.

1991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미니애폴리스 소재)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며 역시 강한상호작용과 관련한 입자를 연구했다. J/Ψ입자라고 불리는 무거운 입자를 포함한 무거운 쿼코늄 현상론을 연구했다고 했다. J/Ψ입자와 쿼코늄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입자물리 용어들이다.

그는 이후 1994년 한국에 돌아와 홍익대 조교수로 일했고, 1997년부터는 카이스트 물리학과 부교수로 일했다. 대전 카이스트에서 8년간 일하고 서울 고등과학원으로 옮겨온 게 2005년이다. 그는 “고등과학원으로 온 뒤 조금 지난 2008년부터 암흑물질 연구를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주로 암흑물질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학문 연구 궤적은 △강입자 물리학 △CP 대칭성 깨짐과 초대칭이론 △암흑물질 연구라는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고 했다.

고병원 교수의 암흑물질 연구는 크게 두 가지로 얘기할 수 있다. ‘암흑 QCD 모델’과 ‘암흑 힉스입자 이론’이다. 암흑 QCD 모델 논문은 2012년 입자물리학계의 최고 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에 실렸다. 고 교수는 “미국 물리학회가 발행하는 ‘피지컬 리뷰 레터스’가 입자물리학계 최고의 학술지다. 요즘 네이처, 사이언스 하지만, 입자물리학자는 전통적으로 이 두 학술지에 논문을 싣지 않고,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실리는 걸 최고의 영예로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그의 ‘암흑 QCD 모델’은 한마디로 암흑물질의 질량이 생기는 메커니즘을 일반 물질인 양성자 질량이 생성되는 QCD 모델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한 것이다.

고 교수는 “다른 이들은 콜먼-와인버그 모형으로 질량이 생기는 걸 설명했지만, 나는 다르게 접근했다. 새로운 강한 상호작용에 의해 새로운 쿼크와 반쿼크가 결합해 암흑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 모형은 일반물질을 설명하는 QCD와 아주 비슷하다. 핵심이 같다”라고 설명했다. 이 이론에서 출발해 새로운 암흑물질 후보로 심프(SIMP)를 제안한 이론의 완결판을 중앙대 이현민 교수 등과 함께 얼마 전 발표하였다. 그의 암흑물질 연구는 일반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려워도 문장을 그냥 읽고 지나가면 되니, 계속 그의 말을 전해보기로 하자.

고병원 교수의 ‘암흑 힉스입자 이론’은 2014년 연구다. 고 교수에 따르면 암흑물질 두 개가 만나면 쌍소멸하는데, 그런 뒤에 이들은 표준모형 속의 입자로 변할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해왔다. 그의 연구는 표준모형 입자로 바로 변하지 않고, 표준모형 입자로 바뀌기에 앞서 암흑 힉스입자 두 개로 먼저 변한다는 게 핵심이다.

“입자가속기에서도 암흑 힉스입자가 중요하다. 학자들은 그걸 무시해왔으나 나와 연구자 몇 사람이 이론적으로 그걸 처음으로 연구를 했다. 가속기에서의 암흑물질 탐색에 있어 표준모형의 힉스입자 외에도 암흑 힉스입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처음 제안했다.”

고병원 교수는 이 암흑 힉스입자 연구로, 2016년과 201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미국 어바인-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열린 ‘LHC에서의 암흑물질’ 워크숍에 초청받았다. 아시아 학자로는 유일하게 초청 강연했다. 그는 “힉스입자와 암흑물질의 상호작용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열악한 한국 고등과학원

고병원 교수는 하루 일과를 ‘arXiv.org’ 사이트를 방문하는 걸로 시작한다고 했다. 세계의 물리학자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이 사이트에 경쟁적으로 올린다. 고 교수는 “입자물리학계는 경쟁이 심하다”면서 소장파 학자들과 오늘도 치열하게 연구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물리학과 79학번 동기가 서울대 물리학과의 김수봉(중성미자 실험)·강병남(통계물리학)· 안경원(원자물리실험) 교수와 한양대 신상진 교수(초끈이론) 등이라고 했다.

고등과학원(KIAS)은 미국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과학원(IAS)을 본떠 생겼다. 한국의 기초과학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1996년에 만든 순수이론연구 기관이다. IAS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쿠르트 괴델 같은 전설적인 과학자, 수학자가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탈출, 미국에 와서 연구하던 곳이다. KIAS 연구자도 학생 가르치는 부담은 없고 연구만 한다. 수학, 물리학, 계산과학부 등 세 학부 소속 연구자들이 있다. 미국 프린스턴의 고등과학원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서 찾아갔던 한국의 고등과학원 환경은 좀 실망스러웠다. 카이스트 경영대와 인접해 있는 등 한국 최고의 과학 두뇌가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사색할 수 있는 여유 공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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